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47화 (47/140)

#47화. 꼭 하고 싶은 수상소감

“한다! 다들 빨리 와요!”

저녁을 먹고 천상현의 방에 있던 우리는 스타일리스트의 외침에 TV 앞으로 모였다.

각자의 손에는 맥주와 들어오면서 사 온 길거리 음식들이 들려있었다.

노트북으로 연결해 둔 TV 속에는 뚱땅거리는 ‘아는 동생’의 오프닝 음악이 시작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떨리냐.”

남상훈은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긴장 중이었다.

뭘 또 저렇게까지 긴장을 하나.

완탕면을 먹으며 했던 내 말에도 그의 초조함은 가시지 않는가 보다.

다른 편과 다름없는 무난한 초반부가 지나가고.

-보배는 오늘 준비해온 게 아주 많다고 들었는데?

한 고정출연자의 질문으로 그녀의 개인기가 시작되었다.

-응! 내가 오늘 보여줄 게 많으니까 다들 기대해!

-오, 이렇게 자신만만한 전학생은 처음이다! 그럼 뭐부터 보여줄 건데?

화면 속 그녀는 서 있던 교탁을 벗어나 앞으로 나오더니.

-우선 나무늘보를 보여줄게!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와! 나무늘보 신선하다! 집에서 연습한 거야?

-나무늘보가 그, 뭐고?

-그 있잖아! 엄청 느린 동물이라 나무에 붙어서 종일 몇 센티도 안 움직이는 얘!

-아, 그런 신기한 동물이 있나? 그럼 함 보자!

출연자들이 진짜 모르지는 않을 텐데, 능숙하게 분위기를 띄워주자 화면 속 한보배는 자신감이 붙은 안색이었다.

“이렇게 보려니까 창피하네······.”

현실에서의 한보배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럼 해볼게. 짧으니까 잘 봐!

그녀는 교탁에 서 있던 승현과 이서아에게 잠시 나와달라고 부탁한 뒤.

교탁 위로 상체를 척 올려 엎드렸다.

한보배는 혹시라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저, 저게 나무에 붙은 늘보를 표현한 거거든요?”

우리는 그녀에게 대답할 틈도 없이 TV 속 나무늘보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보배 나무늘보는 교탁에 붙은 채 슬로우를 걸어놓은 것처럼 온 얼굴 근육을 천천히 늘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아아아아녀어어어엉.

“방금 안녕이라고 한 거거든요?!”

“예예. 알겠어요. 진정해요. 보배 씨.”

많이 창피한가 보다.

목까지 빨개졌다.

그 뒤로도 그녀의 개인기 메들리는 끝나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봤던 초록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헤드스핀을 돌았으며.

대선배들의 성대모사는 물론.

대사를 잘 외우는 그녀가 제작진에게 미리 준비해달라고 한 문장들을 금세 외우는 스마트한 면까지.

“회사에선 뭐래요?”

남상훈에게 묻자 그는 이미 해탈한 듯 보였다.

“말로 설명하는 거랑 직접 보는 건 또 다르잖아요. 괜찮다고 하시죠. 근데 PD님이 너무 심한 건 편집해주신다고 하셔놓고, 하나도 안 하셨네요. 하하.”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는 듯 천상현이 그를 다독였다.

“그만큼 보배 씨 분량이 엄청난 거 아니에요?”

“그게 독이 될까 봐서요. 보배는 열심히 한다고 한 건데, 비호감으로 찍히면 어쩌나 싶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잖아요. 방송 끝나면 반응부터 좀 보죠.”

철저히 한보배 위주로 편집된 방송이 끝나자 우리는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어? 뭐야? 반응 엄청 좋은데요?”

의외라는 스타일리스트의 말 뒤로 남상훈의 홀가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네!”

『한보배 ‘아는 동생’으로 예능 신고식 제대로 치러』

『반전 매력의 한보배, 헤드스핀이 제일 쉬웠어요』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여배우는 없었다. 신인 여배우 한보배에게 쏟아지는 관심』

『원로배우 선구. 이토록 사랑스러운 성대모사는 처음 봐』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한보배의 이야기로 열기가 뜨거웠다.

[오늘 자 아는 동생 보신 분? 저 보다가 배 찢어질 뻔 했네요ㅋㅋㅋ]

[저요! 저! 오늘부로 한보배 팬 할랍니다!]

[저렇게 귀여운 나무늘보라면 키우고 싶네요.]

[헤드스핀 하는 여배우 처음 봤음.]

[아니! 왜 아직도 정식 팬클럽이 없는 거죠! 제가 만들어보겠습니다!]

[오, 가입 줄 서 봅니다.]

[여러분 다들 그거 아세요? 기사 찾아보니까 지금 한보배 홍콩 영화제 신인상 후보랍니다.]

[뭐요?! 이런 경사가! 이거야말로 진정한 우리나라의 보배 아닙니꽈?!]

“와. 신기하네. 어떻게 아셨어요, 대표님?!”

대중의 반응을 예측하는 건 원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생으로 살아봤던 나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지.

“저도 때려 맞힌 거죠. 뭐.”

“아휴! 그렇게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보배가 팔짱을 낀 채 남상훈에게 말했다.

“오빠! 제가 우리 대표님 장난 아니라고 했죠?!”

“그러게. 보배가 대표님 이야기를 얼마나 하는지 귀에 딱지 앉기 직전입니다. 하하.”

도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면서 다니는 건지.

“어쨌든 이번 홍보는 나름 잘된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이제 각자 방으로 가서 쉬시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나는 맥주를 좀 더 사 오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대표님 어디 가세요?”

편한 복장의 모자를 푹 눌러 쓴 한보배가 걸어왔다.

“아, 예. 편의점에요. 보배 씨는요?”

“저는 배가 너무 고파서 탄산수 좀 사 오려구요.”

“탄산수요?”

“네. 탄산수 먹으면 배가 부른 느낌이 들거든요!”

“관리 힘들진 않아요?”

“힘들게 뭐 있나요. 이렇게도 사랑받는 직업인데. 그래서 대표님께는 진짜 감사해요. 다훈이도 그렇고, 우주도 그렇고. 요즘 많이 밝아졌어요.”

우리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고.

내가 1층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됐다.

“사실 우주가 완전히 실명한 지는 6년 정도 됐거든요.”

이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라면 애초에 뭔가를 이미지로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때 저희 아빠가 알콜 중독이었다고 했잖아요.”

“예. 그래서 나오신 거라고.”

“네네. 그때는 그런 아빠를 피하는 데만 급급해서 우주가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디에 자꾸 부딪히고, 뭔가를 볼 때 눈을 찌푸렸었는데······.”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우리는 근처 편의점으로 홍콩의 밤공기를 맡으며 걸었다.

“우주도 어린 나이라 자기가 아픈 줄 몰랐던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는 갑자기 앞이 아예 안 보인다길래 병원에 데려갔더니 망막색소변성증이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도 길고, 어렵죠? 희귀병이래요. 보통은 유전이라고 하는데 아닌 경우가 있기도 하고. 어쨌든 치료하기엔 너무 늦었던 거죠.”

“우주도, 보배 씨도 많이 힘들었겠네요.”

“말도 못 했죠. 모든 일이 다 제 탓인 것 같더라구요.”

그녀는 옛 생각에 잠시 목이 메는 듯했다.

“큼! 근데 대표님한테 이 이야기를 왜 해드리는 줄 아세요?”

“왜 해주는 건데요?”

“우주가 시력을 잃기 전에는 그림 그리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뭔가를 유심히 관찰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바깥 풍경이든 지나가는 사람이든 심지어는 책에 나와 있는 사진이라도 매일매일 그리더라구요.”

그렇게도 세상 보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가 눈을 잃어버린 것이다.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당연히 침울한 상태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고 그랬죠.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이번엔 음악을 매일 듣더라구요. 또 한두 달 뒤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음계를 정확히 짚어내는 거 아니겠어요?”

집들이에서 했던 이야기가 이때구나.

“그런데 신기한 건 그때의 우주도 지금처럼 밝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다른데요?”

“지금은 항상 웃어요. 저랑 다훈이를 보면서.”

아이가 가진 마음의 눈은 다행히도 따뜻해졌나 보다.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편의점엔 금세 도착했다.

“그래서 대표님한테 너무 감사해요. 우리 우주가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셔서요.”

“그게 뭐 제가 한 건가요. 다 우주가 잘해서 그런 거지.”

“대표님도 참! 이제 제 앞에서는 허세 좀 부리셔도 돼요!”

그러더니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휴! 후련하다! 저 내일 상 타면 꼭 하고 싶은 수상소감이 있어요. 이것 때문에 사실 긴장을 더 많이 했거든요? 근데 대표님이랑 이야기하니까 이제 긴장이 하나도 안 돼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우리는 편의점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오늘따라 청량하게 들린다.

“아, 그리고 보배 씨.”

“예?”

들어가려다 말고 내가 부르는 소리에 반쯤 몸을 돌린 그녀에게 말했다.

“자책하지 말아요. 보배 씨 때문이 아니니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아내던 눈물을 결국 흘리고 말았다.

*

“혜리야? 너 진짜 그 기사 써놓고 기다리는 거야?”

“당연한 말씀을!”

장혜리는 결전의 오늘을 맞아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마지막 오타 검수는 물론 사진 보정까지 깔끔하게 끝마쳐 기사는 이제 자신이 클릭만 하면 올라간다.

당연히 단독이란 타이틀을 붙인 기사의 제목부터 내용까지는 <투명한 사랑> 팀이 상을 탄다는 전제하에 작성했고.

혹시 몰라 신인상만 탄 경우, 작곡상만 탄 경우, 둘 다 탄 경우로 버전도 세 가지였다.

“너 근데 운 좀 탔더라?”

“운이 아니라 저의 판단력이죠!”

장혜리가 엊그제 올린 <투명한 사랑> 팀의 출국 소식 기사와 한보배의 공항 패션 기사는 아주 저조한 조회 수를 기록하고, 묻히는 듯했다.

김 선배가 그 건으로 하루 내내 놀렸었는데 그날 저녁 방송된 ‘아는 동생’에서 한보배가 대활약하는 바람에 그 여파로 그녀의 기사까지 조회 수가 폭발했다.

“뭐, 그건 인정한다만, 영화제는 안 될걸? 네가 너무 기대하고 있는 거 같아서 실망할까 봐 그러는 거야.”

김 선배가 매일 말은 얄밉게 해도 또 이럴 때는 은근 챙겨준다.

“괜찮습니다. 저는 믿어요!”

김 선배는 그녀를 도저히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하늘이 감동할 정성이다. 하늘이.”

저 멀리 김 선배가 멀어지고.

시간을 확인하니 영화제 시상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다 못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으! 떨린다!”

*

“언니, 근데 오늘 눈이 좀 부은 거 같은데? 어제 울었어요?”

한보배에게 메이크업을 해주던 스타일리스트가 묻자 그녀는.

“응? 아, 아니!”

누가 봐도 티가 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요? 뭐, 그렇게 많이 부은 건 아니라서 메이크업으로 커버해볼게요.”

다행히 사람들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한보배가 메이크업과 드레스를 갈아입는 동안 천상현과 나도 나앤케이 표 맞춤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저번 부산국제영화제의 하이힐 사건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도 레드카펫은 같이 밟기로 했다.

“자, 이번에는 신발 잘 신고 있어요. 보배 씨.”

“넵!”

우리 셋은 심기일전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었고.

그래서인지 레드카펫은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포토존에 잠시 서는 건 기자들의 플래시가 조금은 익숙해진 한보배만 섰고.

그녀를 기다리던 나도 얼른 그 모습을 몇 장 찍어 양상철에게 보냈다.

답장은 금방 도착했는데.

[우리 보배. 너무 예쁘네요! 신 대표! 상 꼭 타길 기원합니다! 아람이도 옆에서 기도하고 있어요!]

지구 반대편에서의 응원에 긴장이 한결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보배의 포토존 촬영이 끝나고, 안내에 따라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보다 큰 국제영화제 규모에 조금 놀랐다.

“와, 멋있다! 꼭 무슨 오페라 극장 같아요!”

그녀의 말만큼 그곳은 압도적으로 웅장한 홀이었다.

지정석인 자리를 찾아 앉자 천상현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보배 씨. 반 갈라서 나눠 먹읍시다.”

그것은 한국에서부터 고이 모셔 온 청심환이었다.

한보배가 나를 슬쩍 보길래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저기 올라갈 일도 없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천상현에게서 청심환을 받아들었고.

둘은 그것을 입에 넣어 꼭꼭 씹은 뒤 꿀꺽 넘겼다.

그 모습은 언뜻 전쟁을 앞둔 군인의 모습처럼 비장하게 보였다.

곧이어 기다리던 시상식이 시작되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축제를 즐겼다.

그리고 잠시 후.

우아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홍콩의 한 여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며 영어로 말을 이었다.

“신인상에는 <투명한 사랑>의 한보배. 축하드립니다.”

스크린에는 한보배가 놀라는 모습.

천상현과 내가 그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습.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대까지 걸어 나가는 모습까지.

모든 일이 순식간이었고.

어느새 그녀는 몇백 명의 관중 앞에 서 있었다.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네받은 그녀가 설치된 스탠딩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 우선 진짜로 받을 줄 몰랐다는 식상한 말이 저절로 나오네요. 제가 이 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게 된 거로 아는데, 애국심이 샘솟는 밤입니다.

이어서 저는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은데요. 먼저 저를 줄곧 이끌어주신 신바드 대표님. 존경하는 양상철 대표님-.”

그녀의 개인기는 이곳에서도 발휘되었다.

어떻게 다 외웠을까 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끝도 없이 나열했다.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사랑하는 동생 다훈이와 우주에게 이 상을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상기됐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해졌고.

다음 말이 이어졌을 땐 어젯밤 홍콩의 야경과 잘 어울리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꼭 하고 싶은 수상소감이 있어요.

“<투명한 사랑>에서 저는 청각장애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제 둘째 동생 우주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입니다. 이 영화로 인해 많은 분들이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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