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신도시의 불빛
<왕국 : 역병의 시작>은 곧바로 전해성에게 넘어갔다.
6화 분량으로 적지 않은 양이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한 달만 주세요. 와. 그나저나 좀비? 그것도 시대물? 이번 소재 장난 아닌데요?
쿨한 전해성의 번역이 끝나면 나는 그것을 컴플릭스 미국 본사로 보낼 예정이었다.
회귀 전 컴플릭스는 OTT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자신들만의 영역을 견고하게 구축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컴플릭스 주된 사업은 비디오와 VOD 사업.
OTT 사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 사업확장을 위해 주변 국가들의 영화, 드라마, 심지어는 시나리오 할 것 없이 검토하면서 괜찮은 작품들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분명 <왕국 : 역병의 시작>에 환장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연락이 온다면······.
일련의 계획과 목표가 있었다.
“근데 신 감독님. 이거는 어쩌다가 쓰신 거예요?”
전생에서의 그녀는 그저 영화의 원작자에 불가한 웹툰 작가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래가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글쎄요. 대표님이 계속 믿어주니까 자꾸 뭔가를 하고 싶었달까요?”
[신바드의 모험] 덕분이긴 했으나 어떻게든 그녀의 첫 연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했기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 주된 이유였나 보다.
그렇다면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아주 양껏 땡겨 와야겠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이 과장, 아아, 아니 재민 씨. 여기 거울 좀 닦아주세요.”
“넵! 대표님!”
요새 자꾸 이 과장을 이 과장이라고 불러 그는 의도치 않은 승진을 자꾸 하는 중이었다.
“대표님. 혹시 재민 씨 승진해요?”
나경의 똑 부러진 말소리에 움찔했다.
“에이, 설마요. 승진은 하더라도 나경 씨부터 시켜드려야죠.”
이 과장을 이 과장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기구한 인생.
“시간 거의 다 됐죠?”
오늘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의상 피팅 날이었다.
의상 피팅이라는 게 옷을 갈아입을 공간이랑 다 같이 모여 확인할 공간만 있으면 돼서 사무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임시 탈의실은 대표실을 정리해서 만들었는데.
다른 방들은 다 불투명 유리로 구분되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블라인드를 꼼꼼하게 쳐놓고, 행거와 입식 거울까지 가져다 놓으니 얼추 탈의실 같아졌다.
“네. 아마 곧 오실 것 같은데요?”
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사무실 좋습니다!”
고덕현이었다.
“오셨습니까.”
내가 대표실을 나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화분 하나를 쓱 내밀었다.
“이사했다는 소식 들었는데 이제야 와봅니다. 하도 딸래미가 이런 거라도 사 가야 한다고 해서.”
화분에는 ‘개업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힌 리본이 달려 있었다.
개업은 진작했는데······.
뭐, 사 온 게 어디냐.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죠.”
배우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오면 다 같이 보려고 회의실 테이블을 치운 뒤 의자를 몇 개 가져다 놨다.
“그나저나 사무실이 아주 깔끔하고, 쾌적합니다.”
의자에 앉은 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며 답했다.
“예. 이번에 돈 좀 썼습니다.”
“하기야! <투명한 사랑>이 잘 됐으니 좀 써도 괜찮지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뭔가가 생각난 듯이 이야기했다.
“아 맞다. 저는 몰랐는데 저희 애들 보너스 챙겨주셨다면서요?”
<투명한 사랑>이 잘 돼서 뿌린 보너스는 스태프들에게만 전달했다.
키 스태프는 빼고.
그들은 원래도 많이 받아 가니 안 줘도 된다.
“예. 다 같이 고생해서 만든 건데 드려야지요.”
“어쩐지, 애들이 아라비안필름 작품은 꼭 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거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퍼스트 놈이 그제야 말을 해주더라고요.”
역시 보너스의 힘이란.
촬영, 조명팀 현장에서 보면 잘 해줘야겠다.
“하하. 그러셨습니까.”
고덕현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그나저나 진주는 요새 많이 바쁩니까?”
고진주는 <망자와 함께>에 노흥기 감독이 투입되자마자 스크립터로서의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노흥기 감독이 꼼꼼한 스타일이라 더 힘들 것이다.
“그렇죠? 노 감독님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어휴. 노흥기 감독님 밑에서 스크립터라니. 처음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애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 말씀 없는 것 보니 잘하고 있는 겁니다. 원래 말 나오지 않게 일하는 게 제일 힘든 거 아시지 않습니까.”
고덕현은 내 말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것보다 요즘은 영 진주 얼굴 보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맨날 집에 와서 잠만 자고 가서요.”
어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둘의 포지션이 1년 만에 바뀐 것 같아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주 씨도 이젠 감독님이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조금은 알지 모르겠네요.”
그 뒤로 의상, 분장팀과 임윤서, 이서아가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의상 피팅이 시작됐다.
먼저 임윤서가 단정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회의실에 모여있던 사람들 앞에 섰다.
그 모습을 꼼꼼히 살펴본 허훈이 의상 실장에게 물었다.
“이게 초반부 라라 옷인 거죠?”
“네. 감독님.”
라라는 극 중 직업이 몇 번 바뀌는데 지금 입은 옷은 초반부 변호사 시절의 의상이었다.
“이 정도 톤이면 좋을 것 같네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의상, 분장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연출팀은 임윤서의 사진을 찍어댔다.
다음으로 임윤서가 갈아입고 온 의상은 베이지색 바탕에 남색 땡땡이가 박힌 롱 원피스.
“의상에서 색을 좀 더 많이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이거 말고도 다양한 색으로 준비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라라는 살아가면서 심경이 급격하게 변화한다.
허훈은 그 변화를 의상과 분장으로 주려고 했다.
“이 장면부터 눈이랑 입술, 볼까지 색조 강하게 들어가 주세요.”
“음, 강하게요?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분장 실장은 가지고 온 노트북을 꺼내 미리 찾아 둔 레퍼런스 사진들을 허훈에게 보여줬다.
“좀 더 시니컬했으면 좋겠는데.”
분장 실장이 보여 준 사진들은 죄다 파란 눈의 빨간 립스틱.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그때.
조용히 있던 임윤서가 입을 열었다.
“저, 붉은색 섀도는 어떨까요?”
“붉은색이요?”
“네. 제가 가끔 기분 전환하려고 집에서만 사용하는 섀도 색이 있거든요.”
“오, 뭔가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허훈은 그녀의 말에 깊게 공감했지만······.
집에서만 사용하는 섀도 색이 왜 있는 거지?
예술 하는 사람들이란, 정말 다 이렇게도 특이한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임윤서의 의상 피팅이 모두 끝나고, 이서아의 피팅이 시작됐다.
나는 임윤서가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으러 들어가자 매니저에게 다급한 척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밖에 차 좀 빼달라고 하던데. 밖에서 기다리시면 윤서 씨는 제가 데리고 내려갈게요.”
뭔가 석연치 않아 하는 느낌이길래 몇 번 더 재촉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임윤서가 나왔다.
“윤서 씨. 잠깐만요.”
“응? 한 실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역시나 자신이 나와 이야기하는 걸 매니저가 볼까 봐 그부터 찾는다.
“먼저 내려보냈어요. 증거는 얼마나 모였어요?”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전화랑 대화 녹음, 문자까지 계속 모으고 있는데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소속사 몰래 변호사를 선임했고.
증거를 모으는 족족 변호사에게 보내고 있었다.
“혹시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 어떨 것 같아요?”
배우에겐 이미지가 생명이다.
물론 소속사의 잘못이었고, 그녀는 피해자였으나 꼬아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물은 것인데.
“저는 최대한 크게 터뜨리고 싶은데요? 후배들은 이런 일 안 당해야죠.”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었다.
“그럼 영화 개봉쯤에 터뜨렸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어요?”
임윤서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달을 세었다.
“그럼 한 6개월 정도 남았네요?”
“예. 소속사 나온 뒤라도 영화가 잘 돼야 진정한 복수를 한 거잖아요.”
내 말에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너무 좋죠. 저는 상관없어요. 아직 증거도 부족하고.”
좋아. 그녀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제 촬영만 무사히 끝나면 일사천리였다.
*
한 달 후 <왕국 : 역병의 시작>의 번역이 완료됐다.
나는 번역본을 받은 다음날 시나리오를 상자에 담아 테이프로 둘둘 감싼 뒤 우체국으로 향했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컴플릭스 본사로 보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본사 이메일로 우리의 상황을 알렸다.
이제 컴플릭스 담당자가 수많은 시나리오 중 우리 것을 확인, 검토 후 회의까지 거치는 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 처리가 우리나라만큼 빠른 것은 아닐 테니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으나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 쪽도 두 작품의 촬영을 끝내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10월이 막 시작할 때쯤.
“레디! 액션!”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총 50회차에서 3분의 1 정도의 촬영이 진행됐을 무렵.
오늘은 문제의 공원 언덕 씬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스태프들이 불편해할까 봐 웬만하면 현장을 오지 않았는데, 이 촬영은 걱정되는 마음에 찾았다.
황혼 시간에 맞춰 딱 촬영을 시작해야 했기에 다들 정신없이 분주한 모습이었다.
“무술팀! 와이어 준비됐어요?!”
“야! 이놈들아! 달리를 아직도 깔고 있어? 굼벵이들이야?!”
“조명 세팅 아직입니까?!”
“연출팀! 배우 언제 와!”
“시간 없어요! 빨리들 움직입시다!”
역시 시장통, 전쟁통이 따로 없다.
전생에선 어떻게 그렇게 살아남았나 모를 일이다.
그때.
정 PD가 다가왔다.
“대표님. 오셨어요?”
그는 항상 마시던 초콜릿 맛 프로틴 음료를 들고 있었다.
“하나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PD님 요즘 바빠서 운동도 잘 못 가신다 들었습니다. 그거라도 잘 챙겨 드셔야죠.”
그는 웃으면서 프로틴 음료를 단숨에 마셨다.
“그나저나 저번에 그 공무원은 해결이 잘 됐나 봐요?”
“사실 고생 좀 했습니다. 며칠 전까지도 촬영을 접네, 마네 말이 많았어요.”
좀이 아니라 많이 고생한 것 같은데.
“며칠 전까지도요?”
“예. 저희가 시청으로 직접 찾아뵙고, 허가 절차 진행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무슨 일인지 무작정 안 된다고만 하면서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정 PD는 촬영 후 지역 홍보에 필요한 배우 사진과 사인 제공, 영화가 잘 되면 관광명소로 사용할 수 있게 스틸 사진 제공, 또 지방 촬영이다 보니 백여 명이나 되는 스태프들의 숙박과 식사를 진행하며 지역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등등 꼬실 수 있는 온갖 요소들은 다 이야기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그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사실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응?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저요?”
“예. 거의 포기하던 차에 그날 버스 타면서 대표님이 했던 말이 기억나지 뭡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때 이 공원은 보수도 안 하나 시설이 왜 이렇게 낙후됐지? 라고 하셨잖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버스를 타기 전 공원을 훑어보고, 저런 말을 하긴 했다.
공원이 위치한 덕구시는 최근 떠오르는 신도시였다.
당연히 언덕 아래로도 삐까뻔쩍한 새 건물들이 많이 보였는데.
그에 반해 공원의 시설이 낡고, 허름한 것 아닌가.
그냥 방치해놓은 것처럼.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아 지나가는 말로 한 거였는데······.
정 PD가 싱글벙글 웃었다.
“글쎄 그 공무원이 공원 보수 업체 선정해놓고, 설렁설렁 일해도 봐주면서 돈을 받고 있었더라고요. 촬영하게 되면 공원 상태가 버젓이 다 나올 텐데 당연히 결사반대하고도 남죠.”
원래라면 내가 직접 발로 뛰어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나 그날의 오해(?)로 인해 정 PD가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잘 해낸 것이다.
“정말요? 근데 그게 왜 제 덕분입니까. PD님이 잘 해결해놓고선.”
“대표님 말 아니었으면 알아볼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근데 여기 진짜 잘 섭외한 것 같아요. 촬영 못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렇죠?”
내가 그 말에 답하려는 그때.
“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이어 준비해주세요! 자! 레디!”
임윤서 몸에 매달린 와이어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액션!”
조감독 신호의 그녀는 주황과 보라가 섞인 오묘한 하늘로 가뿐히 떠올랐다.
그 뒤로 보이는 신도시의 불빛.
그 경치와 공중에서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다.
‘그러게요.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못 볼 뻔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