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천재의 광기 어린 미소
영화 판권의 종류는 아주 세세하게 나눌 수 있었다.
국내, 해외, 극장, 비디오, DVD 등등.
그렇다면 이 판권의 주인은 누구일까.
대부분 투자한 투자사들이 가지게 된다.
당연한 이치였다.
돈을 투자하고, 수익을 가져간다는 것은.
그러나 <망자와 함께>는 전생에서 수출로도 꽤 많은 수익을 냈던 영화다.
그 수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도 우리와의 계약을 원하는 YJ E&M에게 한 가지의 특약만을 걸고자 한 것이다.
바로 해외 판권을 가지고 가겠다는 특약.
당연히 YJ E&M에서는 벙찔 수밖에 없었다.
최세준이 팀장을 데리고 와 봤자다.
성공할지도 모르는 영화에 300억이란 큰 금액을 투자하면서 해외 판권까지 넘겨준다?
자신들이 당장에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결국, 그날 미팅은 내 의견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끝이 났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굉장히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막말로 해외 판권은 영화가 해외에서 먹혀야만 돈이 되는 수단인데 미래를 모르는 그들로선 이걸 당장에 판단할 수 없으니 답답하겠지.
그러나 도건우라는 카드는 적어도 국내에서 먹히는 카드였다.
YJ E&M 측에서 파격적인 내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미끼를 던졌으니 이젠 여유롭게 기다리면 되는 노릇이었다.
주말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일어나는 여유로움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전생에서도, 회귀 후에도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으니 이 햇살은 더 값지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꾸물꾸물 일어나 거실 한쪽에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사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매일 저녁에만 보던 거실의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두 번째로 주어진 삶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고, 팍팍하게 살긴 했는데 가끔은 이런 여유도 즐겨야지, 안 되겠다.
머그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코끝을 간지럽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망자와 함께> 제작을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 중이다.
배우, 투자, 배급 등등.
아, CG를 의뢰했던 ‘필름코팅’에서 연락은 진즉에 왔다.
대표의 전화가 다이렉트로 오는 바람에 당황했는데 그가 제안하는 딜은 더 황당했다.
-혹시 공동제작으로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필름코팅’에서 돈 냄새를 제대로 맡은 것이다.
-아니요. 공동제작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숟가락을 얹으려고.
단칼에 거절하니 그는 다소 깨갱거리면서.
-아, 워낙 규모가 큰 영화다 보니 부담되실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이 제안은 잊어버리시죠!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여하튼 ‘필름코팅’은 <망자와 함께>의 CG를 맡기로 했다.
‘필름코팅’을 비롯해 이제부터 이곳저곳 계약할 곳들이 많아 박지연에게 우선 초안들을 만들어두라고 한 상태다.
모든 준비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중요 요소인 연출.
감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베스트는 전생에서 <망자와 함께> 연출을 맡았던 감독을 찾는 것이었으나.
수소문 끝에 그는 현재 외국에 나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내가 <망자와 함께>의 제작 시기를 조금 더 일찍 당기면서 운명이 엇갈린 듯하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서 찾아갈 수도 없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감독으로는 허훈이 있었지만, <처절한 인생>일지 모르는 차기작을 집필 중인 그에게 무작정 부탁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외부에서 찾아봐야 한다는 건데.
앉아 있던 소파 위엔 보다가 놔둔 <신바드의 모험>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확인했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머그잔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고, <신바드의 모험>을 손에 들었다.
촤르륵-.
시나리오 북을 넘겨 현재 부분에서 딱 멈췄다.
그리고 몇 장을 더 넘겼는데······.
힌트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항상 조합하기 힘든 힌트들만 보여주던 시나리오 북이 오늘은 영 이상했다.
[신서영, 입봉, 흥행]
한눈에 봐도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는 힌트들을 보여준 것이다.
여유를 즐겨보고자 했던 주말 계획은 힌트를 확인하면서부터 어그러졌다.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고 고심했기 때문이다.
힌트는 누가 봐도 신서영이 입봉하면 흥행한다는 말이었다.
사실 시나리오 북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녀를 감독으로 앉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
만화와 영상의 연출법은 너무나도 다르다.
신서영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연출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무엇보다 영화의 시스템을 아예 모르는 그녀가 할 수 있을까조차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힌트는 틀린 적도, 나를 나쁜 방향으로 끌고 간 적도 없었다.
무조건 신서영에게 <망자와 함께> 연출을 맡겨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YJ E&M이 투자, 배급을 맡게 된다면 이 건부터 태클을 걸어올 것이고.
감독이 현장의 수장인 만큼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끌고 가야 하는데 확실한 믿음이 없는 그들이 잘 따라와 줄지도 의문이었다.
이 문제 해결의 관건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거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나는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허훈만을 기다렸다.
“좋은 아침입니-!”
“감독님! 저랑 모닝커피 한잔하시죠!”
아침 인사도 마저 못한 그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예. 중대한 사항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솔직하게’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허훈은 일순 긴장했다.
“아! 넵!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취조하는 기분이 드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그에게 궁금한 걸 묻기 시작했다.
“혹시 서영 작가님이랑 작업하실 때 어떠셨어요?”
허훈은 신서영이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순간부터 러프한 콘티 작업 중인 현재까지 일종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 스타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음, 서영 작가님이요?”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센스랑 응용력이 좋아서 뭐 하나 알려드리면 작품에 금방 적용하는 스타일이고, 콘티 작업할 때는 장면 연출을 굉장히 잘한다고 느꼈어요.”
의외의 극찬이 나왔다.
허훈이 맹하게 보이긴 해도 영화에 관련된 것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생각을 굳건히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건 누군가를 평가할 때도 나타났는데.
능력에 대한 입에 바른 소리는, 아예 하질 못했다.
“그럼 감독님. 혹시 <망자와 함께> 서영 작가님한테 연출 맡겨보는 건 어떨 것 같으세요?”
“오, 그게 꽤 재밌는 생각인데요? 사실 각본 쓴 사람이 자기 영화를 가장 잘 아는 법이죠.”
신서영을 감독으로 앉히더라도 사람들을 쉽고 빠르게 설득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내내 고민했다.
마침내 생각난 한 가지의 방법은 허훈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만 가능했다.
다행히도 그의 반응이 긍정적이니 제안해봐도 되겠다.
“근데 또 각본이랑 연출력은 다른 분야의 재능이긴 하잖아요?”
허훈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흠, 둘 다 잘하는 사람이 드물긴 하죠.”
“그래서 말입니다. 혹시 감독님이 같이 봐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초반만요.”
“제가요?”
“예. 아직 투자, 배급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니 감독님 차기작 집필은 우선 쭉 하시고요. 프리 때는 가끔 확인하는 정도로만, 촬영 시작하면 초반에만 붙어서 바짝 속성 과외 식으로요.”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만연했다.
“오호, 그거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정정한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게 아니었고, 천재의 광기 어린 미소였다.
신서영은 제안을 의외로 쿨하게 받아들였다.
“음, 허 감독님이 같이 하신다고요? 알겠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허 감독의 보조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줄 필요는 없지.
“그리고 진주 씨.”
최근 고진주는 쓰고 있는 것이 잘 풀리지 않는지 신서영의 옆에서 자주 머리를 쥐어뜯곤 했다.
글을 쓰려면 무엇이라도 경험이 있는 것이 백번 낫다.
스토리가 막힐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제일 좋고.
“이번에 <망자와 함께> 스크립터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좀 많이 힘들긴 할 건데 스크립터가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감독님 두 분 도와드리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을 거예요.”
그녀는 마침 잘 됐다는 눈빛이었다.
“어? 제가 해도 돼요? 그러다 민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그리고 아직 원하는 시나리오를 다 못 써서요······.”
“괜찮아요.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아, 그럼! 저 해볼게요!”
“예. 그럼 진주 씨는 내일부터 콘티 작업 붙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넵! 대표님!!”
아직 20대 초반인 그녀는 <투명한 사랑> 촬영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힘든 내색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독한 면이 있는 고덕현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음, 그럼 신 감독님.”
내 부름에 신서영은 미동도 없었다.
“신 감독님!”
“어어, 예?!”
아직 감독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조감독 금방 채용해드릴 테니까 우선 진주 씨랑 콘티 작업 공유하시면 될 것 같아요. 헷갈리는 건 허 감독님한테 여쭤보시면 되고요.”
신서영은 어딘가 미심쩍은 모양이었으나.
“아, 네. 알겠습니다.”
이미 마수에 걸려든 뒤였다.
그렇게 <망자와 함께>의 프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YJ E&M의 한 회의실.
기다란 ㄷ자 테이블에 주르륵 둘러앉아 있는 여러 나이대의 직원들.
그들은 현재 바짝 긴장한 상태다.
오늘 회의에 배인규 회장이 직접 참석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배 회장은 불시에 회사 내 회의실을 찾는 무서운 취미로 유명했다.
최근 몇 달간 모습을 보이지 않아 모두가 방심하고 있던 터라 프로젝트 회의를 진행하려고 했던 것인데······.
“요즘 도통 회의 같은 건 참석 안 하셔서 이제 그만하시나 했는데 무슨 일이시지?”
“낸 들 알아. 으아, 긴장돼서 죽겠다.”
그때.
달칵-.
회의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크흠.”
작은 키의 배인규 회장은 꼿꼿한 풍채와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 준비되어 있던 그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의 걸음걸이는.
그가 살아온 인생을 보여주는 듯했다.
회의실에 있던 모두는 벌떡 일어나 배인규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그는 직원들을 쓱 둘러보기만 하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나?”
옆에 있던 비서가 얼른 프린트물을 대령했다.
“예. 상반기 신규 프로젝트 투자 편성에 대한 회의입니다.”
“그래? 그럼 브리핑해 봐.”
오늘은 올해 상반기를 어떤 프로젝트로, 얼마의 예산을 들여 적절하게 운용할 것인가.
부서별 발표를 듣고, 대략적인 예산 편성까지 승인받는 자리였다.
발표를 하는 사람은 부서의 과장급 인원들이었고.
그 위로 팀장, 임원까지도 참석한 대규모 회의였다.
당연히 발표를 준비 중이던 과장들은 난리가 났다.
최세준 과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팀장님. 이거 정말 예산 회의에서 발표합니다?
-그래. 인마. 상무님한테 보고해놨어. 도건우라는데 빠질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 임원들 반대는 어떻게든 커버해주시겠대.
-그럼 다행이지만······.
-사내자식이! 뭐가 그렇게 겁이 많어! 그냥 질러보는 거지! 막말로 회장님 설득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랬던 팀장은 현재 자신의 눈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다.
아무래도 해외 판권을 넘긴다는 딜을 괜히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와 후회해봤자 돌이킬 수 없었다.
준비한 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직원들이 주춤주춤 자리에 앉자 앞에 서 있던 남자 직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예. 그럼 배급팀부터 브리핑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덜덜 떨리는 다리를 최대한 자중시키며 앞으로 나갔다.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자 눈에 들어오는 건 자신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배인규였다.
경직된 포즈로 한 손엔 마이크, 한 손엔 레이저 포인터를 쥐었다.
“예. 배급팀 최세준 과장입니다. 올해 상반기 프로젝트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스크린에는 빔프로젝터가 쏘아 올린 목차가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건 이것이었다.
[<망자와 함께> - 아라비안필름]
“먼저 올해 저희 쪽에서 꼭 투자와 배급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망자와 함께>입니다. 작년 큰 수익을 올린 <워싱>과 개봉 예정인 <투명한 사랑>의 제작사에서 준비하는 작품으로 도건우 씨의 캐스팅을 확정한 상태이고-.”
회의실 내는 웅성거렸다.
“뭐? 도건우?”
“도건우가 영화를 찍는다고?”
“그러게. 확정인데 소문도 안 났다는 거야? 확실한 거 맞아?”
그때.
“크흠.”
배인규의 헛기침 한 번에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하게.”
“예. 회장님.”
최세준의 본격적인 영화 설명이 시작되자 배인규 얼굴엔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