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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42화 (42/140)

#42화. 언제든 환영입니다

훌쩍이는 소리가 군데군데서 들려왔다.

“장난 아니죠?”

영화를 수백 번도 더 봤을 천상현이었으나 그는 오늘도 감동한 표정이었다.

<투명한 사랑>은 전생에선 아예 존재하지 않던 영화다.

온전히 내가 발굴해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는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예. 진짜 좋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저는 우주가 신이 나서 만든 곡 중에서 고르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 많은 곡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어려운 법이죠.”

천상현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작업하면서 영화 음악에 아주 제대로 빠졌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표님.”

내가 그를 일찍 끌어들이긴 했으나 언젠간 이쪽 판으로 넘어왔을 사람이다.

“능력이 출중하신 분들을 찾아내서 의뢰하는 게 제 일입니다. 저는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아닙니다. 대표님은 저를 살리셨어요.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내 예상보다 그의 상황은 더 최악이었나 보다.

뭐, 천상현의 몸값은 이제부터 쭉쭉 올라갈 테니까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저희 회사 영화는 계속 맡아주시는 겁니다?”

“아유!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달려옵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이번엔 허훈에게 향했다.

그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나경이 건넨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을 연신 찍어 누르고 있었다.

“감독님.”

내가 부르자 그는 치부라도 들킨 듯 흠칫 놀랐다.

“아! 대표님!”

“좋은 영화 연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훈은 이 말에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해야죠. 대표님도 부족한 영화 이끌고 가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는 어딘가 한층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많은 건 그대로였지만.

감동의 눈물을 조금 더 흘리던 허훈이 진정하자 물었다.

“이제 좀 쉬셔야죠?”

단편부터 시작해서 장편 촬영, 후반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

그러나.

“아니요. 전부터 꼭 쓰고 싶던 것이 있었습니다.”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설마, <처절한 인생>이 벌써 나오려는 건가?

“그럼 바로 작업 시작하시려고요?”

“한 일주일 정도만 쉬고,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머릿속에 결말까지 구상이 이미 끝나서 시나리오로 옮기는 건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허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 대표님. 다음 작품도 꼭 아라비안필름에서 촬영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진심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회귀 후부터 <처절한 인생>은 꼭 내 손으로 제작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으니 마다할 리 없었다.

“당연하죠. 감독님 작품이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허훈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망자와 함께>와 <처절한 인생>까지.

새로 시작된 한 해에도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구나.

“다들 요 앞 고깃집 예약해놨으니까 가시죠. 회식합시다.”

오랜만에 사무실로 출근한 예정우의 목소리가 저 멀리 들려왔다.

“고기!!”

우리는 그날 근처 고깃집에서 <투명한 사랑>이 준 여운을 이야기로 풀어내느라 바빴고, 다들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그리고······.

“여보세요?”

-대표님. 안녕하세요.

알딸딸한 상태로 집에 들어왔는데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누구세요?”

-저 도건우입니다.

그 이름을 듣고, 잠시 멍하니 현관에 서 있던 나는 오랜만에 마신 술이 확 깨버렸다.

*

이틀 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고깃집에서 한다훈을 불러 이야기를 잠깐 나누어보고 확신했다.

한다훈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득해 넘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망자와 함께>의 본격적인 제작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기에 우선은 연기 학원부터 다녀보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한보배는 그동안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동생에게 무심한 누나라 자책하는 바람에 달래느라 진을 좀 뺐다.

아람은 갑자기 양상철과 고깃집에 나타나서는 회식비를 쐈다.

재밌는 일도 있었는데, 아람이 저번 현장에서처럼 종합 선물 세트 상자 하나를 대뜸 내밀길래.

이상한 마음에 몇 번 추궁했더니 내 마니또라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녀는 마니또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고기까지 얻어먹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곧 미국으로 떠나는 그녀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와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도건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직접 내게 전화할 만큼 <망자와 함께>에 꼭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투명한 사랑> 때와는 또 다른 절박함이었다.

다음 날 바로 양상철과 통화해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기로 했고.

오늘은 최세준 과장과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으니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YJ E&M 건물 로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최세준이 보였다.

나는 나경과 함께였는데 그녀도 이제 슬슬 홍보와 배급 쪽을 알아야 할 것 같아 같이 온 것이다.

“대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짧게 나눈 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한 회의실로 향했다.

밖에서 사 온 커피를 그에게 건넸다.

“아이스 라떼 드시죠?”

“오! 어떻게 아셨어요?!”

“저번에 봤습니다.”

“와. 대표님 눈썰미 대박! 역시 성공하는 제작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십니다!”

이 미팅에선 그에게 부탁할 게 많았기에 커피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네! 그러시죠!”

예상치 못한 <워싱>의 수익 때문이었는지 그는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며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몇 달 전 만에도 YJ E&M은 완전한 갑이었으나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마치 VIP 고객 같은 존재일 것이다.

“투명한 사랑 개봉은 회사에서 4월 초쯤 이야기 나오고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지금이 1월 초였으니 약 석 달이 남았다.

4월 초면 날이 막 따뜻해져서 사람들이 바깥 외출을 시작하는 시기다.

그럼 자연히 관객의 수도 늘어난다.

또 내 계획에 딱 맞아떨어지는 일정이었다.

“좋습니다. 홍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워싱>이 워낙 잘 돼서 <투명한 사랑>도 공격적으로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홍보 방향이 있으십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 역시 대표님은 계획이 다 있으셨군요!”

<워싱>에서 관객 반응 예고편으로 쏠쏠한 반응을 끌어내기도 했으니 최세준의 눈이 저리도 똘망 똘망 한 것이 이해가 갔다.

“우선 영화제에 출품하고 싶습니다.”

“어느 영화제 말씀이십니까?”

“3월에 열리는 아시안 필름 어워드요.”

최세준이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음, 이건 보고를 좀 해봐야겠는데요.”

아시안 필름 어워드는 홍콩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로 해외 영화제이다.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번역해서 자막을 입혀야 하고, 영문으로 된 포스터, 예고편 등 추가적인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었으니 당연히 그로선 바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일 것이다.

상을 받을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투명한 사랑>은 예술영화의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초청된 사실만으로도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출품 마감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아서요. 빠른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보배 씨가 예능을 나가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는데요.”

“예능이요?”

그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예. 제가 봤을 때 전체적인 캐릭터가 굉장히 독특하거든요. 성대모사도 좀 할 줄 아는 거 같고. 너무 이미지 망가지지 않는 곳으로요. 제가 봤을 땐 ‘아는 동생’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전생에서야 배우들이 홍보차 예능에 출연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지금 시대엔 이미지를 소비한다며 웬만하면 출연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러니 최세준도 저렇게 놀라는 것인데.

“보배 씨가 여러모로 화제 된 적이 많아서 스케줄 잡는 건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을까요?”

“예. 오히려 배우들 예능에 거의 안 나오니 신선할 겁니다. 역으로 접근해보자는 거죠.”

“흠, 이것도 보고해서 최대한 빠른 일정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투명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얼추 끝나자 최세준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할 듯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옆에서 계속 메모만 하고 있던 나경도 그의 눈빛에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듯했다.

“저, 대표님. 이건 대외비인데, 혹시 아라비안필름에서 제작 예정 중인 영화 또 없습니까?”

먼저 이야기 꺼내지 않길 잘했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내가 입을 꾸욱 다물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저희 팀장님이 하도 대표님과 미팅할 때 꼭 여쭤보라고 신신당부하셔서요. 혹시 있으시면 다음 작품도 저희랑 진행하시는 거죠?”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으나 이번에 나는 일련의 목표가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하아, 저희가 준비 중인 게 하나 있긴 한데.”

최세준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입니까?! 이번엔 뭡니까? 장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팀장이 어지간히도 쪼았는지 그의 질문이 쇄도했다.

“사후세계 이야기고, CG가 80%일 것 같습니다.”

“예?!”

아주 간단하고도 압축된 한 문장이었으나 이쪽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모든 걸 관통하는 눈빛이었다.

이어진 그의 영혼 없는 리액션은.

“아, 그렇습니까. 재밌겠네요. 하하.”

그런 영화가 한국에서 먹힐까, 하는 의심이었다.

당연히 이렇게들 나올까 봐서 배우부터 섭외한 거다.

“주연배우는 도건우 씨로 확정됐습니다.”

최세준의 입은 순식간에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만큼 떠억 벌어졌다.

“도, 도건우 배우와 접촉 중인 것도 아니고? 확정이요?”

“예.”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던 나를 잠시 보던 그는 방금까지 하던 의심을 싸악 걷었다.

“와! 대박! 이게 얼마 만에 복귀작입니까? 알려지면 난리 나겠는데요?!”

한바탕 호들갑을 떨던 최세준은 정신을 차렸는지 내게 다시 물었다.

“혹시 투자사는 정해졌습니까?”

“아, 조금씩 소문이 퍼졌는지 연락은 오는데 아직 정해진 건 아닙니다.”

거짓말이다.

“정말입니까?! 그럼 저희도 아직 기회 있는 겁니다? 대표님!”

나는 더욱 이 상황에 몰입했다.

“이거 참. 기회가 있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일 최근에 연락 온 곳 하나가 저희가 원하는 조건 대로 무조건 맞춰주기로 해서요.”

“조건이요?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도 웬만한 조건 다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최세준은 이미 실적에 눈이 멀었는지 막 내뱉고 있었다.

“YJ E&M에서 맞춰주신다면 저희야 같이 하는 게 좋죠. 해왔던 곳이니.”

“그럼요! 아무래도 손발이 맞는 곳과 하시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위에 한 번 여쭤보시죠. 저희가 원하는 조건은······.”

그는 다음으로 들려올 내 말을 토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있었다.

“해외 판권에 대한 권리를 저희 아라비안필름에서 가지는 겁니다.”

“예? 해외 판권이요?”

최세준은 잠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더 흔들어 볼까.

“예. 어려운 조건인 건 아는데 해주신다는 곳이 있으니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아무래도 YJ E&M에서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감이 있겠죠?”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대표님. 도건우 픽스 확실한 거죠? 저 지릅니다. 그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근데 뭘 어떻게 지른다는 걸까.

“잠시만요.”

그는 다급하게 일어난 뒤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몇 초 후 밖에선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니임!! 빨리요! 빨리! 직접 이야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이거 놓치면 큰일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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