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52화 (52/140)

#52화. 채워지지 않는 갈증

임윤서는 멍하니 차 안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윤서야. 요즘 뜨고 있는 브랜드라니까 오늘은 예민하게 굴지 말고, 알았지?”

도대체 자신이 뭘 어떻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짧게 대답했다.

“네.”

올해 배우 경력 12년 차인 임윤서는 한때 업계에서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탑을 찍으며 전성기를 누렸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정상에 있을 수는 없는 법.

어리고, 예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속도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빨랐다.

세상에 배우들의 순위를 매기는 랭킹이 존재한다면 그녀의 순위는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초조함과 다급함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어리석게도 꼬임에 넘어갔다.

전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날 무렵.

지인에게 NX엔터 대표를 소개받았고.

자신을 다시 정상으로 올려주겠다는 대표의 말을 믿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계약서도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대가는 컸다.

NX엔터는 계약 이후 본색을 드러내더니 자신들이 원하는 스케줄만 잡는 등 모든 활동에 간섭해가며 소통이란 걸 일절 하지 않았다.

그 속박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더니 지금은 집 앞 슈퍼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초반의 그녀는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럴 때면 그들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 임윤서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시 정상에 서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살살 다독였다.

그 말을 믿고, 넘어간 것도 수십 차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

남은 계약 기간 1년을 조용히 버티는 것.

오늘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협찬을 해준다는 한 의류업체에서의 피팅 때문에 영혼 없이 따라나선 것뿐이다.

“다 왔다. 내리자.”

차는 아담한 주차장에 주차되었고, 임윤서는 벗어놓은 선글라스를 낀 뒤, 차에서 내렸다.

“실장님. 오늘 스케줄 이게 끝이에요?”

그녀는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에 안심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으나 어쩌겠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의상실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윤서 씨. 안녕하세요. 저는 나앤케이 대표 나은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나은이라는 사람은 문 앞에서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워요. 이쪽으로 가시죠.”

그녀를 따라 들어간 의상실은 요즘 잘 나간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화려한 의상들로 가득했다.

“오늘은 협찬해드릴 옷 피팅하고, 사진 몇 장만 찍을 거예요.”

임윤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은은 자신과 같이 온 실장에게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피팅부터 진행하고 나올게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실장은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는다는데 따라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들어가시죠.”

임윤서는 나은의 안내로 피팅실로 향했다.

그리고 피팅실 문 앞에 선 그녀는 대뜸 속삭이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윤서 씨.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요. 안에서 윤서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들어가도 절대 놀라지 마세요. 도와드리려고 하는 거니까.”

*

피팅실에서 기다리던 나는 드디어 그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바드라고 합니다.”

당연히 임윤서는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세요?”

쓰고 있던 선글라스까지 벗더니 나은과 나를 번갈아 봤다.

“뭘 도와주신다는 거죠? 아니, 애초에 피팅 자리가 맞긴 한 거예요?”

“혼란스러운 거 아는데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서요.”

나는 NX엔터에서 퇴짜를 받자마자 임윤서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양상철에게 부탁해보기도 하고, 알고 있는 연예계 인맥을 다 동원해봤으나 그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꽉 막힌 듯한 느낌이었다.

소속사의 관여가 내 예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은 대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 계획은 나앤케이에서 임윤서에게 의상 협찬을 해주겠다고 한 뒤 그녀를 의상실까지 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NX엔터 실장 놈을 떨어트려 놓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나은 대표는 진짜로 협찬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고.

다행히 NX엔터 쪽에서 그 미끼를 물었다.

그렇게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데요?”

나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대뜸 A4용지 묶음부터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설명 한마디보다 시나리오를 직접 보는 것이 낫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이라고 소속사에서 받은 적 없죠?”

“네? 뭐요?”

역시 그녀는 내가 보낸 시나리오를 읽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소속사에서 커트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저희 영화사에서 이번에 제작 준비 중인 영화예요. NX엔터 통해서 캐스팅 제안했는데 본인이 거절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정말, 아예 자기들 선에서 자르고 있었네.”

“본 적도 없으시군요. 우선 시나리오를 읽어보신 후 마음에 드신다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그녀 손에 내 핸드폰 번호가 적힌 쪽지를 쥐여줬다.

임윤서는 그 쪽지를 꼭 받아든 손과는 상반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든다고 해도 제가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할 텐데.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우선 시나리오 보고 판단해 주세요. 그리고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이 맞다면. 잠시만 귀 좀.”

좀 중요한 이야기라 밖에 있다던 NX엔터 실장이 혹시라도 들을까 그녀에게만 소곤소곤 속삭였다.

“뭐, 뭐예요!”

처음엔 당황하던 그녀도 내가 첫마디를 시작하자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듣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임윤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속사와 문제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보다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이 작품에 캐스팅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소속사와의 문제는 주변에서 들었다고 해두고. 임윤서 씨를 캐스팅하려는 이유는.”

많았다.

라라와 이미지가 맞는 것도.

노래와 춤에 재능이 있는 것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전생에서 뜻밖의 은퇴를 하면서 한 말이 자꾸 걸렸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회귀 전에도 투자해 주는 사람이 없어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여배우들은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단독 주인공도 못 해보고 은퇴하면 억울해하실 것 같아서요.”

*

빌보드 98위로 진입했던 그린 애플은 순위가 매일 조금씩 올라, 한 달이 지난 지금 67위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처음 겪는 귀한 현상에 그녀들의 행보를 응원하기 시작했고.

해외에서의 인지도는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아라비안필름도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아람이 출연한 <투명한 사랑>으로도 관심도가 넘어왔기 때문이다.

일부러 찾아보는 해외 팬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는 기쁜 소식을 최세준 과장이 전해왔다.

그리고······.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며 계절이 바뀔 때쯤.

지잉-.

지잉-.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저 할게요.

“예?”

다짜고짜 뭘 한다길래 뭔가 싶어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익숙했다.

-임윤서예요. 작품 한다고요.

그녀는 큰 결심을 한 듯 보였다.

-그리고 소속사와는 그때 말씀하신 대로 정리했어요.

나는 나앤케이 의상실에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면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NX엔터에 직접 말하라고.

그럼 그들은 아마도 1년 남짓 남은 당신의 재계약을 걸고, 넘어질 거라고.

-역시나 대표님 말대로 제가 하고 싶다고 하니 재계약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재계약하겠다고 하라면서요? 대표가 말이라도 고맙다면서 아주 좋아 죽던데요?

구두계약이란 것이 법적 효력이 없진 않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은 직접 서면으로 주고받기 전에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그런 뉘앙스만 풍기라는 것이었다.

“그럼 증거들은 잘 모아두고 계신 겁니까?”

-네. 아주 엿 먹일 생각하니까 신나서 밤에 잠도 안 옵니다.

성격이 화끈하네.

-어쨌든 소속사에서도 따로 전화 갈 거예요. 그럼 저는 곧 감독님과 미팅하러 갈 테니 그때 뵙겠습니다.

뚝-.

임윤서와의 첫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가 우리 영화에 출연하려면 어차피 소속사와의 분쟁은 피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밖에.

이제 출연은 성사됐으니 분쟁을 터뜨릴 타이밍만 잘 잡으면 된다.

*

“감독님. 라라 역에 임윤서 배우 캐스팅했으니까 조연들은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로 캐스팅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허훈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인배우들이요?”

“그냥 신인도 좋고, 중고신인도 좋고요. 제 생각엔 라라가 많이 돋보여야 하는데 조연들 얼굴이 너무 눈에 띄면 이야기를 따라가던 관객들 몰입이 깨질 것 같아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 신인들 위주로 프로필 받아볼게요.”

임윤서는 캐스팅이 완료된 후로 아라비안필름 사무실을 밥 먹듯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허훈과의 개인 리딩을 통해 장면마다 어떤 감정으로, 표정으로 연기해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아마 NX엔터의 감시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라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봤다.

물론 그녀를 따라다니던 실장이 항상 함께하긴 했다.

“라라가 피아노 치는 장면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대역 쓰신대요? 쓰신다고 하면 정 PD님한테 말씀드리고요.”

허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꼭 직접 치시겠다던데요? 손만 타이트하게 잡으면 대역인 거, 다 티 난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요? 피아노 못 친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옛날에 어디서 들었습니다.”

“그러시구나. 하여튼 그래서 요즘 레슨 다니세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시는데 악기를 못 다루신다더라고요.”

옛날은 옛날이다.

전생에서 들었으니.

음정, 박자감은 타고났는데, 이상하게 손가락을 사용하는 악기는 배우기 힘들어 포기했다고 들었다.

그런 피아노를 다시 배울 만큼 이번 영화는 그녀에게 도전인 것이다.

“스태프들은 <망자와 함께>까지 기다릴 것 없이 대부분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부터 함께하기로 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고덕현 감독님이랑도 두 번째 작품이니 편하실 테고.”

“어휴. 고덕현 감독님은 언제 터질지 모르시는 분이라. 초반에는 긴장 좀 해야 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최근 영화계에는 우리 회사가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들어가는 몇 안 되는 제작사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운영이 잘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으니 좋은 소문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사무실에 앉아 아직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은 신서영에게 문자를 했다.

[신 감독님. 저희 46신 수정된 콘티로 교체가 안 되어 있던데, 혹시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답장은 비교적 빠르게 도착했다.

[제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데 직접 확인이 가능하실까요? 지금 가지고 있긴 한데, 당장 전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고.

푸른색의 바탕화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작업을 많이 했는지 바탕화면의 정리된 폴더는 대충 봐도 수십 개가 넘었다.

“보자, 어디 있나.”

폴더를 쭈욱 훑어보던 나는 뭔가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

이게 뭐지?

그 폴더명은 이러했다.

[왕국 : 역병의 시작]

음, 뭔가의 냄새가 폴폴 나는데.

가만히 보고 있다가, 폴더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더블클릭했다.

그러자 주르륵 나열되는 한글 파일.

그것은 총 6화 분량의 드라마 시나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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