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실수는 두 번만 안 하면 됩니다
1화를 클릭하자마자 순식간에 화면으로 빠져들었다.
6화 분량을 3시간 만에 읽고 보니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한 자세로 가만히 있었는지 눈이 뻑뻑하고, 목이 말랐다.
잠시 탕비실로 향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 장난 아닌데?’
3시간 동안 나를 붙잡아 둔 <왕국 : 역병의 시작>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현대인이 120년째 좀비와 싸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조금 특이한 도입부였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나.
너무 오랜 시간 좀비와 싸워 온 인류에게 좀비는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좀비를 피해 출근하고.
좀비를 피하기 위한 각종 아이템이 팔렸으며.
좀비를 인력으로 사용 가능한 약물이 개발되는 그런 세상이 극 중 배경이었다.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도 그들과 같았다.
주인공은 어느 날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한다.
좀비가 있는 삶도 나쁘진 않지만, 만약 없더라면 그 삶은 어땠을까.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주인공은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한 달 전으로 시간여행을 했고.
순식간에 120년 전 구한말로 간 주인공이 바이러스를 막아보려 고군분투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분부분 개연성의 문제가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보완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시나리오만으로 판단하긴 힘들었으나 이건 두 번째 인생을 살며 많은 콘텐츠를 접한 내가 봐도 재밌었다.
그러나 좀비와 시대극에 드라마라······.
첫 번째로 걸리는 건 돈이었다.
좀비 특수분장과 시대에 맞는 세트, 의상 등 회당 제작비를 도대체 얼마로 측정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정서상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외에서는 고어한 장면을 연출하는 좀비 영화들이 예전부터 만들어지며 소비되었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달랐다.
한국에서 좀비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공식처럼 적용되고 있을 정도였다.
또 영화관에서조차 심의가 엄격하게 적용되는데 하물며 안방으로 피 묻은 시체들을 전송한다?
이건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6화 분량의 드라마를 영화로 압축해서 각색하기도 애매하다.
이 시나리오를 살릴 수 있는 최선은 역시 그것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글을 쓴 신서영의 허락이 필요했기에 그날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감독님. 라라 아역으로 이서아 양 캐스팅 확정이라면서요?”
버스 옆좌석에 앉아 있던 허훈에게 말을 걸자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잘 됐죠? 임윤서 배우가 예전에 한번 작품을 같이 했었는데 자기 어렸을 때 생김새랑 비슷해서 신기했다고 추천하시더라고요.”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라라의 어린 시절도 나오기에 아역배우도 캐스팅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망자와 함께>에 카메오로 출연을 확정한 이서아를 임윤서가 추천한 것이다.
그녀의 추천으로 자세히 비교해보니 둘의 생김새가 진짜 비슷했고.
그녀의 아역으로 이서아보다 안성맞춤인 배우는 없었다.
“임 배우님은 피아노 연습 잘하고 계세요?”
“말도 마세요. 요즘 하루에 7~8시간을 피아노만 치신대요. 한 번은 손가락에 경련이 와서 병원까지 가셨다던데요?”
그건 좀 광적인 것 같은데.
“지금은 괜찮으세요?”
“네. 다행히 며칠 쉬니깐 괜찮아졌다더라고요.”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정 PD는 뒤를 돌아 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저, 대표님. 목은 안 마르세요?”
“예. 괜찮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하하. 그게 참 맘처럼 잘 안되네요.”
아무렴, 내가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신경이 쓰이겠지.
오늘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확인헌팅 날이었다.
영화는 실제 존재하는 장소에서의 촬영과 세트 촬영으로 나뉘는데.
어디서 촬영하든 장소관리는 제작팀의 몫이다.
이미지에 맞는 장소를 찾고, 섭외하고, 주변 제반까지 봐야 하는 장소헌팅은 제작팀이 하는 수많은 일 중, 단연코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고를 통해 엄선된 장소들을 키 스태프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픽스하는 날이 확인헌팅이었다.
다시 말해 제작팀 입장에선 엄청 중요한 날이라는 것이지.
정 PD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어느 영화라도 제작사 대표가 확인헌팅에 따라붙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기에 나도 따라오고 싶지 않았지만.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확인한 [신바드의 모험]의 힌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확인헌팅, 공무원]
누가 봐도 확인헌팅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지 않은가.
급하게 정 PD에게 연락해서 지방으로 갔다 오기 위해 대절한 버스에 자리가 남느냐고 물었고, 정 PD에게는 없는 자리도 만들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지금 가는 곳이 마지막 장소인데 아직 이렇다 할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힌트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때.
버스가 어느 한적한 주차장에 멈춰 서자 제작실장이 일어나 외쳤다.
“자, 도착했습니다. 다들 내리시죠.”
우리가 둘러볼 마지막 장소는 한 공원의 언덕.
이곳에서 찍게 될 장면은 황혼이 내리깔리며 야경이 시작될 무렵 라라가 혼자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주변 경관과 빛 등이 촬영 때와 같은 조건이어야 했기에 버스에서 내렸을 땐 해가 막 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곳은 공원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람이 없었다.
촬영 장소로는 인적 드문 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그만큼 통제해야 할 게 줄어드니까.
허훈은 내리자마자 언덕을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제작팀과 연출팀은 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메모 중이었고, 고덕현을 필두로 한 키 스태프들도 따라다니며 귀를 기울였다.
나도 허훈의 말이 들릴 정도의 근처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음······.”
허훈은 팔짱을 끼고 잠시 멈춰 서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장소랑 딱 맞는데요? 너무 좋아요. 여기로 픽스하시죠.”
언덕에서 춤추는 장면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고, 허훈이 원하는 디테일이 까다로워 애를 먹는 장소라고 들었다.
그의 입에서 ‘픽스’ 소리가 나오자 제작팀 중 한 명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장소의 담당자일 것이다.
허훈은 이제 라라의 동선과 카메라 무빙, 조명 등을 어떻게 세팅되면 좋을 것인지 키 스태프들과 상의했다.
“아, 그리고 여기 와이어 준비해주셔야 합니다. 라라를 와이어로 올렸을 때 달이랑 같이 걸려야 하니까 CG 팀장님께도 전달해주시고요.”
옆에 있던 조감독이 끄덕였다.
“네. 감독님.”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낀 그때.
“뭐 하시는 분들입니까?”
뒤에서 약간은 히스테리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가슴을 쓸어내리던 제작팀 남자가 부리나케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영화 촬영팀입니다. 혹시 어디서 나오셨을까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인상을 팍 쓰더니 되물었다.
“영화 촬영팀이요? 여기서 촬영한다는 말입니까? 누구 허락받고 진행하는 겁니까?”
제작팀은 남자의 기세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예? 공원 관리자님께 이미 말씀드렸고, 촬영 가능하다고 하셔서-.”
남자는 그 말을 잘랐다.
“공원 관리자? 아, 그 김 씨 말하는 건가? 시에서 관리하는 걸 그 아저씨한테 허락 맡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작팀의 명백한 실수였다.
힌트가 말하는 사건이 이건가?
상황이 심각해지자 제작실장과 부장이 나섰다.
“아, 혹시 담당 공무원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어쨌든 여기 민원 들어와서 촬영 불가하니까 철수하세요.”
응? 갑자기 무슨 민원이 들어와?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가 답사 중이던 언덕은 공원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어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가 마주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민원이 들어가겠는가.
남자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뭔가 뒤 구린 냄새가 확 난다.
제작실장과 부장도 그 냄새를 맡았을 테지만, 우리 쪽에서 실수하기도 했고, 여기서 같이 어깃장 놔봐야 일만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희가 오늘 당장 촬영하는 건 아니고, 미리 답사를 온 겁니다. 정식 허가 절차는 제대로 받겠습-.”
그러자 남자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아!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라고!! 빨리 가세요!”
공무원의 대부분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며 청렴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딜 가나 물을 흐리는 놈은 꼭 있는 법이고.
섭외를 하다 보면 가끔 영화팀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해 갑질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혼자 흥분해서 소리까지 지르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어느새 해가 거의 저물어 하늘은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반짝이기 시작하는 불빛들을 보고 있자니 허훈이 이 장소를 좋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자자, 다들 죄송합니다. 이만 차에 타시죠. 조만간 이 장소 확인헌팅은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키 스태프들을 모아 버스로 보냈고, 정 PD를 불렀다.
“PD님. 오늘은 그만 철수하시죠.”
“네. 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정 PD는 아주 곤란할 것이다.
자기가 관리하는 제작팀의 실수로 키 스태프들의 시간을 잡아먹은 것은 물론이요.
확인헌팅을 다시 진행하는 비용도 추가됐다.
그사이 장소 담당 제작팀은 감독이 픽스 한 장소가 어그러질까 봐 아주 사색이 돼서 남자에게 싹싹 빌고 있었다.
“저한테 죄송할 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저 제작팀 그만 빌라고 하세요. 실수는 두 번만 안 하면 됩니다.”
그 말은 단지 [신바드의 모험]에서 힌트로 나온 지금의 사건을 내가 해결해야 할 것 같아 한 것이었는데.
“대표님······.”
정 PD는 아주 감동한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떡해서든 꼭 해결해보겠습니다!!”
음, 뭐 그렇다면야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
*
드디어 기다리던 노흥기와 신서영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나는 그들이 귀국하는 시간에 맞춰 인천공항으로 향했고, 입국장 앞에서 기다렸다.
맘 같아선 ‘환영합니다’ 플래카드라도 만들어 오고 싶었으나 그들이 창피해할 것 같아 그만뒀다.
그때.
입국장의 불투명한 자동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노흥기와 신서영, CG 팀장과 미술 팀장은 사막의 뜨거운 햇빛에 얼마나 놓여 있었던 건지 얼굴색이 한 톤씩 내려가 있었다.
그들에게 얼른 달려가 짐을 받아들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응? 아니, 신 대표가 여긴 웬일입니까?”
“아휴. 당연히 힘들게 일하고 오셔서 장거리 비행까지 하시는데 집까지는 편하게 모셔다드려야죠.”
그새 살까지 쪽 빠진 신서영이 눈을 반짝였다.
“와! 정말요?”
다른 목적이 있긴 했으나 겸사겸사였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럼요! 자, 다들 주차장으로 가시죠!”
그렇게 우리는 주차장으로 향했고, 나는 조금 뒤떨어져 걷고 있던 신서영에게 다가갔다.
“저기. 신 감독님.”
“네?”
어쨌든 그녀의 허락 없이 시나리오를 본 것이었던 터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그거 봤습니다.”
그녀는 다짜고짜 뭘 봤다고 하니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보였다.
“응? 뭘요?”
“왕국이요. 역병의 시작.”
비척비척 걷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오른손을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대더니.
“허어업!”
자신의 입을 막아버렸다.
“죄송해요. 폴더 제목이 너무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언제요?!”
“그때 콘티 본다고 연락드렸을 때요.”
그녀는 ‘이 바보, 천치! USB에 넣어놨어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제가 멋대로 본 거죠. 정말 죄송합니다.”
신서영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아니에요. 뭐, 대표님 보여드리려고 쓴 거 맞는데요. 쓰다 보니 어쩌다 6부작이 돼버려서 못 보여드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수줍게 말을 이었다.
“근데 너무 창피하네요······. 진짜 그냥 끄적거린 건데.”
“저는 엄청 재밌던데요?”
“네?”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나 보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거 번역 한번 맡겨보지 않을래요?”
신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에? 번역을 왜요?”
나는 계획을 실행할 생각에 한껏 신이 났다.
“미국 자본 좀 끌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