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생각대로 흘러가는 인생
“신 대표님!!”
오랜만에 만난 류봉수는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왜 나와 계세요?”
“대표님이 오신다는데 당연히 마중 나와야죠. 자, 그럼 이야기는 제 집무실로 가서 나누시죠.”
나는 최근 주변 지인들에게 세트장 설계와 시공을 맡길 괜찮은 회사를 묻고 다녔다.
그러던 중 류봉수가 호언장담하며 자신이 소개해주겠다고 하길래 오늘 만나러 온 것이다.
잠시 후.
집무실로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있던 남성이 일어섰다.
류봉수가 그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오랜 친구입니다. 건설 쪽에서 일한 경력이 꽤 되는 친구라 믿고 맡기실 수 있을 거예요.”
“안녕하세요. 한주건설 영업팀장 안용덕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신바드입니다.”
우리는 짧은 통성명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류봉수는 비서가 가지고 온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나저나 대단합니다. 대표님. 어떻게 세트장 사업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직 시작인걸요. 열심히 회사 키워야지요.”
“그래도 그렇게 대범하게 사업하기 힘들죠. 저도 사실 이것저것 하고 싶은데 쫄려서 못 합니다. 하하!”
대범하기로 치면 개인 돈 5억을 영화에 투자한 본인도 만만치 않은데.
“아,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 시작해볼까요?”
“예. 제가 준비를 좀 해온 게 있는데 잠시만요.”
가지고 온 서류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긴 하지만, 대충 그려왔습니다. 이거 보면서 이야기하면 빠를 것 같아서요.”
고이 접어둔 A4용지를 펼치자 류봉수가 오! 하는 작은 감탄의 소리를 내었다.
“형편없기는요.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오셨는데요? 이거 저녁 예약 시간을 좀 당겨도 되겠습니다. 하하.”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류봉수는 진짜로 시간을 당기려는지 비서를 다시 불러 시간 조정을 부탁했다.
내가 그려온 배치도를 유심히 보던 안용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원하는 걸 확실하게 이야기해주시는 게 저희 입장에선 더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설명을 덧붙이자면-.”
우선 나는 <투명한 사랑>으로 이익을 얻기 전에는 한 동의 세트장 건물과 병원 로케이션으로 꾸며 사용할 건물.
총 두 개의 건물부터 짓기로 했다.
“건물들은 모두 단층으로 지을 겁니다. 나중에 추가되는 건물들까지도요.”
안용덕이 반박했다.
“이유가 있으십니까? 경찰서나 법원 등 다른 세트도 운용하실 거라 들었습니다. 그럼 한 건물에 층을 나누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텐데요.”
이건 촬영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동시녹음 때문에 안 됩니다. 세트장은 무조건 많은 팀의 예약을 받아서 돌려야 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건물을 지으면 1층에 병원 촬영하는 팀이 있는 날, 2층 경찰서 세트장에 다른 팀은 못 받습니다. 아무리 서로 조심한다고 해도 층간소음은 발생하니까요.”
그는 놀란 얼굴이었다.
“그렇게까지 작은 소리도 들립니까?”
“예. 녹음하는 마이크가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세트장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편이 좋고요.”
“아, 그렇군요. 이것 참. 제가 촬영을 모르니 원. 또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당연히 많지.
그 뒤로도 나는 세트 촬영하면서 항상 불만이었던 것들을 개선하여 짓고자 열변을 토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차장이 넓어야 합니다.”
그는 자칫 까다롭다고 느낄 수 있는 내 요청들은 모두 꼼꼼하게 메모했다.
“예. 원하시는 요구사항 다 반영해서 설계부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세트장 설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기본적인 설계가 두 달에 걸쳐 완료되면 전기, 수도, 정화조 등 설비 쪽 설계가 또 두 달 걸린다고 한다.
아마 허가받는 기간까지 계산하면 내년 초쯤에는 무리 없이 공사에 들어갈 수 있겠다.
이건 그대로 두고 보면 될 것 같고······.
지잉-.
지잉-.
진동이 울려 확인해 보니 천상현의 전화다.
-여보세요?
“아, 예.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무슨 일인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예! 대표님!! 너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응? 무슨 일 있어요?”
-당연히 있고말고요! 우주가, 우주는!
“감독님. 우선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전화기 너머로 심호흡 소리가 몇 번 들려오더니 말이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기뻐서요. 우주가 점자 시나리오를 하루 만에 다 읽어보더니 바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나온 결과물이 너무 좋아요. 이대로 가져다 써도 될 만큼요!
“그 정도라고요?”
-예!! 음악이 들어갈 장면마다 러프하게 분위기 정도만 생각해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거의 완성에 가까운 퀄리티의 음악을 들려줬다 이 말입니다!
생각보다 더 잘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음악은 이제 걱정이 없다.
“이야, 정말 다행입니다.”
-시간 나실 때 한 번 오셔서 직접 들어보시죠. 하여튼 이건 말로 해선 절대 설명이 안 됩니다.
잔뜩 신이 나 있던 천상현과의 전화를 끊고, 곱씹어 생각해보니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 서렸다.
인생이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는 건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다.
*
“자, 다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잔들 채우시고, 건배 한번 합시다!!”
장장 3개월에 걸친 <투명한 사랑>의 촬영이 드디어 끝났다.
촬영이 끝난 고덕현은 다시 인자해져 적응이 힘들 정도였다.
비단 고덕현 뿐만이 아니라 고된 일정이 끝난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꽃이 피어있었다.
오늘만큼 기쁜 날이 또 어디 있으리.
“진주 씨. 고생 많았어요. 촬영 힘들었죠?”
나는 옆에 있던 고진주에게 차마 ‘아버지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라고는 묻지 못했으나 그녀는 얼추 알아들은 눈치였다.
“힘들었죠. 촬영 현장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그때 대표님 제안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당연한 말이었다.
대개 이 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영화라는 결과물만 보거나 연예인을 근처에서 볼 수 있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뛰어든다.
막상 해보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힘듦으로 현실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렇죠?”
작품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오는 쾌감이란.
그 마약 같은 중독성 때문에, 영화판을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네. 솔직히 이제는 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저 말은 고덕현이 왜 그리도 촬영에 집착했었는지에 대한 답일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대표님.”
“예?”
“저 이번엔 시나리오 한번 써보려고요. 연출이 해보고 싶어요.”
‘독특한 감성’을 가진 고진주가 쓰는 시나리오라······.
“오, 좋은 생각인데요? 진주 씨. 진짜 잘할 것 같아요.”
고진주가 활짝 웃었다.
“정말요? 사실 아빠가 반대할 것 같아서 말도 못 꺼냈거든요. 대표님이 응원해주시니까 힘이 나요.”
나도 힘이 난다.
회사에서 제작할 수 있는 영화가 이렇게 또 생겨나고 있었으니까.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촬영이 끝나고, 후반이 시작되면서 이번엔 편집본을 받은 천상현과 한우주가 바빠졌다.
나는 줄곧 답답했던 고시원에서 나와 회사 근처 투룸 전세로 이사를 했고.
출퇴근을 걸어서 할 수 있다는 점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났음에도 <워싱>의 VOD 수입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역시 OTT 플랫폼이 나오기 전까진 이게 꽤 짭짤하다.
아, 그리고 회사에 고정으로 출근하는 인원이 한 명 더 늘었다.
바로 고진주.
그녀는 연출에 도전하는 꿈을 고덕현에게 어렵게 허락받을 수 있었고.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이미 출근 중인 허훈과 신서영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할 겸 매일 출근하고 싶다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까지 출근하니 사무실이 미어터질 지경이다.
아무래도 사무실 이사를 진지하게 고려해봐야겠다.
어쨌든 그렇게 2개월의 시간이 더 흐르고······.
입김이 폴폴 나는 계절이 왔다.
사무실 창밖으론 새하얀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우와! 드디어!!”
사무실에 앉아있던 신서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까지 질러서 깜짝 놀랐다.
“응?! 무슨 일입니까?!”
허훈이 입가를 쓱쓱 닦으며 맹한 눈으로 묻는 걸 보니 아마도 졸았나 보다.
침까지 흘리면서.
“다 썼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나리오 완성된 거예요?”
신서영은 며칠 밤을 지새운 몰골이었는데 피부만은 빛이 나고 있었다.
역시 피부 좋은 건 타고나야 한다더니만.
그녀는 밖에 내리는 눈과 같은 피부를 자랑하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라비안필름의 두 번째 제작 작품의 시나리오가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요. 대표님.”
나는 그녀의 노트북 안에 있던 시나리오를 한시라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 프린터기로 인쇄를 걸어놓고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제가 트리트먼트는 1, 2부로 나눠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셨죠.”
“시나리오도 그렇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영화도 1, 2편으로 나눠서 제작하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응?
분명 내가 기억하는 전생에서 ‘망자와 함께’는 단편으로 나왔었다.
시나리오를 읽어봐야 정확하겠지만, 1, 2부로 나누어져 있다고는 해도 트리트먼트의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망자와 함께’가 맞다.
전생에서도 제작사에 이런 요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가.
“작가님은 그렇게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네. 이게 애초에 1, 2부로 구상한 거라 제 눈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따로 진행된다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분명 단편으로만 제작해도 성공은 보장되어 있었다.
“우선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저도 작가님과 같은 생각이 들면 차라리 동시 제작이 낫겠네요.”
“동시 제작이요?”
“예. 속편 제작은 대한민국에서 너무 어려워요. 우선 배우들 스케줄 조율하는 것부터가 힘듭니다. 애초에 1편 계약할 때 묶어두면 모를까. 그런데 그럴 거면 그냥 한방에 빡! 고생하는 게 낫죠.”
마침 인쇄가 완료된 프린터기로 향해 A4용지 더미를 들었다.
“이거 몇 부 더 뽑아서 사무실 인원 다 읽어본 다음에 회의해서 결정하시죠.”
*
[필름코팅]
업계 1위 회사라고 하기에 그곳은 다소 검소한 분위기였다.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쭈욱 늘어서 있는 다닥다닥 붙은 책상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듯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채로.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 탐색하고 있자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이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멀쩡한 용모의 여성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작업 의뢰를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영화삽니다.”
여성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런 사람 많이 왔다 간다는 뉘앙스로 물었다.
“약속하고 오셨어요?”
“아니요. 인터넷에 내선 번호가 나와 있지 않더라고요.”
짧은 순간 ‘아차, 수정한다는 걸 깜박했구나.’ 중얼거리더니 나를 무슨 회의실 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잠시 후.
회의실로 직위가 꽤 높아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의뢰하러 오셨다고요?”
“예. 영화 제작하려고 하는데 CG가 많이 들어갈 것 같아서요.”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아, 그래요? 얼마나 예상하고 계십니까?”
많이 들어가 봤자지. 하는 표정이다.
“전체 장면의 80%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는 다소 놀랐는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무슨 영화인데 그렇게 많이 들어갑니까? 우주 영화라도 찍으시는 겁니까?”
사실 ‘망자와 함께’는 우주 영화보다 더 심하다.
본 적도 없는 사후세계를 구현하는 거였으니.
“아니요. 사후세계 이야기이고-.”
“사후세계요?!”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화들짝 놀라네.
“예. 그리고 1, 2편 동시 제작할 예정입니다.”
“동시 제작이요? 아니, 속편은 본편이 흥행해도 만들어질까 말깐데, 그걸 동시에 촬영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정확하게 알고 있네.
“예. 맞습니다. 의뢰 가능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