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영화란 즐거움 그 자체
<투명한 사랑>의 연극화는 지성미 이사와의 네 번째 만남에서 확정됐고, 도장까지 찍었다.
은동아트센터에서 연극사업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숙원사업이라며 그녀는 남다른 다짐을 보였다.
현재 시나리오를 연극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과 배우 캐스팅 중이라는 연락이 왔고.
영화에서 음악을 맡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 있냐길래 천상현의 연락처를 건넸다.
기획부터 제작, 모든 배역 캐스팅 후 연습까지 대략 1년의 기간을 잡고 있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밝았다.
그리고 오늘은.
“완벽하고만. 형님은 뭘 그렇게 죽는 소릴 해요?”
준공청소까지 완료한 남양주 세트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내가 원하던 곳 그 자체였다.
넓은 주차장과 완벽한 방음, 밝은 조명의 분장실, 환기시스템, 합리적인 동선으로 설계된 구조 등등.
무엇보다 현재 영화, 드라마 팀이 주로 사용하는 세트장에 비하면 현저하게 깨끗한 시설이었다.
입소문은 금방 날 것이다.
예정우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진지하게 나 이쪽으로 재능 있는 듯. 이참에 진로 한번 바꿔볼까?”
“안 돼요. 형님 세트장 관리 말고도 할 거 산더미니까.”
“세트장 관리 말고 또 뭐가 있는데?”
우리는 병원 세트까지 모두 꼼꼼히 살펴본 뒤 바깥 벤치에 앉았다.
“저기 보이시죠?”
세트장 옆으로 보이는 넓은 주차장을 가리켰다.
“주차장? 주차장이 왜?”
“저기에서 차를 굴릴 거예요.”
“뭔 소리야? 뭘 굴린다고?”
예정우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렌트하자고요. 렌트.”
촬영팀들은 사용하는 차가 많다.
대형 버스, 탑차, 발전차, 스타렉스 등등.
이것들은 모든 현장에서 필요한 필수 차량이었다.
“우리 제작팀 할 때 맨날 1톤 탑차랑 스타렉스 구한다고 고생했잖아요. 영화팀 차 더럽게 써서 안 빌려주거나 비싸게 빌려주거나.”
“그렇긴 했지. 아, 그럼 그걸 우리가 렌트해주자고?”
“예. 우선 중고 스타렉스 2대랑 1톤 탑차 3대만 사서 세트장 홍보할 때 같이 뿌립시다. 괜찮다 싶으면 더 사고요.”
주차장을 좀 오버해서 넓힌 건 이 때문이기도 했다.
매입한 차량을 보관할 곳도 필요했기에.
벤치에 앉으니 가뜩이나 큰 세트장이 더 커 보였다.
“형님. 가만 보면 영화판에선 사업할 게 정말 많은 것 같아요.”
*
류봉수는 포근한 느낌이 드는 소파에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었다.
“교수님. 잘 지내셨어요?”
“그 교수 소리 좀 이제 그만하게.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에이, 그래도 교수님은 교수님이시죠.”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상대방의 큰 덩치는 작은 편도 아닌 소파를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5월마다 찾아오는 것도 그만하고.”
류봉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5월이라서 온 거 아닌데요? 그리고 이거요. 이번에 제가 큰돈을 좀 벌었습니다.”
류봉수가 건넨 작은 쇼핑백.
겉에는 명품 브랜드명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뭔가?”
“당연히 선물이죠?”
“가져가게.”
그는 이런 단호함을 예상했다는 듯 서둘러 일어났다.
“아이고. 교수님도 명품 한번 차 보셔야죠. 그냥 제자 마음이다. 생각하고 받으세요.”
그러나 상대방은 만만치 않았다.
“나한테 선물할 생각 말고, 한 푼 두 푼 모아서 결혼이나 하게. 도대체 성미랑은 식을 언제 올릴 건가?”
“에에? 교수님!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흘러가요? 성미랑 저랑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학교 다닐 때부터 그러시더니!”
“학교 다닐 때부터 눈에 훤히 보이더니만. 앞에선 티격태격하면서도 맨날 붙어 다니는 거 다 알고 있었네. 더 늦기 전에 결혼해.”
순간 류봉수에게 포근하던 그곳은 명절의 고향 집으로 변했다.
“에이! 진짜 아니라니-!”
똑똑-.
다행히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덕분에 둘은 언쟁을 멈출 수 있었다.
“큼, 들어오게.”
벌컥-.
“대표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네. 아라비안필름 대표님이시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직원의 목소리에 류봉수가 대답했다.
“응? 신바드 대표님이요?!”
*
세트장 오픈과 장비 차 렌트 소식을 팸플릿에 잘 담아 방송국, 제작사 등을 돌며 뿌렸다.
또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이트에 올리자 오픈 3일 전부터 사무실로 근근이 연락이 왔다.
스타렉스 1대와 1톤 탑차 2대는 벌써 새로 들어가는 영화팀의 예약을 받았을 정도이니 렌트 사업도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이후의 일들은 이제 예정우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지금 한 건물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영화사 새단]
오늘은 감독 출신인 영화사 새단 대표 구성근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었는데.
‘오긴 왔는데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려나.’
과연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밑져야 본전이다.
무작정 부딪쳐보고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라는 직원의 말에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구성근의 집무실에선 갑자기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금방 물어봤는지 다시 온 직원은 나를 큰소리가 나던 곳으로 안내했다.
손님이 있는 것 같던데, 그냥 들어가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류 소장님?”
“하하! 신 대표님! 이게 정말 무슨 인연입니까!”
그는 류봉수였다.
류봉수는 자리에 앉아 내게 간략한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구성근은 류봉수와 지성미의 모교 영화과에서 교수직을 맡은 적이 있었고.
그때의 가르침으로 지금까지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 대표님. 구성근 교수님이 대표님과도 인연이 깊은 거 아십니까?”
“인연이요?”
“예. 제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투명한 사랑> 단편 심사를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분명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구성근 교수님도 심사위원 직에 계셨습니다.”
그 이야기에 나보다는 구성근이 더 깜짝 놀랐다.
“아, 이분이 그때 그?”
“예. 맞습니다! 그때 성미랑 교수님이 그렇게도 반대하신-!”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류봉수는 구성근이 헛기침을 한번 하자 정신을 차렸다.
“하셨다가 생각을 바꾸셨죠. 하하하.”
류봉수를 잠시 못마땅하게 보던 구성근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번 <투명한 사랑> 장편도 아라비안필름에서 제작한 겁니까?”
“예. 맞습니다.”
“와,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극장에서 전율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이던지.”
“감사합니다. 사실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 얼떨떨합니다.”
그 후로 몇 마디를 더 나누었는데 류봉수가 대화의 본질을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롯이 노흥기 감독 때문이었다.
노흥기는 평생을 단 하나의 영화사와만 작업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곳이 영화사 새단이다.
또 대표인 구성근은 노 감독과 절친한 친구로 둘은 비즈니스를 뛰어넘는 관계였다.
“노흥기 감독님을 섭외하고 싶습니다.”
난데없는 이름에 둘은 놀랐다.
“예?”
“노 감독님이요?!”
그런데 내가 왜 노흥기 감독에게 다이렉트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느냐.
전생에서도 노 감독을 섭외하기 위한 시도는 여러 제작사에서 제법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정중히 거절했고.
나중에 노흥기 감독이 완전한 은퇴를 선언하며 했던 말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나에게 이 말은 이렇게 다가왔다.
노흥기에게 영화란 즐거움 그 자체였고, 구성근은 그가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줬던 거였구나.
그러니 이런 노흥기에게 고작 한 작품 같이했던 내 말이 먹힐 리 없었고.
무엇보다 제작팀 막내였던 나를 기억하는지도 확실치 않으니 그를 확실하게 설득할 수 있는 구성근을 노린 것이다.
운이 좋게 류봉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망자와 함께>라는 한국에서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영화를 준비 중입니다. 어려운 영화가 될 테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을 거예요. 노 감독님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
“동물과 괴수들은 어떻게 구현할 겁니까?”
‘필름코팅’ 직원들의 본격적인 파견근무가 시작됐다.
파견 온 두 명은 둘 다 팀장급이었고.
그중 강 팀장이 대답했다.
“크리처(CG 작업에서 사람이 아닌 생물)는 털, 피부 표현 등에 중점을 두고, 본사에서 작업 중입니다. 아직 이미지가 확정되지 않은 것들은 감독님과 계속 조율하고 있고요.”
이번엔 정 PD에게 물었다.
“로케이션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다른 것들은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데 한 가지 장소에 좀 문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움직이는 숲’을 로케이션에서 촬영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움직이는 숲’은 저승에 있는 숲으로 말 그대로 나무와 풀들이 움직여야 한다.
“그린 천 세팅할만한 공간이 있는 숲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멀쩡한 주변 나무들을 밀어야 합니다.”
어떤 장소라도 영화를 찍기 위해선 꼭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어느 정신 나간 행정구역에서 나무를 밀어내도 좋다는 허가를 내주겠는가.
허가가 아니더라도 영화를 위해 자연을 훼손할 수는 없었다.
“우선 제작팀 애들이 주변 경관을 훼손하지 않아도 될 만한 공간이 있는 곳을 계속 찾고 있지만, 제가 봤을 때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CG 작업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한 겁니까?”
‘필름코팅’의 강 팀장은 대충 계산해보더니 대답했다.
“저희가 세팅해서 쓸 공간이 100평은 필요합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영화팀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붙잡고 있어도 해결 나지 않을 이런 안건까지 질질 끌고 가는 건 소모적인 일이다.
오늘도 제작팀은 이 공간을 찾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온갖 산을 오르고 있을 것이기에.
“그럼 세트에서 촬영하죠.”
“예? 어디서요??”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까짓것 산 한 번 만들어보죠. 뭐.”
다행히 완공된 남양주 세트장은 병원 세트 말고도 120평의 세트가 2곳이었다.
정 PD에게 산에 나가 있는 제작팀들은 불러들이고.
세트장 안에 신서영이 원하는 느낌으로 숲을 세팅하려면 얼마의 흙과 나무가 있어야 하는지와 그에 들어가는 예산을 짜오라고 했다.
제작비는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고.
예산 절감은 다른 곳에서 하면 된다.
똑똑-.
“예.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허훈.
“대표님.”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제작비 40억으로 책정되었다.
아라비안필름에서 전액 투자.
이번에도 YJ E&M에서 배급을 맡아 수수료를 줘야 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극장에 걸려면 합당한 금액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맞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예. 감독님. 무슨 일 있으세요?”
“시나리오 수정이 완료돼서요. 가져다드리려고요.”
그에게서 시나리오를 받아들고, 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배우는 생각해보셨어요?”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배우가 아주 중요했다.
주인공의 일생을 따라가는 영화라 원탑 체제이기도 하고, 뮤지컬 영화였기에 연기는 물론 노래와 춤까지 다재다능한 배우가 필요했다.
“그게 저는 떠오르는 게 이주리 배우가 전부라 대표님 생각도 좀 여쭤보려고요.”
이주리.
20대 배우로 우리 영화와 매칭해 봤을 때 이미지가 나쁘진 않았으나 뭔가 부족했다.
그때 아까 회의에서 정 PD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저승 신 역에 임윤서 배우 연락 왔습니다.
임윤서는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여배우로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배우가 최고의 순간과 나락까지를 전부 연기해야 하는데.
순수한 어린아이 같다가도 어쩔 땐 도도함이 공존하는 그녀야말로 주인공으로 딱이었다.
“감독님. 임윤서 배우는 어떠세요?”
“어? 임윤서 배우요? 저는 너무 좋은데요? 근데 섭외가 될까요? 바쁘신 거로 알고 있는데.”
많은 물음을 던진 그에게 웃으며 답했다.
“그거야 지금부터 부딪쳐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