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45화 (45/140)

#45화. 뭐 눈엔 뭐만 보인다

“여보세요? 엄마?”

하도 칼퇴를 종용하는 신 대표 때문에 집에서 작업 중이던 신서영은 오랜만에 걸려 온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응. 서영아. 밥은 먹었어?

“응응. 먹었지. 엄마는?”

-우리야 뭐, 걱정 없지. 네 아빠는 너무 잘 챙겨 먹어서 탈이다.

“잘 챙겨 먹어야지. 나이들이 있으신데.”

-얘도 참! 아직 50대인데! 한창이지!

신서영은 나이 이야기에 발끈하는 엄마의 반응이 귀여웠다.

“그래. 내가 얼른 성공해서 효도할 테니까 계속 한창 하셔요.”

그러자 엄마는 처음부터 물어보고 싶었을 질문을 이제야 꺼내놨다.

-그 뭐냐. 영화 쪽 그거는 잘되고 있고?

신서영은 20살이 되면서부터 부모님 속을 꽤나 썩여왔다.

초, 중, 고등학교 말썽 한번 피운 적 없던 아이가 갑자기 만화를 그리겠다며 상경하질 않나.

5년간 갖은 고생을 다 하더니 이번엔 영화사와 계약했다고 하질 않나.

처음엔 순진한 딸이 사기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도 돈을 받았다고 하니 부모님은 마음을 놓았다.

“그러엄! 엄마. 나 메인 감독님 도와서 연출도 할 거야. 돈도 그만큼 챙겨주신대 대표님이!”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더 잘하고 싶었다.

각색 작가가 붙어 도움을 주긴 했으나 머릿속 이야기를 글로, 영화로 더 잘 표현하려면 우선 자신이 영화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몰래 피나는 노력을 했다.

많은 영화를 찾아봤고,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자 서서히 영화의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됐고, 콘티를 그릴 때쯤에는.

한 컷 안에 장면을 어떤 식으로 구상해야 할까?

조명으론 어떻게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좋지?

카메라를 어느 방향에서 찍어야 내 의도가 정확하게 반영될까?

의상은? 분장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그려왔다.

그러니 그녀는 신바드의 제안을 듣고,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는지 모른다.

티를 내면 뭔가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사무실에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어머? 정말? 우리 딸 장하네!

“그럼! 누구 딸인데!”

그때.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아이고! 이 양반아!! 전화기는 왜 뺏어가!! 스피커로 같이 듣고 있었으면서!!

-이건 나 혼자 들을 거야! 딸!!

아빠였다.

“아빠?”

-그래그래. 우리 딸. 타지에서 고생이 많다. 그래서 우리 딸 누구 딸?!

어릴 때부터 아빠는 항상 엄마와 경쟁하며 유치한 질문을 던졌고.

엄마가 이런 시답잖은 질문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아빠 딸이지!”

전화기 너머로 신이 난 아빠의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들려오자 자신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 후로 시작된 아빠의 수다를 가만히 듣던 신서영은 모니터 흰 바탕 위로 깜박이는 검은색 커서를 바라봤다.

[왕국 : 역병의 시작]

골방에 갇혔던 5년 동안의 머릿속은 암흑이었는데.

차츰 영화에 관심이 생기고, 자신의 이야기를 인정받으니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소재들이 떠올랐다.

‘아직 가제이긴 하지만, 틈틈이 써봐야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능도, 마음의 넉넉함도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

한보배의 녹화 날이 되었다.

‘아는 동생’의 주 컨셉은 학교였다.

고정출연자들이 다니는 학교에 게스트가 입학한다는 설정으로 에피소드를 문제처럼 내서 맞추기도 하고, 게임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오늘의 게스트는.

한보배와 남자 아이돌 그룹 ‘소울피스’의 멤버 승현. 최근 찍은 영화에서 나이에 맞지 않는 연기력으로 찬사를 받고 있던 아역배우 이서아.

이렇게 세 명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승현인지.

함께 출연하는 게스트가 누구인지는 오늘 방송국에 와서야 알았는데.

그는 전생에서 이미지가 점점 안 좋아지다 가까운 스태프의 고발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행하는 갑질은 물론이고.

만나는 여자 연예인마다 건드려본 뒤 넘어오면 만나고, 안 넘어오면 뒤에서 욕하고 다니던 아주 질이 좋지 않던 놈이었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시기라 덜하긴 하겠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진 않으니 옆에서 철벽 방어하긴 해야겠다.

대기실에 앉아 한보배의 메이크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나는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메이크업을 마치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한보배였다.

그녀는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물었다.

“대표님 저 어때요?”

“음, 좋은데요?”

“그래요? 다행이다. 너무 오랜만에 교복을 입어서 조금 어색했거든요.”

“에이, 졸업한 지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이야기할 에피소드는 준비했어요?”

그녀는 한쪽 행거에 걸려있던 롱패딩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럼요! 대표님한테 이야기하려고 적어둔 게 여기 한 트럭이에요!”

저번에 통화하면서 찾아왔던 게 저건가 보다.

“다행이네요. 근데 저건 언제 입게요?”

내가 가리키고 있던 건 롱패딩 옆에 걸린 초록색의 트레이닝 바지였다.

“아, 저거는-.”

벌컥-!

“실례합니다!”

갑자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멀대 같은 놈 때문에 한보배의 말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멀대는 승현이었다.

전생에선 그를 실제로 본 적 없어 실물은 처음 보는 거였는데.

실체를 알아서 그런가, 영 별로다.

대기실을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는 것부터가 잘못된 행동이었다.

한보배도 당황한 눈치였는지 잠시 그를 멀뚱히 보다가 물었다.

“그······. 승현 씨?”

“네! 보배 누나! 안녕하세요!”

승현은 원래부터 알던 사이인가 싶을 정도로 친화력을 뿜어냈다.

유독 한보배에게만.

“아, 네. 하하. 안녕하세요.”

“와, 제가 배우 누나는 가까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실물 진짜 예술이시다. 그런 말 자주 들으시죠?”

“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어휴. 꼴 보기 싫어서 더는 못 보겠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한보배와 승현 사이를 쓱 갈라놨다.

“저기. 승현 씨라고? 보배 씨가 지금 메이크업을 수정해야 하거든요? 반가웠습니다.”

말만 차분하게 했지.

놈을 거의 대기실 밖으로 내쫓았다.

“그럼.”

쾅-!

문을 닫고, 돌아보니 사람들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내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자 한보배는.

“대표님. 저 메이크업 이상해요?”

그 와중에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울상으로 물었다.

“아니요. 좋아요. 좋아. 제가 승현 씨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은 게 있어서요.”

그러자 옆에 있던 매니저 남상훈이 손뼉을 짝 쳤다.

“그렇죠?! 아유. 대표님이 왜 그러시나 했네. 근데 무슨 소문이요?”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니 지금은 소문이 퍼지기 전인가 보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더 생기기 전에······.

“그게 말이죠. 승현 씨가 그렇게 여자 연예인들한테-.”

나는 대기실 안 사람들을 모아놓고, 내가 알고 있는 팩트들을 요목조목 짚어줬다.

이들에게 말함으로써 전생에서와 같은 소문은 서서히 퍼질 것이다.

이를 계기로 놈이 금방 정신을 차린다면 다행이고, 반대라면 같은 루트를 밟겠지.

선택은 승현의 몫이었다.

다행히 녹화는 순조롭게 시작됐고.

카메라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꼼꼼히 모니터 했다.

승현도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아는지 지금은 정상인 코스프레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안녕! 난 이서아라고 해!”

고정출연자들의 오프닝이 끝나고, 이제 막 들어온 게스트 세 명이 차례로 인사 중이었다.

‘아는 동생’은 모두가 다 같은 학년이라는 설정이라 나이 불문하고 반말을 해야 한다.

아역배우가 또롱 또롱한 말투로 인사하자.

“아이! 우리 서아! 왔어?! 반가워!”

“너 웃는 게 너무 귀엽따아!”

고정출연자들은 아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내가 좀 귀엽지! 근데 너희도 귀여워!”

그 말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쓰러졌다.

이서아. 현재 11살.

타고난 연기 신동으로 전생에서 넘어온 시기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던 배우였다.

탑까진 아니어도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지.

인연을 만들어놔서 나쁠 게 없다.

근처에서 나와 비슷한 자세로 이서아 쪽을 보고 있는 여자를 찾았다.

이서아는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가 현장을 따라다니며 케어해 줬던 거로 기억한다.

오늘도 와 있겠지.

얼마 안 걸려 눈에 띄는 여자를 찾을 수 있었는데.

30대 중반으로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저 여자가 이서아의 엄마일 것이다.

현장 스태프들은 저런 옷 절대 못 입는다.

아직 촬영 중이었으므로 그녀에게 조심히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저, 안녕하세요. 서아 양 어머님 맞으시죠?”

“아, 맞습니다. 무슨 일로?”

그녀에게 명함을 건넸다.

“영화사 하는 신바드라고 합니다. 서아 양 작품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대표라는 직함을 보자 그녀의 태도가 순간 달라졌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준비 중인 영화들이 있어서요. 캐스팅 제안은 소속사 통해서 받는다는 거 알고 있지만, 이렇게 뵌 김에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어머, 호호. 보통 대표님이 직접 오시지는 않던데.”

“대표랄 게 뭐 있습니까. 저는 대표가 제일 바빠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와, 젊으셔서 그런지 깨어있으시네요. 언제라도 회사 쪽으로 연락주시면 제가 꼭 긍정적으로 출연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자, 이서아 쪽은 얼굴을 터놨으니 됐고, 이제 녹화만 잘 끝나면 된다.

그러나······.

승현은 아직 회귀자의 무서움을 잘 모르는지 녹화 중 잠시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보배 누나! 이것 좀 드세요!”

“와, 누나 머릿결도 진짜 좋다!”

아주 세상 상큼한 척은 다 하면서 한보배에게 찝쩍거리고 있었다.

저건 버릇이다.

아마도 그의 미래는 바뀔 일이 없을 것 같다.

남상훈은 놈이 그래도 아이돌이자 같이 출연한 게스트이니 뭐라고 하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승현의 매니저는 반포기 상태였는지 옆에서 말리는 척 정도가 전부였다.

한보배는 당연히 불쾌한 얼굴이었으나 녹화가 끝나지 않아서인지 꾹 참는 모습이었다.

아직 그렇다 할 선을 넘은 것은 아니라 나도 근처에서 레이저를 쏠 뿐이었다.

첫 예능에다 신경 써야 할 승현까지.

한보배를 비롯한 우리 쪽 사람들에겐 10시간의 녹화가 지옥과도 같았다.

그렇게 힘들었던 녹화가 드디어 끝이 나고······.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힘들었던 만큼 빠른 퇴근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교복을 반납하고, 스태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데.

“누나! 혹시 전화번호 뭐예요? 알려주시면 안 돼요?”

이 자식은 아직도 안 갔네.

정말 끈질긴 놈이다.

“승현 씨. 죄송하지만 그건 싫은데요.”

한보배는 10시간 내내 친절한 웃음을 짓다가 처음으로 정색을 했다.

“네? 왜요? 그냥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연락하고 지내요!”

“하아······.”

눈치도 없는 자식인지.

저러다간 그녀가 빵 하고, 터질 것 같아 나서려고 한 발자국을 움직였다.

그런데.

“저기요.”

엥? 아니, 이게 무슨?

갑자기 나타나 승현에게 말을 건 남자를 보고 나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그만하시죠.”

이 과장!

승현을 가로막으며 멋있는 척 중인 남자는 달리기하면서 봐도 이 과장이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벗겨져 있던 머리가 15년이란 세월을 역행하면서 꼼꼼히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승현은 그런 이 과장이 어이없었는지 코웃음을 쳤다.

“누구세요?”

정의의 이 과장은 물러섬이 없었다.

“저 여기 스태프인데요.”

‘필름코팅’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던 이 과장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그가 반가웠다.

“이 과장-.”

“아니! 그러니까 무슨 스태프냐고! 뭔데!”

이 과장을 부르짖던 내 목소리는 승현의 급발진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울리는 세트장에서 큰 소리가 나니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승현의 매니저도 이건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복화술로 말리기 시작했다.

“승현아. 보는 눈 많다. 그쯤 해라.”

“형! 이 아저씨가 나보고 그만하라잖아! 내가 뭘 했어? 어?!”

눈을 유심히 보니 돌았다.

안 되겠다.

이 이상 두고 보면 괜히 한보배까지 구설에 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저기요. 오늘 아주 많은 일 했으니까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하시죠?”

회귀 후부터 이사한 최근까지 집에 턱걸이 봉도 설치하며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이 과장과는 다르게 덩치 큰 남자가 나서니 승현은 조금 주춤했다.

“아, 아저씨는 또 뭔데, 아까부터 나서!”

“그거까진 알 거 없고. 그만하라고.”

그 말에 승현은 다시금 눈이 돌았다.

“아! 씨발! 다들 뭘 그만하래! 대뜸 와서는 사람을 추행범 취급이나 하고!”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승현은 머리도 나쁜 것이 틀림없다.

단어 선택이 아주 좋지 않았다.

“추행? 무슨 일이야?”

“몰라요. 승현 씨가 뭘 했다는데?”

“어? 저 사람 우리 쪽 알바 아니냐? 정리하라고 불러놨더니 왜 저기 가 있어?”

“그러게요. 저기요! 거기 무슨 일 있어요? 누가 누굴 추행했다고요?”

점점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승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이, 씨발!”

옛말이 딱 맞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자 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잖아!”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말이다.

하아. 이 정신 나간 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어? 대표님?”

뒤를 돌아보니 최세준 과장이 서 있었다.

“오늘 녹화 오셨어요? 말씀을 하시지!”

그가 후다닥 우리 쪽으로 달려오자.

“대표?”

승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데 뭐 하고 계셨어요?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던데?”

아, 내가 이야기 안 했던가.

‘아는 동생’은 YJ E&M에서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 채널 pvN의 프로그램이다.

“그게 좀 불쾌한 일이 있어서요.”

“예? 아니! 누가 우리 대표님한테?!”

최세준이 야단을 떨며 주변 사람들을 추궁하던 중.

저 멀리 담배를 태우고 들어오던 ‘아는 동생’의 PD가 최세준을 알아봤다.

“어! 과장님! 여긴 어쩐 일로?”

그러자 승현의 얼굴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그러게. 왜 식구들을 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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