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필요 없는데
“어? 오늘 현장에 커피차랑 분식차 왔네요?”
오늘은 나경과 함께 현장으로 향한 날이었다.
언제 왔는지 정 PD가 대뜸 말을 걸었다.
“아람 씨 팬클럽에서 보냈어요. 이거 말고도 스탭 수별로 선물까지 포장해서 가지고 왔다니까요?”
“선물이요?”
“예. 보실래요?”
정 PD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상자를 들어 보이더니 뚜껑을 열었다.
“보시면 현장 스태프들 더우니까 미니 선풍기랑 벌레 퇴치 밴드, 쿨 토시, 데오드란트까지 들어 있어요.”
“오, 여름 현장 종합세트 같은 거네요?”
“예예. 대표님도 하나 가져다드릴까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저는 현장 계속 나오는 것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정 PD는 내 말을 듣더니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그럼 시원한 아이스커피라도 한잔하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그는 괜찮다는, 나와 나경에게 꾸역꾸역 메뉴를 받아 가더니 커피차로 달려갔다.
“흐음, PD님 수상한데요.”
나경은 장난스럽게 정 PD의 모습을 지켜봤다.
“뭐 가요?”
“현장에서 마니또 하잖아요. PD님이 대표님 마니또 아니에요?”
아, 잊고 있었다.
그런 걸 뽑긴 했었지.
내가 그때 뽑은 사람은······.
커피차 옆에서 정 PD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보배.
가 아닌 그녀의 옆에 있는 매니저 남상훈이었다.
뭘 해줘야 하나.
짧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래. 역시 매니저에게 좋은 일은 그것밖에 없다.
정 PD가 다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나와 나경에서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자, 여기요! 날도 더운데 쭉 들이키세요!”
나경은 음료를 받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PD님! 대표님 마니또 맞죠?!”
“응?”
정 PD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낯빛이었다.
“에유. 아니야. 아니야.”
“수상한데에.”
“당연히 대표님 현장 오시면 내가 챙겨야지! 애들한테 시킬 순 없잖아.”
나경은 현장에 몇 번 나오지도 않았지만, 누구와도 친해지는 기이한 친화력을 보여줬고.
정 PD와는 의외로 성향이 맞는지 저렇게 자주 티격태격하곤 했다.
어쨌든 이 둘은 또 한참을 이야기할 테니 나는 조금 떨어져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신서영과의 계약은 잘 체결됐다.
그녀가 보내준 트리트먼트는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일치했다.
당장 그녀와 ‘각본’으로 명시된 계약을 진행했고, 시나리오를 써본 적 없는 그녀에게 각색 작가를 붙여 같이 작업하는 거로 결정됐다.
연출은 시나리오 작업이 다 끝나면 허훈에게 제안하든 외부에서 데리고 오든 하면 됐고.
신서영은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 날부터 각색 작가와 사무실로 출근 중이었다.
나중에 연출 감독이 정해지면 콘티까지 그녀가 작업하기로 했으니 일석이조이다.
사색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정 PD가 씩씩거리며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게 아니고! 낼모레 떼 씬 있어서! 보조 출연 많이 불러야 한단 말이야!”
아, 그래서 나한테 잘해줬던 거야?
이게 무슨 소리냐면.
보조 출연자 한 명당 인건비가 비싸니 보통 몇십 명은 기본으로 출연하는, 떼 씬에선 제작비가 꽤 많이 투입된다는 소리다.
그 돈은 고스란히 제작사로 청구해야 할 테고,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사람이 나이니 미리 이야기해 둘 모양이었나 보다.
내 기분을 맞춰주면서.
그런데 정 PD는 그런 걸 잘 못 했다.
자신이 편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아양 떨고 그러는 거.
“괜찮으니까 진행하고, 올려주세요. 근데 몇 명이나 불러요?”
“배, 백 명 정도요? 허허.”
좀 많긴 하네.
“알겠습니다. 촬영에 필요한 부분에는 돈 써야죠.”
정 PD는 내게 두어 번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래도 제가 최대한 줄여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PD님 믿으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으면서 하지 마세요.”
그는 감동한 눈빛으로 곧장 제작 실장에게 달려갔다.
아마도 내 허락을 받은 다음 진행하자고 했겠지.
그래도 사람이 영 괜찮다.
그때.
“저기요. 스탭 아저씨.”
아저씨?
분명 알맹이는 40대 초반이니 맞는 말이긴 한데······.
씁쓸하구만.
나를 씁쓸하게 만든 장본인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예?”
“혹시 저희 아람 언니 매니저님 어디 계신 줄 아세요?”
“아람 씨 매니저요?”
뭔가 이상해서 말을 건 여자를 자세히 보니 아마도 아람의 팬클럽 회장쯤 되나 보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요.”
“혹시······. 팬클럽 회장님?”
“아, 네! 맞습니다!”
역시.
현장에 오는 팬클럽 회장들은 독보적으로 풍기는 포스가 있었다.
“그렇구나. 아마 현장에 있을 텐데. 불러드려요?”
팬클럽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너무 감사하죠!”
그녀는 호의적인 내게 그래도 이유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았는지 말을 이었다.
“저희 아람 언니랑 인증샷 찍어서 팬카페에 올려야 하는데 곧 커피차랑 분식차가 마감할 것 같아서요.”
“아아,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현장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잠깐만. 전생에선 그렇게 자주 했었는데······.
다시 팬클럽 회장을 바라봤다.
“회장님. 저 이 영화 제작사 대푠데요.”
“예?! 대표님이요?!”
그녀는 뭔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한 안색이었다.
“아이구! 아이고! 죄송합니다! 너무 젊으셔서 대표님이신 줄도 모르고!!”
“아아, 아니요. 그것 때문이 아니고.”
헤드뱅잉을 멈춘 그녀가 이번엔 마치 한 마리의 시추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팬클럽 회원분들 아르바이트해 보실 생각 없어요? 아람 씨 가까이서 볼 수도 있고, 인원은 한 백 명 정도?”
시추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닥타닥!
“허억! 헉!”
뛰어온 사람은 아람이었는데 급하게 오느라 숨이 찬지 연신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람도 팬 사랑이 어지간히 지극한가 보다.
이렇게 뛰어온 걸 보니.
그런데 그녀는 옆에 있던 팬클럽 회장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후우. 대표님.”
“예?”
“이거요. 저희 팬클럽에서 준비해주신 건데 대표님도 하나 받으셔야죠.”
그녀가 내민 것은 아까 정 PD가 내게 보여 준 것과 똑같은 상자.
“저는 이거 필요 없는-.”
아람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상자를 내 손에 쥐여주고는.
“회장님. 사진 찍어야 하죠? 가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연신 우와! 우와! 거리는 팬클럽 회장을 데리고 가버렸다.
“필요 없는데.”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말을 혼자서라도 끝마치며 상자를 열었는데.
응? 뭔가 이상한데?
상자 안에는 정 PD가 보여준 것과는 확연히 다른 물건들이 들어가 있었다.
USB 선풍기와 쿨 방석, 작은 디퓨저 등등.
이건 다 사무실에서나 쓸 수 있는 물건들이다.
흐음. 티가 나도 너무 난다.
아마도 내 이름을 뽑은 사람은 아람이겠지.
다들 이렇게도 마니또 이벤트에 열심히 참여하다니.
저 멀리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한보배의 매니저 남상훈이 보였다.
나도 뭐라도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 상훈 씨. 이거 보배 씨 가져다드리면 돼요?”
“아아! 대표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바빠 보이시는데 제가 이것만 가져다드릴게요.”
남상훈의 만류에도 한보배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을 가져다줬고.
그 후로도 몇 번을 매니저가 할 일을 몰래 도와주곤 했다.
“어? 대표님이 이걸 왜?”
당연히 한보배는 그때마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하, 그냥요. 상훈 씨 바빠 보이길래.”
그녀가 눈치라도 챌 것 같아 거기서 그만뒀지만.
그날 저녁.
한보배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대표님?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는 건데요. 대표님이 혹시 제 마니또세요?]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그녀였다.
*
나는 아람의 매니저에게 현장에서 만난 팬클럽 회장 연락처를 물어봤고.
연락이 닿은 그녀는 내 제안을 아주 흔쾌히 오케이 했다.
덕분에 우리는 백 명의 보조 출연자 비용을 세이브할 수 있었으며 팬클럽 회장은 촬영 당일 여유 인원까지 데리고 와 성심성의껏 임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역시 아이돌을 캐스팅하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8월 말이 되었고.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짧은 이벤트였던 마니또가 끝이 나면서 현장에는 서로 마니또였던 스태프가 커플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뭐, 나름 재밌는 이벤트였던 것 같다.
또 한우주의 점자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전달할 수 있었고.
<워싱>은 250만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찍으며 극장에서 내려왔다.
이제 여름이 끝나기 전 VOD로 돈을 긁어모을 차례다.
<워싱>이 잘 되기도 했으니 이제 슬슬 고시원을 나갈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예정우에게서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 지금 남양주에 괜찮은 땅 찾은 거 같아.
“오, 그래요?”
-응. 우선 살 수 있는 땅은 이만 평이고, 주변에 뭐가 없어. 그건 괜찮을 것 같은데 조금 걸리는 게 하나 있긴 해.
“뭔데요?”
-혹시 이 땅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봐,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녔거든?
“안 좋은 말이라도 나왔어요?”
-이게 좀 생각하기 나름인데, 자칭 풍수지리학자라는 아저씨가 땅에 대해서 한마디 하더라고.
꼼꼼히도 물어보고 다녔나 보다.
풍수지리학자라니.
-아저씨 하는 말이 이 땅이 음기가 강해서 사람이 살만한 곳은 못 된대.
음기라······.
오히려 잘 됐다.
촬영장이나 녹음실 같은 곳에서 귀신을 보면 대박이 난다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어차피 사람 살 집 지으려고 땅을 사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찍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저는 아주 좋은데요?”
-그래? 나도 뭐 그런 미신을 믿는 건 아니라. 그럼 어떻게, 바로 올래?
“예. 지금 바로 갈게요.”
두 시간 후 나는 남양주에 도착했다.
갈 길이 먼 만큼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아이고. 대표님이라고 해서 내 또래인 줄 알았습니다! 하긴 요즘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예정우와 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중년남성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부동산 하는 소재구라고 합니다.”
시골이라 그런지 부동산 사장님도 친근한 동네 아저씨의 느낌이 강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신바드입니다.”
“자! 그럼 땅부터 보러 갑시다!”
차를 타고 이동한 우리는 넓은 공터 앞에 멈춰 섰다.
포장되지 않은 바닥이어서 부는 바람에 맞춰 흙이 폴폴 날리고 있었다.
만만치 않겠네.
사용하지 않는 땅이었는지 군데군데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은 거의 어린아이의 키와 비슷한 크기였다.
“아예 갈아엎고, 사용해야겠네요.”
소재구가 얼른 대답했다.
“찾으시는 땅들 대부분이 이런 상태일 겁니다. 장점은 원하는 구조대로 건물을 배치하고, 지을 수 있다는 거죠.”
그건 또 맞는 말이다.
나는 예정우에게 조용히 물었다.
“형님. 서류 같은 건 다 꼼꼼히 확인하셨죠?”
그의 끄덕임을 확인하고, 소재구에게 물었다.
“그럼 우선 만 평만 오늘 바로 계약 가능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