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사후세계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신 대표! 축하해요!”
양상철이 귀국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남양주 세트장이 정식 오픈하는 날로 소소한 인원이 모여 고사를 지내기로 한 날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합니까! 내 당연히 화분이라도 사 들고 와야지요! 허허!”
그의 인정 많은 웃음은 여전했다.
양상철과 같이 세트장을 찾은 한보배는 자신의 키보다도 한참 큰 화환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표님 제가 홍보 진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꼭 대박 나실 거예요!”
“고마워요. 보배 씨. 한창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주고.”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러자 양상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보배 너 오늘 스케줄 있었는데 다른 날로 옮긴 거 아니었어?”
“어머! 전혀 아닌데요! 대표님도 참! 하하!”
어색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뻘게지는 걸 보니 양상철 말이 맞나 보다.
“두 분 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 행사 끝나고, 근처에 식사 자리 마련해놨으니까 꼭 먹고 가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잠시 놔두곤 입구에서 들어오고 있던 류봉수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신 대표님! 와, 이거 세트장 진짜 잘 지어놓으셨는데요? 밖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릅니다.”
그런 그에게 웃어 보였다.
“이제 막 지어놨으니 더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들어오기 전에 여기저기 둘러봤는데 새 건물이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일반 세트장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던데요?”
“그렇습니까? 촬영하면서 불편했던 것들 반영해서 설계해 봤습니다.”
“아! 역시 뭔가 다르더라니! 뭐든지 직접 느껴본 사람은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요!”
나는 잠시 허허 웃다가 그에게 며칠 전 만남의 결과를 물었다.
“그런데 류 소장님. 혹시 구성근 대표님 연락은 아직이십니까?”
구성근 대표는 <투명한 사랑>에 대한 호감과 류봉수의 보증으로 노흥기 감독에게 <망자와 함께> 연출 건을 제안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노흥기가 워낙 고집도 세고, 흥미가 없는 일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성격이니 기대는 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류봉수의 표정이 어두웠다.
꼭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처럼.
“노 감독님이 단칼에 거절하신 겁니까?”
내가 시무룩하게 묻자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빙긋 웃었다.
“아니요! 단칼은 아니고, 신서영 감독님과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답니다.”
놀래라.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는 긍정적이 소식이었다.
“소장님 낯빛이 어두워서 거절하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서프라이즈 해드리려고 그만.”
류봉수는 최근 들어 내가 많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요? <망자와 함께>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라 최대한 빨리 뵈었으면 해서요.”
“아, 그건 제가 교수님께 다시 한번 여쭤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류봉수가 아니었다면 노흥기와 독대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장님.”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신 대표! 신 대표!”
양상철은 평온했던 아까와 다르게 사색이 된 채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는 무슨 일인지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듯 보였다.
“우, 우리 애들이!”
“예? 애들이라면 그린 애플이요? 무슨 사고라도 난 겁니까?!”
“그게 아니고, 애들이 빌보드 차트에 진입했답니다.”
오늘 정말 여러 사람이 다양한 방법으로 놀라게 한다.
“그럼 경사 아닙니까!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주변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모여 양상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나저나 그린 애플이 빌보드라······.
딱 좋은 타이밍이다.
이제 슬슬 해외로 진출할 시기가 왔다.
*
“긴장했어요?”
아까부터 신서영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는 내 물음에 그제야 입에서 손톱을 떼어내고 쳐다봤다.
“아? 네. 긴장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그냥 뭐 물으시면 소신껏 답하세요. 노 감독님이 저희 영화 안 하신다고 해도 그 이유가 절대 감독님 때문은 아닐 테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대화는 제가 이끌어 갈게요.”
그때.
우리가 앉아 있던 곳으로 한 여성이 다가왔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정해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던 우리는 여성의 안내로 어떤 방에 들어섰다.
방안은 내려가 있는 블라인드로 어두웠으나 곳곳을 밝히고 있던 조명과 가습기에서 나오는 하얀 수증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였다.
“감독님. 두 분 모셨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젠틀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흥기.
희끗한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그는 우리가 어정쩡하게 서 있자 책상 위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두고, 일어났다.
안경 옆으로 보이는 노트북에서 빛이 나오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었던 것 같다.
“어서 와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우리는 노흥기가 가리키는 소파로 향했고.
앉기 전에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아라비안필름 신바드입니다.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신서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흥기입니다.”
잠시 후.
아까 우리를 안내해 준 여성이 차를 내오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래요. 내게 연출을 맡기고 싶다고요?”
“예. 맞습니다. 꼭 해주셨으면 합니다. 감독님.”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다정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그렇다면 나도 단호하게 나가야지.
“부탁드리러 온 입장이지만, 무작정 떼를 쓸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도 구미가 당기지 않으신다면 군말 없이 포기하고 가겠습니다.”
지금의 노흥기는 웃고 있으나 심기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는 <파노라마> 촬영 시에도, 그 외 다른 현장에서도 시간개념이 철저한 것으로 유명했다.
소중한 친구의 부탁이라 약속을 잡긴 했으나 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더 간결하고, 빠르게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며 그를 넘어오게 만들어야 했다.
“그럼 들어보죠.”
“감독님은 사후세계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뜬금없는 사후세계 타령에 노흥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후세계요?”
“예. 저희 영화는 인간이 죽어서 어디로 가고, 어떻게 되느냐. 등등 항상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왔던 것들을 구현해낼 예정입니다.”
노흥기는 웃으며 말했다.
“사후세계야 당연히 궁금하죠.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될 뿐입니다. 내가 꼭 연출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만으로 그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렇죠. 그러나 저희 영화는 감독님이 연출해주셔야 하는 이유가 많습니다. 300억이라는 큰 제작비와 1, 2편 동시 제작 등 한국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영화니까요. 당연히 경험 많은 감독을 필두로 만들어가야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그도 아무 말이 없었다.
“또 저는 감독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현장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노흥기의 눈썹이 움찔하더니 올라갔다.
“내 스타일을 알고 있다니?”
“감독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2년 전 <파노라마> 현장에 제작팀 막내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막내라도 제작팀인데 감독님 스타일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지요. 물론 저를 소개해주신 구성근 대표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긴 했습니다.”
“그 친구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구만.”
“저는 감독님뿐만이 아닌 모든 스태프가 현장을 즐기길 원합니다. 재밌어야 능률도 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는 잠시 마음이 동하는 표정이었으나 완전히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
“같이 오신 분은 혹시 무슨 롤을 맡고 있습니까?”
신서영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긴 했으나 원로감독 노흥기가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이분은 <망자와 함께> 각본을 썼고, 현재 감독의 자격으로 영화를 준비 중인 신서영 감독입니다.”
그녀가 또롱또롱한 눈으로 노흥기를 바라봤다.
“영화에 대한 경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온 이상 죽을 만큼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내 여유롭던 노흥기가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정리 좀 해보겠습니다. 그럼 지금 저한테 영화 촬영 경험이 없는 생초짜 여성 신인 감독이랑 공동연출을 하라는 말입니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예.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따뜻했던 사무실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신서영도 느꼈는지 어깨가 움츠러든 모습이다.
노흥기는 싸늘한 눈빛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가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노흥기는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는데······.
“하하하! 올해 들어 최고로 웃긴 말이었습니다. 진심인가 싶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재밌는 말이지 않습니까. 내 생에 이런 제안을 받아보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죽을 만큼 한다는 거 믿어봐도 되겠어요?”
노흥기가 신서영에게 묻자 그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믿어주세요!”
“한 가지만 더 물읍시다. 젊은 사람이 패기도 있고, 솔직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이런 썩어 문드러진 영화판엔 왜 들어왔습니까?”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으나 대답은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그거야 당연히, 영화를 좋아하니까요.”
*
노흥기는 <망자와 함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로 한 뒤 바로 신서영과 CG팀, 미술팀을 데리고 몽골과 볼리비아를 돌고 오겠다며 해외로 나갔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지옥이지만, 레퍼런스는 필요했고.
사막, 오지 등 신비로운 곳들을 직접 눈으로 봐야 구현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또 이 소식은 영화계에 퍼져 원로감독과 신예 감독의 이례적인 공동연출로 한동안 떠들썩했다.
이로써 <망자와 함께>는 한국 최초 타이틀을 하나 더 가지게 된 것이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는데 아직 임윤서를 캐스팅하지 못했다.
<망자와 함께> 캐스팅 제안은 금방 받아들였으면서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세월아 네월아 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전생에서 임윤서 소속사 NX엔터는 대표부터 시작해서 임원들의 질이 안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임윤서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나갔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도 배우한테 바로 연락할 순 없으니 소속사를 통해 제안한 것인데.
아마도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소속사에서 커트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소속사 직원과의 미팅을 잡았다.
그렇게 나간 자리에선······.
“예? 이유가 뭡니까?”
“윤서 씨가 하기 싫다는데 저희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죠.”
역시나 NX엔터 팀장이라는 직원은 미팅 시작부터 싫은 티를 팍팍 냈고.
무슨 질문에도 무작정 임윤서 본인이 하기 싫어한다는 대답만 무한 반복하며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결국, 그날의 미팅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NX엔터에서 걸어 나오며 뒤로 돌아 높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하,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선공은 그들이 먼저 날렸다.
그러니 이제부턴 정당방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