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제작자로서의 감
신서영은 손에 쥔 마우스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감이 채 30분도 남지 않았다.
막바지 점검만 하면 되는 상황.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중얼거리며 대사들을 점검하고, 혹시나 있을 오타, 컷 연결 등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늘 분량을 업로드한 뒤에야 그녀는 잔뜩 긴장했던 어깨를 내릴 수 있었다.
“휴우. 됐다.”
그녀는 꿈을 위해 5년째 노력 중이다.
그 꿈은 만화가였다.
만화책을 보며 울고 웃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느새 시대가 변해 웹으로 유통되면서 만화가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직업이 되었다.
성공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아, 배고프다.”
그녀는 주방으로 나가 찬장에서 라면을 꺼낸 뒤 물을 올려놓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부모님의 반대로 성인이 된 후 무작정 집을 나왔고.
성공해서 돌아가겠다고 한 지가 벌써 5년이다.
그러나······.
현재 한 플랫폼에서 무료 연재 중인 그녀에게 수입이 있을 리 만무했고.
월세와 생활비라도 벌어보고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잘 돼야 할 텐데.”
올리고 있는 작품은 ‘망자와 함께’라는 웹툰으로 인간이 죽으면 가게 되는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상했고, 5년간 갈고닦은 실력을 모조리 응축해 놓은 자신의 역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 ‘망자와 함께’가 성공하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온 힘을 다해 그려낸 작품마저 인정받지 못한다는 건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말이니까.
그렇다고 기대를 아예 저버린 건 아니었다.
아직 연재 초반이니 연락이 오려면 기다려-.
“응? 쪽지?”
업로드가 잘 되었나 확인차 플랫폼을 접속했는데 쪽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쪽지는 가끔 팬들이나 플랫폼 담당자, 또는 계약을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아까도 말했다시피 연재 초반인 자신은 어느 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쪽지를 클릭했다.
천천히 쪽지에 적힌 글을 읽어내려가는데.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라비안필름이라고 합니다. 저희 영화사는 최근 개봉한 <워싱>의 수입을 진행하였고, 내년 초 개봉 예정인 <투명한 사랑>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습-.]
그 쪽지는 빽빽한 장문이었다.
끝까지 다 읽은 신서영은 자신의 입이 점점 떠억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양손으로 막았다.
“헙!”
‘아니, 그러니깐 지금 이 영화사가 내 웹툰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거야?!’
*
전생에서 신서영 작가는 조금 늦게, 특이하게 빛을 본 타입이었다.
많은 이가 그 이유로 그녀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림체를 꼽았는데.
어떻게 보면 기괴할 수도 있는 작품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그림체라고만 하기도 힘들었다.
‘망자와 함께’가 빵 뜨면서 그 전 작품들에 대한 평가도 줄을 이었는데 썩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전 작품부터 꾸준히 봐오며 팬이 된 나경의 안목은 대단한 거였다.
여하튼 그렇게 실패만 거듭하던 그녀는 ‘망자와 함께’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잔뜩 꿈에 부푼 채 연재를 시작했지만, 웹툰 ‘망자와 함께’는 결국 대중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무료 연재 란에서 ‘망자와 함께’를 돌연 내려버렸다.
나중에서야 밝혀졌는데 당시 한 영화사의 연락을 받고, 홧김에 계약한 뒤 영화화를 진행해버렸다고 한다.
보통 웹툰으로 먼저 인기를 얻은 뒤 영화화하는 순서를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특이한 케이스였다.
영화에 잘 어울리도록 스토리를 각색한 ‘망자와 함께’는 초대박을 쳤고.
신서영은 그 인기를 업어 꿈에 그리던 정식 연재까지 시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웹툰의 성공은 보장된 순서였다.
이러했으니 나는 그 작품을 보자마자 발 빠르게 쪽지부터 보냈다.
아직 연락이 오진 않았으나 전생에서도 영화사와 계약을 했던 그녀였으니 연락은 올 것이다.
그보다 그녀의 작품을 영화화하려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이 있었다.
바로 실력 있는 CG 업체.
이게 사후세계를 구현해야 하는 영화다 보니 전체 장면의 80%가 CG였다.
CG라는 건 인력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서 하는 작업이었기에 돈이 많이 드는 분야였고.
또 업체가 무슨 장면까지 구현해봤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달을 가본 사람이랑 안 가본 사람이 우주선을 만드는 기술은 천지 차이일 테니.
흠, 전생에서나 지금이나 CG로 가장 유명한 업체는 딱 하나였다.
‘필름 코팅’
그리고 이곳은.
전생에서 나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던 이 과장이 한때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었다고.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
“여보세요?”
-어어! 대표님! 나 지금 파주야!
“파주는 괜찮은 곳 좀 있어요?”
-뭐, 돌아보고는 있는데 그만한 땅은 완전 허허벌판밖에 없는데, 괜찮은 거야?
세트장은 차라리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낫다.
“예. 나중에 자리 좀 잡으면 그 주변으로 넓힐 수도 있으니까 고려해서 봐주세요.”
-응! 알겠어!
이렇게 더운 한여름에 땅을 보러 다니는 게 예삿일은 아닐 텐데 예정우의 목소리는 어딘가 밝아 보였다.
아무래도 사업확장에 기분이 좋은 거겠지.
세트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감독의 머릿속 공간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세트장.
경찰서, 병원, 법원, 장례식장 등 실제 로케이션 대여가 힘든 장소로 꾸며놓는 세트장.
물론 전자에 경우 천장에 조명 장비 등을 달 수 있게 바 설치나 동시녹음으로 방음에 신경 쓰는 등 만만치 않은 작업을 하긴 해야 한다.
어쨌든 두 곳 다 초기 자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지어놓기만 하면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
영화는 물론 드라마, 광고팀까지 분야를 뻗칠 수 있었다.
<워싱>이 200만을 넘는다고 치면, 영화비가 8,000원인 요즘 시세로 대충 계산해도 160억 원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거기에 3%의 영화 발전 기금, 10%의 부가가치세, YJ E&M이 가져가는 50% 등등을 빼면 대략 50억 정도가 아라비안필름으로 들어오는 셈이다.
<투명한 사랑>이 개봉하면 수익은 또 발생할 테니 땅을 먼저 사놓은 뒤 세트장 건설을 시작할 예정이었고.
자본이 더 모이면 범위를 점점 더 넓혀 갈 생각이었다.
이쪽은 이렇게 계획하고 있으면 될 것 같고.
우선은 가장 중요한 신서영 쪽에서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그때.
지잉-.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왔길래 재빨리 받았다.
“예. 신바드 대표입니다.”
-아, 안녕하세요오······.
응? 뭐가 이렇게 기어들어가.
“예. 말씀하세요.”
-저기, 신서영인데요. 쪽지 주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신서영 작가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서영의 전화가 왔다.
*
끼익-.
문 열리는 소리조차 소심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시, 실례합니다.”
사무실로 들어온 건 뽀얀 피부의 신서영 작가였다.
벌떡 일어나 명함을 건넸는데.
“아! 작가님. 오셨어요. 반갑습니다. 저는 신바드 대표라고 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
아차, 나는 신서영을 처음 본 거지.
전생에서 본 얼굴이 익숙해 신나게 아는 척을 해버렸다.
어쩔 수 없지.
잘 넘어가면 된다.
“신서영 작가님 맞으시죠? 오늘 사무실 오실 분이 작가님밖에 없으셔서 들어오시자마자 알았습니다. 하하.”
그녀는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아, 네에.”
“이쪽으로 앉으시죠.”
칸막이는 없었지만, 사무실 공식 회의 장소였던 둥그런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하자 나경이 다가왔다.
“자, 작가님! 영광! 아, 아니! 차는 뭐로 드릴까요?”
그녀가 웹툰을 올린 시점부터 쭉 작품을 봐왔다고 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지.
그런데 나경의 상태는 좀 심했다.
손까지 덜덜 떠는 중이다.
신서영이 또 뭔가를 오해할까 싶어 재빨리 나경을 소개했다.
“하하, 이 친구가 작가님 작품을 찾아서 제게 보여준 친구입니다.”
“제 작품을요?”
믿기지 않는지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예. 작가님의 팬이라고 하더니 영화로 만들어 볼 만한 재밌는 웹툰까지 소개해주더라고요.”
“정말요?”
그렇게도 풀리지 않던 작가 생활이었으니 팬을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이번엔 나경이 직접 나서서 자신이 얼마나 그녀의 팬인지를 어필했다.
“네! 제가 거기 무료 연재 훑어보는 게 취미거든요. 5년 전에 제일 처음 올리셨죠? 첫 작품 제목이 아마 ‘기괴한 오디션’이었고, 그다음이 ‘트라우마’ 맞죠?”
신서영은 잔뜩 상기된 눈빛이었다.
“어머! 그걸 다 보셨어요?!”
“네!! 제가 정식 연재로 못 올라가셔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매 화마다 댓글도 달았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아! 설마?! 그분이세요?”
둘은 환상의 호흡이었다.
“귀차니늘보!”
“귀차니늘보!!”
이구동성 게임 잘하네.
둘은 손을 맞붙잡고, 팔짝팔짝 뛰더니 한번 시작한 대화를 멈출 줄 몰랐다.
신서영에게 팬이란 전설적인 존재였을 테니 그 시간을 좀 더 만끽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자 신서영은 멀뚱멀뚱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흐흠!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팬분을 처음 만나봐서.”
그러자 나경도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대표님! 죄송합니다! 작가님 혹시 차는 어떤 걸로?”
“저는 물이면 됩니다!”
나경이 탕비실 쪽으로 향하자 신서영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제가 보낸 쪽지의 내용이 궁금하셔서 오신 걸 테니 먼저 그 부분부터 대화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마치 팬은 팬이고, 계약은 계약이다. 라는 똑 부러진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아직 초반이어서 여쭤보는 건데, ‘망자와 함께’ 스토리 구상은 어디까지 되어 있습니까?”
전생에서 ‘망자와 함께’가 개봉까지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은 걸 보면 스토리 구상은 이미 끝나있을 것이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2부 완결로 전체적인 스토리 트리트먼트는 작성해둔 상태입니다.”
“그럼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확인하고, 계약을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내가 아는 스토리와 얼추 비슷한지도 확인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제시해주신 조건이 괜찮다고 판단되면 오늘 집에 가서 보내드리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
“보내주신 트리트먼트가 괜찮다면 2차 저작물 계약을 저희와 진행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약금은 우선 이천만 원, 그리고 영화 개봉 후 수익에 대해서는 인센티브로 정산받는 시스템을 도입해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지금은 웹툰의 영화화 자체가 막 시작되던 시대였다.
나중에야 웹툰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금액이 억 단위를 호가했으나 지금은 평균이 일, 이천이다.
결정적으로 개봉 후 수익이 작가에게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성공하지도 않은 웹툰에 업계 최고 금액을 제시한 것도, 모자라 영화가 잘 되면 잘 되는 만큼 수익을 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던 그녀는 인상이 잠시 찌푸려지더니 의심 섞인 말을 내뱉었다.
“여기 혹시 유령회사 같은 곳 아니죠?”
그녀로선 그만큼 믿기 힘든 제안이라는 거다.
“예. 원하신다면 <투명한 사랑> 촬영 현장이라도-.”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괜찮습니다.”
신서영은 침착하려는 듯 나경이 방금 조심스럽게 놓고 간 냉수를 들이켰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세요.”
“제 어디를 보고 그런 계약을 하신다는 거예요?”
“당연히 작가님이 쓰신 이야기를 보고, 드리는 말씀이죠?”
“그러니까요.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초반 이야기를 보고 어떻게 계약까지 하시냐고요.”
이 이야기는 무조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저희 직원의 안목을 믿기도 하고, 제작자로서의 감이 왔습니다.”
내 말을 신중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방긋 웃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현실이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을 때가 있기도 하죠. 그럼 진행은 어떤 식으로 하실 건가요?”
그녀와의 인연이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