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날의 사건은 승현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됐다.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억지로 한 인사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으나 놈은 이제부터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현장에서 그의 본모습을 본 스태프들이 몇십 명은 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과장은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그날 방송국을 나서기 전.
로비 소파에서 물을 잔뜩 머금은 빨래처럼 잠시 쉬고 있던 이 과장에게 명함을 건넸고.
-영화사 취직 생각 없어요?
-예?
-일 잘할 것 같은데, 생각 있으면 연락 줘요.
어리둥절하던 그의 전화가 오기까지는 딱 이틀이 걸렸다.
이 과장이 전생과 같이 아라비안필름에 정식 출근하게 된 것이다.
대신 그에게 전생에는 없던 사수가 생겼다.
나경은 자신의 밑으로 누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는지 이 과장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느라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표님 제가 이번엔 진짜 심혈을 기울였는데 뭐가 제일 괜찮으세요?”
오랜만에 찾은 나앤케이 의상실에선 나은 대표가 직접 나와 한보배의 드레스 피팅을 주도 중이었다.
“저는 아까 그 보라색 드레스가 제일 나은 거 같은데요?”
나은이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어머! 대표님 진짜 센스 어쩜 좋아. 저도 이게 딱 보배 씨한테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홍콩은 조금 선선한 날씨일 테니 소재 면에서도 이게 가장 어울릴 거예요.”
내가 가리킨 연한 보랏빛 드레스는.
약간 깊은 듯한 V넥으로 파여 있었고, 아래쪽엔 트임이 있었지만.
하늘거리는 소재라 선정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하는 한보배의 어깨와 쇄골, 다리 라인 등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노출이었다.
드레스 전체에 걸쳐 보이는 수백 개의 반짝이는 비즈들은 꽃과 나무를 형상화하며 붙어 있어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저도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한보배의 말에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드레스 옆에 같이 매치해뒀던 클러치와 구두를 손에 들었다.
“여기엔 드레스보다 조금 진한 색감이지만, 반짝이는 클러치가 어울릴 것 같아요. 드레스 사이로 살짝 보일 힐은 누드 톤의 앞이 트인 샌들 형식이 좋을 것 같고요. 어떠세요?”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우리는 그녀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아주 좋습니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한보배가 드레스 선정으로 많이 고민하길래 이번에도 골라주게 되었다.
양상철이 아직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아 심적으로 여간 불안한 게 아닌가 보다.
그린 애플은 전생처럼 어느 유명 가수의 투어 콘서트를 같이 다니며 오프닝 무대에 서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빡센 일정이었지만, 아무도 이루지 못한 꿈에 도전하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홍콩 출장은 2주 뒤 2박 3일 일정으로 한보배와 그녀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또 천상현과 나까지 이렇게 5명이 갈 예정이다.
영화제 측에선 비행기표와 숙박 정보 등을 전달하며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투명한 사랑>이 작곡상 후보에도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을 천상현에게 전했을 때 그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다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아쉽게도 음악 작곡의 큰 부분을 차지한 한우주는 개학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아, 참고로 허훈은 <망자와 함께> 프리와 차기작 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 눈물을 머금고 나은 대표의 두 번째 맞춤 정장을 포기했다.
*
“이거 봐. 이거! 내 이럴 줄 알았어! 선배!!”
“뭔데 그래.”
김 선배는 장혜리가 요즘 호들갑 떠는 일이 잦아 피곤한 상태였다.
“이번 아시안 필름 어워드에서 <투명한 사랑>이 두 부문이나 후보에 올랐대요!”
“아 그래? 근데 뭘 또 그렇게 난리야. 우리나라 영화가 후보에 오른 적이 얼마나 많은데.”
“신인상이랑 작곡상인데요?”
“뭐?”
김 선배는 그제야 의자에 얹어놨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장혜리가 손가락질하고 있던 모니터 안에는 한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를 심각한 표정으로 쭉 읽어보던 김 선배는 다시 의자 위에 몸을 얹었다.
“YJ E&M에서 홍보차 올린 기사잖아. 설마 타겠냐. 한 번도 한국에서는 나온 적이 없는 상인데.”
“그거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죠!”
“예예. 첫 단독 올리신다면서요. 아주 기사까지 써 놓고 기다리시면 되겠네요.”
장혜리는 이죽거리는 김 선배 머리에 꿀밤이라도 딱콩! 때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꾸욱 참았다.
프로는 역시 일로써 승부를 봐야 하는 것.
“내가 진짜 이걸로 그놈의 단독 올리고 만다!”
한편.
같은 시각 강남의 한 술집.
류봉수와 지성미는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으흐흐. 성미야! 오늘 내가 쏜다!”
지성미는 죽마고우의 꼴사나운 모습이 창피했다.
“돈도 없단 놈이 왜 이렇게 큰 소리야? 너 또 그래놓고 나한테 사라고 할 거잖아.”
류봉수는 그녀에게 쭉 편 검지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니. 오늘은 진짜 풀코스로 쏜다. 이런 날 흔치 않을 테니 양껏 먹으렴.”
지성미는 그가 무식하게 들어 올린 술잔에 얼떨떨하게 건배하며 물었다.
“뭐야? 진짜 좋은 소식 있는 거야?”
“당연하지!”
“무슨 소식인데?”
류봉수가 ‘으흐흐’ 장난스럽게 웃었다.
“역시 내 감이 맞았쓰! <투명한 사랑> 홍콩에서 상 받을지도 모른다더라. 그것도 한국인 최초로.”
“뭐?”
“지금 주연배우가 신인상 후보, 음악으로 작곡상 후보. 이렇다는 소식을 신 대표가 전해 왔다는 거지!”
“에이, 난 또 뭐라고. 말 그대로 후보잖아. 후보.”
“야! 너 후보도 얼마나 힘든 건 줄 아냐! 같은 예술 한다는 놈이 왜 저렇게 매정해?!”
지성미가 비워진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뭐래. 나처럼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힘쓰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인마. 그럼 친구 잘되는 꼴도 좀 보고 그래라!”
“무슨 소리야? 내가 요새 제발 우리 봉수 좀 잘 되게 해주세요. 하고 새벽 기도까지 나가는데?”
둘은 양껏 씩씩거리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근데 영화가 그렇게도 잘 나왔대?”
“응. 영화제 끝나고 개봉 전에 기술 시사한다니까 너도 가자. 친구가 딱! 투자 크레딧에 나오는 건 극장에서 봐야지!”
안 간다 그러면 1년은 삐져 있을 류봉수였다.
“알겠어. 미리만 알려줘.”
“그래. 크레딧 사진도 좀 찍고, 주변에 이런 친구 있다고 자랑도 좀 하고.”
“1절만 하자.”
지성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류봉수는 그만둬야 할 때를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럼요. 그럼! 자, 성미 씨! 한잔하시죠!”
그는 빠른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곤 소주가 담긴 잔을 원샷 했다.
“크으! 근데 성미야. 너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지성미는 그런 친구를 한심하게 보았다.
“친구 얼굴 상했다면서 술은 잘도 먹네. 우리 아트센터 요즘 대형 프로젝트 준비 중이잖아.”
“어떤 프로젝트?”
“연극 준비 중이야. 근데 영 괜찮은 대본이 없네.”
“대본?”
“그래. 응모도 받아보고, 기성 작가들 연락도 돌려봤-. 응? 너 표정이 왜 그래?”
류봉수는 일을 아주 크게 벌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때마다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는데.
“성미야. 나 방금 엄청 좋은 생각 떠올랐는데. 들어볼래?”
양 볼에 푹 파인 보조개로 굉장히 느끼해진 바로 지금과 같은 표정이었다.
“하아, 또 뭔데? 헛소리기만 해봐. 아주.”
“<투명한 사랑> 연극화해보면 어때?”
*
2주 후.
김포공항.
“자, 다들 내리시죠.”
홍콩으로 출국하기 2시간 전.
우리는 화분 엔터 쪽에서 보내준 차 덕분에 공항까지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3일 뒤에 봬요!”
“그래. 잘 다녀와. 보배야! 상 꼭 타고!”
인자한 인상이 양상철과 비슷해 보이는 이 실장은 공항 출입구에 밴을 세웠다.
“감사합니다! 어? 잠깐만요.”
먼저 내리려던 나는 밖에서 느껴지는 묘한 낌새를 눈치챘다.
“대표님 왜요? 밖에 무슨 일 있어요?”
“여기 왜 이렇게 카메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한보배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어디 유명 아이돌이라도 기다리나 보죠. 그게 뭐 대수라고. 얼른 내리세요!”
그래. 그게 뭐 대수냐.
홍콩으로 출국하는 일행은 이미 해외에 나간다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떠밀리듯 밴에서 내렸고.
역시는 역시였다.
대충 지나가며 들어보니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 유명 여자 아이돌을 기다리던 기자들과 팬이었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도 가끔 눈길을 보내긴 했으나.
“어? 저 사람 한보배 아니야?”
“그러게. 아, 아시안 필름 어워드 후보 올랐다더니만, 그거 때문에 출국하나 보다.”
“그래? 그렇구나.”
이 정도의 반응이 다였다.
기자들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한보배는 의기양양했다.
“거봐요. 아직 제가 기자님들 기다리게 하고 막 그럴 위치는-!”
그러다 그녀는 앞으로 튀어나온 뭔가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꺄악!”
“앗!! 죄송해요! 화장실 갔다가 지나가시는 걸 보고 급하게 뛰어온다는 게, 그만! 놀라셨어요?!”
앞에는 얼굴이 익숙한 여자가 놀란 한보배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응? 기자님?”
어디서 본 사람인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 인터뷰를 진행했던 장혜리 기자였다.
“아!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그러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후보 오르셨다면서요! 당연히 출국 전 인터뷰하러 왔죠!”
그 말에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한보배의 눈코입이 모두 커졌다.
“진짜요?!”
2시간 후.
우리는 장혜리와의 짧은 인터뷰를 진행한 뒤 기분 좋게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거봐요. 기다리는 기자님 있잖아요.”
“그렇네요.”
한보배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 비행기 놓치면 안 되니까 몇 가지만 빠르게 질문드릴게요!
장혜리는 가지고 온 수첩과 녹음기를 꺼내 한보배와 천상현, 그리고 나한테까지 질문을 한 뒤 우리를 한쪽에 세워 놓고, 단체 사진까지 찍었다.
그녀는 한술 더 떠.
-한 배우님!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쭉 걸어가 보세요! 예예! 멈추지 마시고! 예! 됐습니다!
요즘 공항에선 자연스러운 사진이 대세라며 한보배가 걸어오는 모습까지 찰칵찰칵 찍느라 바빴고.
-꼭! 꼬옥! 상 타실 겁니다! 믿습니다! 제가!
이런 사이비 신도 같은 말도 남겼다.
“근데 그 기자님. 에너지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생기가 넘친다고나 할까?”
“그분이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속으론 매우 그렇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때 한보배의 걱정스러운 말투가 들려왔다.
“상 진짜 받을 수 있을까요? 그 기자님 봐서라도 꼭 받고 싶은데.”
인생이 재밌는 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지.
“누구보다 치열하게 했으니까 그에 대한 보상은 꼭 따르지 않겠어요?”
홍콩에 도착해 공항 밖으로 발을 내밀자마자 선선함과 봄의 기운이 같이 느껴졌다.
“와. 날씨 진짜 좋다! 서울은 꽤 추웠는데.”
“그러게요. 우선 숙소로 가시죠.”
우리는 택시를 나눠 타 영화제에서 잡아 준 호텔에서 내렸고, 체크인도 빠르게 했다.
두 부문이나 후보에 올라서인지 모두 1인 1방으로 배정받았다.
“각자 짐 푸시고, 1시간 뒤에 볼까요? 근처에서 저녁 먹읍시다.”
“넵!”
시상식은 내일이라 오늘 정해진 스케줄은 없었다.
이번 영화제에도 필름마켓은 열리기에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이맘쯤 괜찮은 아시아 쪽 영화가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괜히 가서 힘 뺄 필요는 없지.
그것보단 그 영화 판권을 사고 싶은데······.
내가 찾는 영화는 영국에서 개봉한 영화로 그 시기는 아마 내년쯤이었던 것 같다.
주시하고 있다가 필름마켓이 열릴 때 출장이라도 다녀와야겠다.
한 시간 뒤.
로비에서 만난 우리는 근처 완탕면 집으로 향했다.
“냄새 죽인다! 잘 먹겠습니다!!”
홍콩을 처음 와 봤다는 천상현이 완탕면만은 꼭 먹고 싶다고 해서 왔는데.
후루룩, 후루룩 잘도 먹는다.
“천 쌤. 맛있어요?!”
한보배는 내일 입을 드레스 때문에 옆에서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예! 진짜 맛있어요!”
저럴 거면 그냥 숙소에 있지. 셀프고문을 하고 있다.
“좋았어! 내일 끝나면 먹을 리스트에 완탕면도 추가!!”
나는 그런 한보배와 완탕면을 먹고 있던 모두에게 제안했다.
“아, 맞다. 이따 저녁에 한 방에 모여서 ‘아는 동생’ 같이 보시죠? 오늘 방송이잖아요.”
한보배 매니저 남상훈은 완탕면을 먹다 말고, 걱정이 태산인 얼굴로 말했다.
“흐음. 그것도 좀 걱정이긴 한데.”
“응? 왜요?”
그가 정말 몰라서 묻냐는 눈빛이길래 다시 물었다.
“승현 때문에요? 그래도 녹화는 잘 끝났잖아요.”
“대표님. 그날 정말 승현만 보고 있으셨구나. 하하.”
스타일리스트가 말을 덧붙였다.
“저는 대표님 눈에서 레이저 나가는 줄 알았잖아요. 보배 언니가 뭘 하는지 제대로 못 보셨을 것 같은데.”
아, 이 사람들 그거 때문에 이런 반응인 거구나.
“혹시 보배 씨 개인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응? 알고 계시네요? 대표님은 걱정 안 되세요?”
한보배가 녹화 때 조금 과하긴 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대중들에게 먹힐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예능을 추진한 거기도 하고.
“예. 저는 걱정 안 합니다. 이제 여배우라고 내숭 떨고 그러는 시대는 지났어요. 아마 방송 끝나면 보배 씨 인지도 확 올라갈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