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48화 (48/140)

#48화. 전혀 다른 풍경

“됐다아!! 됐어어! 선배! 일어나 봐요! 진짜 한보배가 상 탔다니까요!!”

현지 영화제 방송을 생중계로 보고 있던 장혜리는 기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김 선배도.

업무 과다로 제정신이 아니던 다른 선배와 동기들도 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야!”

“신인상이랑 작곡상까지 둘 다 받았다고요!”

모두는 잠시 멍한 얼굴로 상황 파악을 하다 장혜리가 요 며칠 계속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투명한 사랑>팀이 아시안 필름 어워드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인상과 작곡상을 수상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진짜야?! 진짜로 받았다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야! 다들 뭐해! 빨리 기사 올려!”

모두가 정신없던 그때 장혜리는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준비해 둔 기사 중 2관왕을 했을 때의 버전을 올린 뒤였으니까.

노트북 화면 속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는 그 기사에는 단독 타이틀이 붙어 있었고.

밑으로는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투명한 사랑’ 드디어 일냈다. 한국인 최초로 수상』

『홍콩 현지의 뜨거운 반응. 이 영화는 미쳤다!』

『평론가들의 극찬. ‘투명한 사랑’은 연출, 연기, 음악 조화의 끝』

『배우 한보배의 다름을 인정하는 진심 어린 고백』

『영화 ‘투명한 사랑’ 제작자 신바드 대표. 영화계 열정페이는 이제 그만』

*

우리는 영화제가 끝난 뒤 간단한 저녁을 먹으며 2관왕을 축하했고, 정식 축하 파티는 이틀 뒤 한국에서 관계자들과 다 같이 하기로 했다.

다음날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 모두는 적당한 숙취와 부족한 잠으로 곯아떨어졌고.

“보배 씨. 도착했어요. 일어나요.”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자고 있길래 그런 그들을 깨우는 일은 내 몫이었다.

“으음. 네에.”

비행기에서 내리자 홍콩과는 다른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우와! 춥다!”

“외투 잘 여며요. 감기 걸리지 않게.”

“넵!”

그렇게 수화물까지 찾은 우리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근데 이 실장님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시지?”

홍콩 출발 전 남상훈은 우리를 데려다준 이 실장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그가 착륙 후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걱정 중이었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가신 거 아니에요?”

스타일리스트의 물음에도 남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문자라도 보내실 분인데.”

“우선 나가보죠.”

내가 앞장서자 출구의 자동문은 스윽 열렸다.

그런데······.

파바바바밧-!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린데.

“나왔다!”

“한보배 씨! 소감 한 말씀 부탁합니다!”

“홍콩은 어떠셨습니까?!”

“동생에게 한마디 하시죠!”

“보배 씨! 여기 좀! 여기 좀 봐주세요!”

출국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팬들도 와있는지 곳곳에선 환영의 플래카드까지 보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진풍경이었다.

덕분에 한보배를 제외한 모두는 순식간에 경계 태세를 갖추고, 그녀를 둘러쌌다.

“아! 실장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 거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요? 그냥 뚫고 가요?”

“차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남상훈을 비롯한 모두는 당황해 정신을 못 차렸다.

“우선 나가죠. 택시라도 탑시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모두는 그렇게 인파를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리는 얼마 못 가 반가운 두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대표님!”

바로 밝은 얼굴의 장혜리 기자와.

“어휴! 죄송합니다! 기자들이 알아보는 바람에 자꾸 붙잡아서 전화도 못 받았어요! 차는 이 앞에 세워뒀으니 바로 나가시죠!”

남상훈이 그렇게도 찾던 이 실장이었다.

상봉의 기쁨도 잠시.

모두 의기투합하여 이 역경을 헤쳐나가려는데.

“잠깐만요.”

한보배가 멈춰 섰다.

“기자님도 같이 가시죠. 저 지금 바로 회사로 갈 건데 주소 찍어드릴게요.”

그건 장혜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저, 저요? 화분 엔터 주소 알고 있긴 한데······. 왜요?”

가뜩이나 큰 눈을 댕글 거리는 장혜리에게 한보배가 답했다.

“출국 기사 써주셨으니까 귀국 기사도 써주셔야죠. 기자님하고만 인터뷰할게요.”

“저, 정마료?!”

장혜리는 너무 놀랐는지 혀가 꼬여버리고 말았다.

*

이튿날.

홍대의 한 고깃집.

“와, 대표님! 이 인파를 다 뚫고 나오신 거예요?”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보던 나경은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서 고기를 흡입하고 있던 한보배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니깐요. 대표님이랑 천 쌤, 상훈 오빠, 언니까지 갑자기 저를 둘러싸는데 영화의 한 장면이었어요.”

“와, 다들 고생 진짜 많으셨네.”

오늘은 <투명한 사랑>의 2관왕을 축하하려 모인 자리였다.

아라비안필름 식구들과 현장 스태프, 도움 주신 분들까지 모조리 초대해 약 150명의 시끌벅적함이 고깃집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 감독님. 수상하고 난 뒤에 연락 많이 오지 않아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천상현에게 물으니 그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 받은 지 이제 고작 이틀 됐는데 벌써 의뢰 연락이 꽤 많이 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다 대표님 덕분이죠.”

“에이, 아닙니다. 근데 이제 많이 바빠지시겠네요. 우주랑 작업은 계속하시는 겁니까?”

그가 불판 위에 놓인 고기를 뒤집으며 답했다.

“그러려고요. 우주한테 학업도 중요하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시 와서 본격적으로 일해보는 건 어떻겠냐. 하고 물었는데,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예. 가끔은 그 고집을 제가 못 당한다니까요.”

다행히도 이들의 인연은 지속될 예정인가 보다.

이번엔 옆에서 소주를 들이켜던 허훈에게 물었다.

“감독님은 <망자와 함께>랑 차기작 집필 둘 다 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응? 전혀요. 서영 감독님이 엄청 꼼꼼하시더라고요. 콘티 회의할 때 아이디어 팍팍 제안해주시고, 아닌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해주시고, 저는 편해요.”

일하기 편한 감독은 자기 주관이 뚜렷한 감독이다.

물론 절대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을 해달라고 떼쓰는 그런 고집쟁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흔들리지 않을 사람.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다.

감독도 사람인지라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았는데, 이런 타입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피곤하다.

주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감독 의견에 스태프들은 불만이 생길 것이고.

그에 추가되는 비용도 따르기 마련이다.

허훈이 말하는 걸 보니 신서영은 일하기 편한 쪽인 것 같다.

“또 고민을 스스로 많이 하시더라고요.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어떻게 해야 더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요.”

“좋은 현상이네요.”

“네. 그리고 세트 촬영이 대부분이라 다행이에요.”

로케이션 촬영에서는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변수들에 대처해야 하지만.

<망자와 함께>는 80%가 세트 촬영이다.

계획만 잘해놓는다면 생길 변수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우선 신서영은 한시름 놔도 될 것 같고.

허훈에게 진짜로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저기, 감독님.”

“예?”

“제가 절대 쪼는 건 아니고요.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차기작은 장르가 어떻게 됩니까?”

어차피 <처절한 인생>이겠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장르요? 그게······. 사실 지금 2개를 동시에 쓰고 있거든요.”

“예?”

천재들은 다 이러는 걸까.

힘들진 않나 걱정했던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작품이 2개라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처절한 인생>일 테니 다행이다.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내일 시놉으로 보여드릴게요.”

와, <처절한 인생>의 시놉시스를 보는 날이 드디어 오다니!

“오, 그거 좋죠.”

밀려드는 기쁨에 그와 건배라도 하려는 그때.

“대표님.”

류봉수였다.

“아! 소장님.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예. 덕분에 잘 먹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제가 좀 소개해드릴 분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 괜찮으십니까?”

“소개해주실 분이요?”

“예. 분명 대표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더는 입이 근질거려 못 살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그를 보니 좋은 일이 분명하다.

테이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여자를 내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오래된 친구 지성미라고 합니다. 지금 은동 아트센터 총괄 이사직을 맡고 있죠.”

이러다 류봉수의 주변 지인들은 다 소개받는 거 아닌가, 짧은 생각을 하다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입니다.”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근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조금 무서워지던 참이다.

“자자, 인사 나눴으면 잠시 앉으시죠. 오늘은 축하 자리니만큼 시간 많이 뺏지 않겠습니다.”

류봉수의 제안으로 우리 셋은 테이블에 앉았다.

말을 먼저 꺼낸 건 지성미.

“다른 게 아니고, 저희 아트센터에서 현재 대형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스타일의 연극을 기획해서 제작해보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듣자 뭔가 느낌이 팍하고 왔다.

“예? 그럼······. 혹시?”

딱 떨어지는 짧은 단발머리를 한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투명한 사랑> 연극화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다음 날부터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우선 <망자와 함께>의 구체적인 촬영 계획을 짜는 회의에 참석했다.

“1, 2편 동시 제작이다 보니 치밀하게 계산한 뒤 촬영 들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예산을 줄이고자 한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어요.”

발언자는 정 PD였는데, <투명한 사랑> 이후 아예 우리 회사로 입사해 아라비안필름 소속 첫 번째 PD가 되었다.

“콘티는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내 질문에 신서영이 답했다.

“60% 정도 완료됐습니다.”

“그럼 조감독님 이제 스케줄 가안 한번 짜보죠. 제작팀에서는 세트 이외 로케 장소 섭외 시작하시고요.”

조감독과 정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양주 세트장은 6월 말이면 준공할 것 같습니다. 크랭크 인이 내년 2월 초면, 세트 촬영은 4월부터일 테니 큰 문제 없을 것 같아요.”

<망자와 함께> 세트 촬영은 현재 짓고 있는 남양주 세트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지금은 3월 말이었다.

평균적인 상업 장편영화의 프리 프로덕션이 3~5개월 정도인데.

<망자와 함께>는 촬영만 10개월을 생각하고 있었다.

1, 2편 동시 촬영이라 어쩔 수 없는 여건이었고, 그래서 1년의 준비기간을 잡았다.

“고덕현 감독님은 연락 오셨고, 다른 스탭들 연락은 다 진행됐습니까?”

우리는 전작에서 손발을 맞췄던 스태프들에게 연락해 <망자와 함께>를 같이 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예. 대부분 하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흔쾌히 와주기로 한 모양이다.

프리랜서들의 세계인 영화판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전작에서 진행했던 표준근로계약 덕분에 우리 현장이 편하고, 합리적이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그렇군요. 배우들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조감독이 대답했다.

“도건우 씨 필두로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 부분도 되도록 빨리 진행해보죠. 아, 그리고 지옥별 대왕들 말입니다.”

<망자와 함께>에는 6명의 저승 신들이 출연한다.

“이 역할에 임팩트를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카메오 섭외해보는 거 어떻겠습니까? 유명 배우들로만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캐스팅이 수월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미지 맞게 후보부터 정해봅시다. 밑져야 본전이죠.”

이 아이디어는 전생에서도 먹혔으니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후로도 1시간을 더 진행한 긴 회의가 끝나고.

“저, 대표님.”

나를 조심히 부르는 건 허훈이었다.

“어제 말씀드린 지금 쓰고 있는 두 작품의 시놉시스입니다.”

그가 건넨 두 묶음의 A4용지를 살폈다.

하나는.

[처절한 인생]

기다리던 시나리오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다음 하나는.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

뭐지, 이 고차원적인 제목은?

뒷장을 넘겨 쓱 훑어보니 전생에선 본 적 없는 제목과 내용이었다.

허훈이 전생과는 또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일단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에 없던 시나리오를 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인생과 일생이라······.

같은 듯 전혀 다른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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