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라비안필름은 프리패스
“이상입니다.”
최세준의 브리핑이 모두 끝났지만, 궁금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제작사에서 내걸었다는 마지막 제안이 너무나도 황당했기 때문이다.
배인규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손짓했다.
“저 제작사가 그때 그 신생 제작사 맞나?”
“예. 맞습니다. 한번 조사해 볼까요?”
“아니야. 됐어. 뭘 조사까지.”
비서가 물러나자 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짜 재밌는 놈이구만.’
대표라는 놈이 아주 맹랑했다.
보통의 제작사들은 투자와 배급을 전문으로 하는 자신들에게 설설 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놈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고, 그 딜의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영화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잘 팔릴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건데.’
지금까지 사업을 해오면서 젊은 놈들의 객기는 수도 없이 봐왔다.
자신의 영화가 잘 팔릴 거라는, 확신의 꿈을 꾸며 살다가 없어지는 중소 영화사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데 또 영화 자체는 괜찮단 말이야.’
흥미로운 것, 투성이였다.
도건우 주연.
한 번도 구현해본 적 없는 사후세계.
1, 2편 동시 제작이라는 점까지도.
새로운 시도였고.
성공만 한다면 엄청난 수입으로 돌아올 것이다.
회의실 내 직원들이 숨죽인 채 배인규의 심각한 표정만을 살피던 중.
근처에 있던 조 상무는 배인규 회장이 절대 이 황당한 안건을 승인해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배인규에게 점수를 딸 기회는 흔하게 오지 않는다.
조 상무는 테이블까지 쳐가며 이목을 집중시킨 후 열변을 토했다.
“저는 이 프로젝트 반대합니다. 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그때.
“진행 시켜.”
배인규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외에서는 분명히 안 먹혀. 판권 정도는 내줘도 괜찮겠지.’
국내에서만 대박이 나도 투자, 배급사에 돌아오는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배인규가 YJ E&M을 여기까지 성장시킨 데에는 자신의 감이 8할을 차지했다.
그는 이번에도 그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
-대표님!
반가운 최세준의 전화였다.
“예. 과장님. 결정 났어요?”
-예! 말씀하신 영화제 출품이랑 한보배 씨 예능 출연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예능 스케줄은 화분 엔터 쪽이랑 조율해서 잡을 건데 결정되면 대표님께도 다시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혹시 영화제 출품 관련해서 번역은 저희 쪽에서 결정해도 됩니까? 잘하는 분을 알고 있어서요.”
-그럼요! 저희야 업체 선정 안 해도 되니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최세준의 목소리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숨겨놓은 산타 할아버지 같았다.
-<망자와 함께> 투자배급 건 말입니다. 승인받았습니다!
희열이 느껴졌다.
“그럼 저희 조건도 받아들여지는 겁니까?”
-예! 그거 받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도 무려 회장님한테 직접 승인받은 거라 일 처리는 빠르게 될 겁니다.
“회장님한테 직접이요?”
-예예! 자세한 이야기는 곧 만나서 해드리겠습니다. 계약서 초안 보내드릴 테니, 확인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도장은 최대한 빨리 찍으시죠!
무슨 일인지 최세준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번엔 전해성에게 전화를 걸어 번역을 의뢰했다.
전해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의뢰를 받았다.
그는 <워싱>을 번역한 뒤로 몇몇 수입 영화의 의뢰를 받는 것 같았는데.
대략 7 작품의 의뢰가 들어오면 1 작품 정도 한다고 건너 건너 들었다.
그런 그는 내 전화에 이런 반응이었다.
-요즘 볼만한 영화가 얼마나 없던지. 대표님 연락만 기다렸다니까요!
전해성은 당연히 아라비안필름 작품은 프리패스라는 호탕한 말을 덧붙이고 일주일 만에 작업을 완료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
“선배. 그 소문 들었어요?”
“뭐? 아, 아라비안필름 새 작품?”
장혜리는 잔뜩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어! 뭐야! 알고 계셨어요?! 근데 왜 말 안 해주셨어요?”
“해주면 뭐! 또 그 대푠지 알리바반지 그 사람 쫓아다닐 거잖아. 너!”
“그, 그래두!”
“저번에 그 대표 인터뷰 기사도 그래. 완전히 일기를 적어놓고선. 그때 댓글에 욕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어느새 기자 생활 1년 차가 된 장혜리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요, 욕먹으면 오래 산다고 할머니가 그러셨는데요! 선배님이 그때 신바드 대표를 직접 못 보셔서 그래요! 진짜 사람이 진국이었어요!”
김 선배는 장혜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뚝 멈추곤 미간을 좁혔다.
“너, 혹시 무슨 짝사랑이라도 하냐?”
장혜리는 잔뜩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소리세요! 저는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제작자 대 기자로서 존경하는 거뿐이라고요!”
김 선배는 그런 장혜리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니라면 다행이다. 어쨌든 주연이 도건우라는 소리가 있으니깐 유심히 지켜보고는 있어라.”
“도건우요?”
“그래. 네 말대로 그 대표 재주가 좋은 건지 모르겠다만, 도건우라는데 예의주시하고 있어야지.”
장혜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역시 대표님이라니까. 그 까칠한 도건우를 또 어떻게 잡았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다짐을 했다.
“그래! 좋았어!”
괜한 김 선배만 화들짝 놀랐다.
“아, 혜리야! 너 목청이 커서 조금만 크게 이야기해도 나 놀란다니까?”
“그건 선배님 심신이 허약-. 아, 이게 아니고, 어쨌든 선배! 저 이번엔 무조건 첫 단독 올리겠습니다.”
“어휴. 아서라 아서.”
김 선배는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그녀는 투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뭔가 대표님은 영화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아. 이번에도 느낌이 온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신바드에게 집착하는 그녀였다.
*
전해성의 번역은 이번에도 완벽했다.
영화 수입, 수출을 많이도 해봤을 최세준이 극찬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아니! 대표님! 이런 실력자를 혼자만 알고 계시고! 저희도 소개 좀 해주시죠!
-하하, 이분이 좀 까다로우신 분이라······. 여쭤는 보겠습니다.
당연히 전해성은 거절했다.
어디에 속하는 건 질색이라면서.
또 최세준에게 <망자와 함께> 감독이 결정된 것을 전달했는데.
-과장님. 저희 연출 허훈, 신서영 투톱으로 진행할까 하는데요.
-와, 허 감독님은 쉬지도 않으신대요? 완전 일 중독이시네. 그런데 신서영? 그분은 각본 쓰셨던 웹툰 작가님 아니세요?
-예. 맞습니다. 1, 2편 동시 촬영이니 촬영 분량도 많고, 기간도 길어서 허 감독님 혼자서는 힘에 부칠 것 같아서요.
-음, 그렇긴 하죠. 허 감독님 실력이야 저희도 인정하니까 걱정 없겠네요. 그럼 위에는 이렇게 보고하겠습니다.
다행히 그는 별 반응 없이 넘어갔다.
일주일 뒤 번역이 완료됐고, 자막과 외국어 포스터, 예고편까지 <투명한 사랑>의 영화제 나들이는 순항을 맞았다.
출품도 기간 내에 깔끔하게 제출했다.
그러던 중 그린 애플은 미국으로 떠났고.
출국 전날 양상철의 전화가 왔다.
-보배 예능 출연한다고 들었습니다. 스케줄도 곧 잡힐 것 같던데 내가 그때 없을 것 같아서요. 우리 쪽 애들이 신경 쓸 테지만, 보배가 신 대표를 많이 의지하지 않습니까.
한보배의 예능 출연이 걱정되니 신경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흔쾌히 알겠다고 하자 양상철은 마음 편히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렇게 약 3주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앉아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과 사용한 돈을 대충 계산하는 중이었다.
우선 <워싱>의 수익이 50억 정도.
수입할 때부터 수익을 배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약한 거라 가능한 금액이었다.
여기서 세트장 사업으로 부지와 두 동의 건물 설계, 시공 비용까지 약 27억이 투자됐다.
이것도 예정우가 발품을 팔아 싼 부지를 구한 것과 류봉수의 지인 할인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현재 남은 금액은 약 23억.
이 돈은 우선 회사 운영을 위해 놔두는 대신 사무실부터 조금 큰 곳으로 옮겨야겠다.
<망자와 함께> 연출팀과 제작팀이 하나둘 꾸려지면서 사무실이 극 포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디로 옮겨야 하나.
인터넷으로 대충 찾아본 다음 예정우와 돌아보려고, 후보 지역을 나눴다.
강남. 역삼. 논현.
확실히 이쪽에 영화사들이 밀집해 있긴 한데 다들 너무 비싸다.
영화의 메카가 충무로라는 건 다 옛날 말이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직원들과 업무를 체계적으로 나누고는 있었으나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슬슬 이 과장도 데리고 오고 싶은데 그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때.
지잉-.
지잉-.
한보배였다.
“예. 보배 씨.”
-대표님! 저 예능 스케줄 잡힌 거 소식 들으셨어요?
최세준 과장의 연락이 아직 없는 걸 보면 한보배는 내용을 듣자마자 연락한 건가 보다.
“아, 그래요? 언제예요?”
나는 그녀에게 물으면서 노트북에 정리해 둔 스케줄을 확인했다.
-3월 2일이요! 프로그램은 ‘아는 동생’인데, 대표님이 추천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첫 예능이라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돼서······.
뉘앙스가 꼭 책임져라, 같았으나 뭐 내가 저지른 일이 맞기도 하고, 양상철의 부탁도 있었으니 이날은 시간을 빼놔야겠다.
“알겠습니다.”
-와! 정말이죠? 그럼 매니저 오빠한테도 말해둘게요!!
“예예. 다훈이랑 우주는 잘 지내고 있어요?”
-네. 다훈이는 학원 재밌게 다니고 있고. 우주는 저희 셋 중에서 제일 바빠요! 하교하면 바로 천 쌤이 데리러 오셔서 같이 작업하고, 또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그게 너무 죄송해서 집을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까요. 작업실 근처로.
한보배는 천상현을 천 선생님이라고 부르나 보다.
“아, 그래요?”
-네. 회사 정산 꼬박꼬박 받고 있어서 이사는 꼭 하려구요.
“잘됐네요.”
-그렇죠?! 아! 맞다! 제가 요새 전화를 자주 못 드려서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많거든요! 잠시만요!
장시간 이야기를 해야 하니 물이라도 가져오는 건가 싶었는데.
-보자, 보자. 아! 이거부터 이야기해드려야겠다!
내게 이야기할 날을 기다리며 메모라도 해둔 모양이다.
문득 전생에서 그녀는 이런 수다스러움을 도대체 누구에게 풀었을까. 하는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여하튼 이런 정성이니 오랜만에 조금은 시간을 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띠링-!
“응? 잠시만요. 보배 씨. 메일이 와서.”
-아아! 네! 확인하세요! 저 오늘 시간 무지 많아요!
음, 어째 나보다 더 한가해 보이네.
그녀가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메일함을 확인했다.
그런데······.
도착한 메일은 온통 영문이었다.
제목부터 해석해보자면.
[아시안 필름 어워드에 초대합니다.]
영화제 초청 메일이 확실해 다급히 클릭했다.
내용을 쭉 확인한 나는 헛웃음이 났다.
“허허, 참.”
-왜요? 무슨 이상한 메일이라도 왔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보배 씨 후보래요. 후보.”
-응? 후보요? 무슨 후보요?
“신인상 후보요.”
-예?! 어, 어어!!
쿠당탕탕!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보배 씨?!”
-아야야. 네. 괜찮아요. 너무 놀라서 그만. 의자에서 떨어졌어요.
어떻게 하면 의자에서 떨어질 수가 있지.
“조심하셔야죠.”
어쨌든 이로써 해야 할 일이 추가됐다.
“그럼 보배 씨. 이제 홍콩 갈 준비도 하셔야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