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56화 (56/140)

#56화. 바쁘게 돌아다닐 계획

오랜만에 찾은 천상현의 작업실에는 ‘천상’이라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그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자.

“실례합니다.”

“아! 대표님! 오셨어요?”

무아지경으로 작업에 몰입 중이던 천상현이 대뜸 일어났다.

옆에 있던 한우주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었다.

“신 대표님. 오셨어요?”

“응. 우주야. 잠깐만 쉬자.”

잠시 후.

작업실 한쪽에 있던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반가운 상봉을 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그렇죠?”

“네. 저희가 현장 가는 일이 통 없으니, 이렇게 후반 시작해서라도 뵈니까 좋네요.”

“현장에도 한 번씩 오세요. 너무 작업실에만 있는 거 아니에요?”

천상현이 환하게 웃더니 작업실 벽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 액자를 가리켰다.

“가끔 산책도 하긴 하는데 너무 바쁘면 저거 봅니다. 대표님이 딱 센스 있게 그림을 선물해 주셔서. 작업실이라 창문이 없어 답답했는데 저거라도 걸어두니 확실히 나아요.”

천상현은 <투명한 사랑> 이후 수입이 많아져 ‘천상’이라는 사업자를 내었다.

버는 만큼 내는 세금이 꽤 나와서였다.

사업자 등록만 한 것이었으나 그래도 개업이니 걸어두면 돈 들어온다는 해바라기 그림을 선물했다.

“많이 바쁜가 보네요.”

“네. 상 받으니 의뢰 횟수가 단위부터 달라지더라고요. 딱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의뢰만 받는데도 손이 모자라요. 직원을 몇 명 더 뽑을 생각입니다.”

사업이라는 게 그냥 보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게 영 다르다.

“직원들 늘어나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더라고요. 재미도 있고.”

“저는 지금도 힘들어서 걱정입니다. 대표님이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하하. 제가 뭐 하는 게 있나요. 저보다는 직원들이 더 힘들걸요?”

“에이, 무슨 소릴 하십니까. 제가 음악만 맡아도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는데. 이번엔 심령사진도 찍으셨다면서요?”

소문이 빠르긴 하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한우주가 대뜸 물었다.

“대표님! 근데 그거 진짜 심령사진 맞아요?”

곡 작업할 때는 그렇게도 어른스럽던 아이가 귀신 이야기에는 마냥 그 나이대의 학생이었다.

“글쎄? 사람들이 다 귀신처럼 보인다고는 하더라고.”

“우와. 신기하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아이는 그저 신기하다는 말만 연속했다.

천상현이 그런 한우주를 보면서 말했다.

“우주 성인 되면 바로 공동 대표로 이름 올리려고 계획 중입니다.”

그 말에 한우주가 고개를 저었다.

“형. 그렇게 안 해줘도 된다니까요? 또 그 소릴 하시네.”

“인마. 우리는 이제 동업자다. 동업자.”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한보배의 말이 떠올랐다.

우주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그 말.

“어쨌든 두 분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아라비안필름의 두 번째 작품인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후반이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대표님! 지금 난리 났어! 난리!

다급한 목소리의 예정우였다.

“예? 무슨 일인데요?”

-그때 사람 뽑아준다고 했지?! 지금 당장 뽑아줘! 당장!

“지금이 저녁 9신데 어떻게 당장 뽑아요.”

-어휴. 그러니까 말이다! 저녁 9신데 이것들은 상도덕도 없나. 내 핸드폰 불이 난다. 불이!

음, 반응이 예상보다 빠른데?

“세트장 문의 때문에요?”

-응? 어떻게 알았어?

당연했다.

내가 영화판에 심령사진을 의도적으로 뿌려댔으니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이겠지.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그럼 형님 장비 차 문의도 늘었어요?”

-그래! 드라마, 광고팀은 물론이고, 장비 차 대여는 또 어떻게들 알았는지 6개월은 돌릴 차도 없다!

좋은 현상이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사람 뽑아 드릴 테니까, 한주건설 안용덕 팀장한테 연락이나 해주세요.”

-안 팀장한테는 왜?

“왜긴요. 세트장 더 늘려야죠. 장비 차도 더 사고.”

-뭐?!

전화기 너머로 예정우의 한탄이 이어졌다.

*

며칠 뒤.

최세준 과장을 만났다.

이번이 벌써 우리 제작사 영화의 세 번째 배급이었기에 이제 그와의 미팅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아, 그리고 과장님. 저희 이번에는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해보려고 하는데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그쪽으로도 준비해놓을게요. 수상까지 하면 좋겠지만, 초청만 받아도 홍보 효과는 꽤 좋으니까요.”

“홍보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이런 쪽으로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핸드폰을 꺼내 세트장에서 찍은 사진을 그에게 보여줬다.

“아! 이게 그겁니까? 크랭크업 날 찍힌 귀신 사진?”

“예. 맞습니다. 뭐, 배우들 라디오 같은 곳 나가서 현장 에피소드로 이야기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당연하죠.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 은근 많지 않습니까.”

그와의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고민에 빠졌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것이기에 이번에 흥행한다면 회사로 들어오는 수익의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그전에 현재 남아 있는 자금으로 아직은 널널한 남양주 땅에 세트장 1동 추가 건설과 장비 차 구입을 하게 되면, 남는 돈은 5억 정도였다.

그 정도면 사고도 남겠지.

나는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또 바쁘게 돌아다닐 계획을 세웠다.

*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 후반과 <망자와 함께> 프리 동시 진행 덕분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세트장 쪽은 예정우가 하도 힘들어하길래 우선 이 과장을 붙여줬다가 정식으로 공고를 내고, 면접을 진행해 1명의 직원을 채용했다.

이 과장은 세트장에 가 있던 한 달 새 볼이 토실해져서 돌아왔다.

“재민 씨. 형님이 맛있는 거 많이 사줬어요?”

이 과장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예. 그게, 혼자 쓸쓸하셨는지 밤마다 근처 맛집 탐방을 시켜주셔서요.”

예정우가 보기보다 혼밥을 못한다.

아마도 평소 눈여겨봤던 곳을 모조리 데리고 간 모양이다.

또 남양주에선 세트장 1동의 추가 건설이 시작되었다.

기존 세트장 근처에서의 공사라 소음 때문에 약간 걱정했는데, 방음에 신경을 많이 쓴 덕에 다행히도 다른 팀이 와서 촬영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장비 차 6대도 추가로 매입하니 만 평의 넓은 땅은 점점 여백이 없어지고 있었다.

두 작품의 프리와 후반이 막바지를 향하면서 사무실 식구들의 어쩔 수 없는 야근은 잦아졌다.

특히 CG 팀과의 회의는 매일 있을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그 외에도 리딩, 고사 등등의 굵직한 행사들을 진행하자 어느새 크랭크 인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은······.

“안녕하십니까.”

임윤서와 함께 그녀가 선임한 변호사를 찾았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후반이 마무리되고,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제 곧 NX엔터와의 분쟁을 터뜨려야 할 시기가 왔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된 것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날과 비슷했다.

“예. 박재익이라고 합니다.”

박재익은 연예계 사건을 전문적으로 수임하는 변호사라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명함을 잘 챙겼다.

크랭크 업 날 봤을 때보다 핼쑥해진 임윤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표님. 걱정하실 거 같아서 말씀 못 드렸는데 저 결정적인 증거 잡았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걱정하실 거 같아서’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하고.

“제가 정말 그런 소리까지 들을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 저보고 접대를 하라는 거 아니겠어요?”

“예?”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뒤봐주는 의원이 저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래요. 며칠 전부터 그냥 밥만 먹는 자리라고 나오라는데 제가 이 바닥 1, 2년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미쳤습니까. 거길 나가게.”

접대를 접대라고 하면서 나오라고는 하지 않으니 분명 그녀가 나갔으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이제 진짜 못 참겠어요.”

상종 못 할 놈들의 만행에 화가 치밀었다.

“예. 참으면 안 되겠네요. 그 사람들.”

박재익은 잘 정리된 증거 목록들을 내게 내밀었다.

“그럼 처음 계획대로 소송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지요. 아직 계약이 물려 있으니까요. NX엔터에서 순순히 저희 원하는 대로 해주진 않을 겁니다.”

연예인들이 재계약을 하지 않아 보복성 루머에 시달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소송으로 가되 그들이 어떻게 못 하도록 조치를 취해두죠.”

박재익이 물었다.

“혹시 아는 기자님 있으십니까?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는 기자라고 물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예. 사정 이야기하면 나서서 도와주실 분이 있습니다. 오늘 연락해볼게요.”

박재익과 헤어지고, 매니저도 없이 몰래 나온 임윤서의 택시를 불렀다.

맘 같아선 회사 차를 타고 온 내가 직접 데려다주고 싶었으나 괜히 매니저라도 마주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차 안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중에 그녀가 물었다.

“진짜 뒤통수 제대로 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오늘 나오는 것도 얼마나 꼬치꼬치 캐묻던지.”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는 그때.

지잉-.

지잉-.

사무실에 있을 나경의 전화가 왔다.

“잠시만요.”

임윤서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통화 가능하세요?

“예. 말씀하세요. 무슨 일 있어요?”

-네! 아주 큰일이요!!

큰일이라면서 목소리는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톤이다.

-베를린에서 메일 왔어요. 저희 초청됐대요!

오, 화제성을 더 올릴 수 있겠다.

“잘 됐네요. 이번에는 나경 씨랑 재민 씨도 같이 갈 거니까 준비해줘요.”

내 말에 나경은 좀 당황한 듯했다.

-네? 저희 둘이요?

“예예. 알려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아, 네넵!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면서 계속 보고드릴게요!

씩씩한 그녀와의 전화를 끊자 임윤서가 물었다.

“혹시 영화제 초청된 거예요?”

“예. 윤서 씨도 회사에 말해서 일정 빼두셔야 할 것 같은데요?”

“사실 매니저고 뭐고, 저 혼자 가고 싶은데 그건 안 되겠죠?”

당연히 NX엔터에서 그걸 허락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원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가 회사 쪽에 이야기해둘게요. 그리고 도착하면 발을 좀 묶어두죠.”

“발을 묶어요?”

그녀에게 씩 웃어 보였다.

“예.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때.

그녀를 태우고 갈 택시가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저 택시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박 변호사님께 전화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대표님 덕분이에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임윤서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막 뭔가가 생각난 얼굴로 물었다.

“아, 대표님. 혹시 아는 소속사 있으세요? 여기 계약 정리되면 이제 들어갈 회사 또 찾아야 하는데 누굴 믿을 수가 있어야죠. 다른 조건 다 필요 없고, 인성만 괜찮으면 되거든요? 그런 분만 있으면 진짜 뼈를 묻을 수 있어요!”

믿을 수 있는 인성 좋은 소속사 대표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은 유일했다.

“딱 한 분 알고 있는데, 소개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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