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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41화 (41/140)

#41화. 곧 실현될 현실

나와 미팅을 진행한 ‘필름코팅’ 직원은 내가 건넨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를 대충 훑어보더니 순식간에 태도가 달라졌다.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 시절만 해도 CG는 양념과도 같은 존재였다.

CG가 메인이 되는 영화는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티가 많이 났다.

<망자와 함께> 같은 경우에는 딱 보더라도 CG가 메인이다.

예산서를 짜고 있는 지금도 CG에 들어가는 돈이 제작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필름코팅’ 입장에서는 우리의 의뢰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내부 회의를 통해 알려주기로 했지만, 금액 협상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다.

아, 나오는 길에 이 과장을 찾아보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이 과장이 아르바이트한 시기가 지금이 아니거나 외근을 나갔거나.

아무래도 그는 ‘필름코팅’과 업무를 진행하면서 차차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제 <망자와 함께>의 주연배우와 투자사를 찾아야 하는데······.

역시 그 사람과 그곳이 좋겠지.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세트장 허가는 순조롭게 받을 수 있었고. 공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예정우가 그곳을 전담해서 봐주기로 했으니 딱히 큰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본격적인 <망자와 함께> 준비를 위해 익숙한 문 앞에 서 있었다.

똑똑-.

비서가 두드린 문 안쪽에서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사람 좋은 인상의 양상철이 나를 반겼다.

“어이구! 신 대표! 오랜만입니다! 허허.”

“예. 잘 지내셨어요. 대표님.”

“그럼요! 김 비서 여기 차 좀 내와 줄래요?”

“네. 대표님.”

비서가 나가고,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촬영은 잘 끝났다고요?”

“예. 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후반도 거의 끝나가고 있어요. 곧 YJ E&M이랑 협의해서 개봉 일정 잡을 것 같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시도들이 많아 걱정됐었는데 개봉까지 하게 돼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다 대표님 덕분이죠.”

그때.

여비서가 다시 들어와 차를 테이블 위에 놓고 나갔다.

양상철은 그 차를 물끄러미 보더니, 뭔가가 생각난 듯 이야기를 꺼냈다.

“신 대표가 처음 영화판을 바꿔본다고 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옛 친구 생각을 그렇게도 했습니다. 이쪽 계통에서 같이 꿈을 키워가던 친구였는데 교통사고로 죽었거든요. 졸음운전이었습니다. 막 돌 지난 아들도 있었던 놈이었는데.”

아, 양상철이 그렇게도 내 의견에 힘을 실어줬던 건 이 때문이었구나.

“그러셨습니까.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예. 사실 몇 달 동안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러다 상민이가 저를 건져줬어요. 같이 회사라도 차려 보자고. 그렇게 병신같이 살면 하늘에 있는 친구가 퍽이나 좋아하겠다고 욕을 하면서요.”

양상민이 비록 비리를 저지르긴 했으나 형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요새 많이 듭니다. 이렇게 신 대표도 만났으니 말입니다. 그때 포기했으면 어쩔 뻔했는지······.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양상철은 애써 웃어 보였다.

내가 그에게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이 전부였다.

“제가 꼭 바꿔보겠습니다.”

“벌써 바꾸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 저희 소속 배우들만 봐도 <투명한 사랑> 현장 이야기를 얼마나 하는지 아십니까. 또 스태프들은 어떻고요? 제가 이래 봬도 들리는 게 많은 위치입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양상철이 차로 목을 축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투자를 받으려면 좋은 시나리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 캐스팅이다.

배우 빨이 모든 작품에서 통용되진 않으나 그 영화를 판단하기에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분명했다.

“지금 회사에서 차기작을 준비 중입니다.”

양상철은 왠지 반가운 눈빛이었다.

“아? 벌써요? 그래. 이번엔 무슨 영화입니까?”

나는 그에게 <망자와 함께>를 간략히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그는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흐음, 꽤 흥미로운 주제네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영화가 되겠어요. 그런데 제작비가 만만치 않겠습니다.”

“예. 지금 대충 예산을 짜봤을 때 1, 2편 동시 제작으로 300억 보고 있습니다.”

<투명한 사랑>의 10배 가까운 금액이었다.

당연히 양상철이 놀랄 수밖에.

또 지금은 100억이 넘어가는 영화 자체가 별로 없던 시기였다.

“와. 좀 놀랍긴 하네요. 대형 프로젝트가 되겠는데요? 아니, 그것보다 잘만 된다면 영화사에 획을 그을 영화가 되겠습니다.”

다행히 그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혹시 도건우 씨에게 저승사자 역을 제안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승사자는 <망자와 함께>에서 주연급의 역할이었다.

우선 도건우를 캐스팅하기만 하면 투자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허허. 건우 캐스팅은 제 권한 밖이라서요. 아시죠. 건우 성격.”

왜 모르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대표님이 시나리오를 전달해주시면 또 그 의미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주섬주섬 가지고 온 시나리오를 꺼냈다.

“시나리오는 봐주실 것 같아 가지고 왔습니다.”

“허허! 역시 내가 신 대표 이런 능글맞은 성격을 좋아한다니까! 알겠습니다. 건우한테 잘 생각해보라고 말해놓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양상철에게 감사의 인사를 꾸벅 건넨 나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확인할 게 있었다.

“그린 애플 미국진출은 진행 중이신 겁니까?”

“아! 그럼요! 아람이 촬영도 끝났으니 이제 한 달 정도 후면 출국할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담당자는 누가······?”

“아이고. 어째 그린 애플 애들을 저보다 신 대표가 더 많이 걱정하는 거 같습니다! 허허!”

그거야.

전생이 그러했으니 나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양상민을 내 손으로 쫓아내기도 했고, 이후에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도는 대충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한다.

“신 대표가 하도 신신당부해서 내 아주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같이 보낼 겁니다. 출국할 때는 저도 같이 갈 거고, 왔다 갔다 할 예정입니다.”

양상철이 주기적으로 가서 확인한다면야 걱정 없었다.

“다행입니다. 그린 애플 빌보드 입성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대표님.”

양상철은 내 말이 당연히 일상적인 덕담인 줄로만 알고, 허허 웃을 뿐이었다.

곧 실현될 현실이라는 걸 전혀 모른 채 말이다.

*

좁은 사무실이 사람들도 꽉 차 북적거리는 날이었다.

<투명한 사랑>의 정식 기술 시사회를 진행하기 전에 사무실 식구들만 모아놓고, 조촐한 시사회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한 명, 두 명 인원이 늘어나더니 결국 배우까지 오게 됐다.

한보배는 한다훈과 한우주를 데리고 와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대표님. 저 오늘 너무 기대돼요.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녀는 벅참이 한껏 올라온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였고, 동생이 음악까지 맡아 작업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시면 안 되죠. 영화 개봉하면 연락도 여기저기서 많이 올 겁니다.”

내 말에 한보배는 흘리려던 눈물을 쏙 집어넣었다.

“맞아요! 대표님 말이 항상 맞았어요! 이제 시작인데! 힘을 내야지!! 벌써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이야!”

큰 소리를 내는 누나가 부끄러웠는지 한다훈은 동생을 챙겨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섰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다훈아. 저기 앉으면 돼. 우주랑 같이 가서 앉아 있어.”

내 말에 한다훈이 활짝 웃었다.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오호,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한다훈은 한보배의 끼를 물려받은 거 같은데.

아직 어린데도 눈웃음이 장난 아니다.

당장 주변만 봐도.

벌써 완성형 얼굴이라는 둥.

배우 누구를 닮은 것 같다는 둥.

나경과 박지연, 신서영, 고진주까지 난리가 났다.

그때.

한다훈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한우주가 앞을 더듬거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저, 대표님.”

“응? 우주, 무슨 할 말 있어?”

“예. 저 할 말 있는데요. 형 잠깐만 저기 멀리 가 있으면 안 될까?”

한우주의 말에 한다훈은 의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대표님. 우주 좀 부탁드려요.”

“그래. 알겠어. 먼저 가 있어.”

한다훈이 멀어졌으나 한우주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나를 끌어당겨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사실 저희 형 연기 잘하거든요.”

응?

진짜라면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그래?”

“예. 형은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데 집에서 혼자 매일 연습해요. 제가 들었을 땐 누나보다 잘하는 거 같아요.”

“뭐?”

이건 좀 놀랍다.

한우주는 이미 자신의 누나가 하는 연기를 음악 작업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누나보다 더 잘한다는 말은 분명 신뢰성이 있는 말이었다.

“정말? 그럼 형한테 직접 말해보지. 왜 형 몰래 귓속말을 하는 거야?”

“형은 부끄러움이 많아요. 제가 형 연기 연습하는 거 들었다고 하면 아마 매일 혼자 이불킥할 걸요? 그런 거로 형 주눅 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고, 현대판 의좋은 형제가 여기 있었구나.

“오, 알겠어. 그럼 내가 우주가 말했다는 건 비밀로 하고, 형한테 한번 물어볼게. 그럼 됐지?”

“예!!”

맘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한우주를 한다훈 옆으로 안내해 주곤 나도 자리에 앉았다.

마침 <망자와 함께>엔 앳된 느낌의 젊은 배우가 필요했다.

신입 저승사자 역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의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 또다시 오디션을 진행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찾고 있던 나이대가 한다훈과 딱 맞았다.

머릿속으로 도건우 옆에 한다훈이 서 있는 모습을 그려봐도 전혀 꿀리지 않을 모양새였다.

잘하면 이거 괜찮은 그림 남자 버전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한다훈에게는 시사회가 끝난 뒤에 물어보기로 하고.

영화 볼 준비를 모두 끝마친 뒤 사람들에게 알렸다.

“자, 그럼 <투명한 사랑> 첫 번째 시사회 시작하겠습니다!”

고작 TV로 연결해 보는 조촐한 시사회였지만, 두근거렸다.

모두의 눈빛은 나와 같은지 기대감으로 초롱초롱했다.

그렇게도 고생했던 영화가 도대체 어떻게 나왔을까.

내가 참여한 영화를 처음 볼 때의 설렘은 중독성이 강했다.

그 맛에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거기도 하고.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천상현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대표님. 기대 아주 많이 하고 보셔도 됩니다.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자신감 넘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화면 속에 나오기 시작한 <투명한 사랑>의 오프닝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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