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할 거면 제대로
“지연 씨. 현장에서 회차 정산서 메일로 보냈을 테니까 검토 좀 부탁해요.”
“네. 대표님.”
“아, 그리고 나경 씨. 보내준 리스트 확인했는데 괜찮은 게 없네요. 조금 더 찾아봐 줄래요?”
“네!!”
박지연과 나경이 출근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둘을 꽤 괜찮은 인재라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을 예견한 건 아니었다.
이력서를 보낸 박지연은 정식으로 면접을 진행했는데.
마주한 그녀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화분 엔터는 나온 거예요?
-예. 제 발로 나왔어요. 양 대표님이 아무리 덮어 주신다고 해도 회사 내에서 이야기가 도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요.
-아니요. 이 정도 각오도 없이 드린 거 아닙니다. 대신 대표님.
-예?
-제가 그때 드린 거 보셨죠? 그만큼 꼼꼼하게 정리하기도 힘듭니다. 또 회계 경력 충분하고, 급여도 맞춰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저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순간 저돌적인 태도로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과분할 정도의 경력과 능력, 열정까지 있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부터 출근하시죠.
나경은······.
-사실 그때 말씀드렸던, 취업하고 싶은 제작사가 이곳이었습니다!
오디션장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긴 했었지.
-그래서 사람 뽑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때 조금 무서웠다.
그녀의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으니.
-저 나름 엘리트 출신입니다! 허훈 그 자식-. 아, 아니. 죄송합니다. 허훈 감독님이랑 작품 계속하실 거죠? 감독님 컨트롤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뽑아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뭐, 그녀도 나름 눈여겨보고 있었으니.
오히려 나로선 능력 있는 둘을 우리 회사에 묶어두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사치였다.
나를 믿고 와준 소중한 이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할 수 있도록 회사를 키워나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맞았다.
오랜만에 사무실은 북적거렸다.
박지연과 나경의 출근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명한 사랑>이 오늘 휴차라 더 꽉 찬 느낌이다.
“감독님. 도건우 씨 투명인간 확정 맞죠?”
“예! 맞습니다. 대표님!”
도건우의 우정 출연을 확정하고, 그의 역할은 단편에서 내가 맡았던 인간화한 투명 인간으로 결정됐다.
나는 허훈의 대답을 듣고, 사무실에 있던 모두에게 알렸다.
“이거 절대 외부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극장에서 터뜨릴 거예요. 아시죠? 서프라이즈?”
그러자 그들은 합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대답했다.
“넵!!”
어우. 귀청이야.
놀랬네.
최근 사무실 직원부터 현장 스태프까지.
일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촬영이든 사무실 출근이든 업무시간이 칼같이 제한되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을 무조건 시간 안에 끝내려고 쉬는 시간까지 반납하는 기이한 현상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처리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히 뒤따라오는 절차였고.
아, 마침 시간이 됐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퇴근합시다.”
“네엡!!!”
아까보다 더 큰 함성이 들려오더니.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하나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나경은 퇴근하라는 말에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핸드폰만 유심히 보고 있는 것 아닌가.
“나경 씨. 퇴근 안 해요?”
“아, 그게······. 저는 오늘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아서요. 조금 더 하고 갈게요.”
내가 그녀에게 지시한 일은.
웹툰이나 소설 등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문화콘텐츠 중에서 영화로 기획해 볼 만한 것들을 찾아 정리해달라는 거였다.
슬슬 다음 제작 작품도 정해야 했기에.
“예? 그 일에 끝이 어딨습니까. 내일 업무시간에 하면 되니까 얼른 퇴근하세요.”
“그래도······.”
당연히 내가 지시한 일은 장기적으로 끌고 가야 할 일이었다.
“제가 나경 씨한테 맡긴 일은 거창한 기획 같은 게 아니에요. 예를 들면 1차 면접 같은 거죠. 작품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우리는 그런 눈이 없잖아요? 천천히 하자고요. 천천히.”
보통의 열정 넘치는 사회초년생들이 나중에는 많이들 지친다.
“직장에서의 체력은 안배해야 해요.”
주눅 들어 보이던 그녀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음······. 넵! 알겠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주섬주섬 짐을 싸며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는지 내게 대뜸 물었다.
“그런데요. 대표님. 제가 요즘 정말 재밌게 보고 있는 웹툰이 하나 있는데 사실 영화로 만들기엔 현실성이 없거든요?”
“무슨 웹툰인데요?”
그녀가 내게 핸드폰을 내밀며 덧붙였다.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작가님이 신작을 내셨더라구요. 그림체가 조금 유치하긴 해요. 아직 초반이고, 정식 연재도 아닌데 너무너무 재밌어서 영화로 만들면 대박이겠다! 했어요. 그냥 저만의 생각이니까 한번 보기만-. 응? 대표님??”
나는 그녀의 말이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 웹툰은.
바로 전생에서 흥행 돌풍을 뛰어넘어 하나의 신드롬이 된 영화의 원작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나경을 빤히 쳐다봤다.
허. 이거, 참.
작품을 한눈에 알아보는 경우가 있기도 하구나.
*
“어우, 저녁인데도 이렇게 날씨가 후덥지근하냐.”
“열대야라잖아요. 열대야.”
나는 더운 날씨에 투덜대는 예정우와 현장에 나와 있었다.
오늘은 나이트(저녁) 촬영으로 도건우가 출연하는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돈도 안 받고 출연하는 거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케어라도 할 겸 온 거였는데 도건우는 우리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까칠할 줄 알았던 그는 자신의 차례가 아니면 그저 모니터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촬영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역시 촬영 현장이 조용히 지나갈 리 없었다.
“연출팀 막내! 라인 정리 제대로 안 할래?! 넘어질 뻔했잖아!”
“연출 막내! 슬레이트 치고 빨리 빠져야지!”
“연막!! 가이다마(대역) 위치가 거기야? 연출팀이 배우가 어디 서는지도 몰라?!”
연출팀 막내 고진주를 ‘연막’으로 지칭하며 괴롭히던 사람은 그의 아버지인 고덕현이었다.
아니, 고새 무슨 일 있었나?
이번 생에 딸 바보 고덕현을 볼 수 있긴 한 걸까.
“예! 죄송합니다!”
고진주는 바짝 긴장한 채로 후다닥 카메라 앞에 섰는데, 요 며칠 고생을 제대로 했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장비를 정리 중이던 촬영팀에게 슬쩍 가서 물었다.
“요즘도 고덕현 감독님 까칠하세요?”
“요즘요? 아유.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지셨죠.”
그래. 이런 전개를 예상하고 있었다.
촬영 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했으니 스태프들은 항상 긴장을 유지한 채 부지런히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고덕현도 스태프들에게 뭐라고 할 건덕지가 줄어들었을 텐데.
내가 이상한 표정으로 고진주 쪽을 자꾸 쳐다보고 있자 촬영팀이 덧붙였다.
“근데 이상하게 진주한테는 엄하시더라고요. 애초에 뭘 잘못 보였나. 뒤끝은 없으셔서 그런 걸로 뭐라고 하실 분이 아니시긴 한데.”
음, 그렇다면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감독님.”
“아! 대표님! 현장엔 어쩐 일로? 아, 도 배우 때문에 오셨구나.”
세팅이 길어져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고덕현에게 다가갔다.
“예. 현장 편집본은 넘어올 때마다 감탄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읽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느낌이 좋더라고요.”
“아이고, 그게 뭐 저 혼자 하는 겁니까. 표준 근로 때문인지, 이렇게 맘에 드는 현장 분위기는 또 처음입니다!”
“다 감독님이 잘 이끌어주셔서 그렇죠.”
주거니 받거니 칭찬 몇 마디를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요새 집안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는 단번에 내 물음에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아까는 왜?’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대답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어중간하게 하는 건 못 보는 타입이라서요.”
현장에서 고덕현은 고진주를 자신의 딸이 아닌 동료로 대하고 있던 것이다.
좋은 현상이다.
지금은 힘들어도 고진주가 성장하는 속도는 어마무시할 테니까.
시나리오 북이 ‘독특한 감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그녀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는 나로서 상상하기도 힘든 즐거운 일이었다.
*
“대표님도 하나 뽑으시죠!”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중에 옆을 보니 제작팀 막내가 희한한 걸 들고 있었다.
“응? 이게 뭡니까?”
그것은 안이 보이지 않는 네모난 아크릴 통이었는데, 윗면엔 사람 손이 들어갈 정도 크기의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희 현장에서 마니또 하기로 했거든요.”
“마니또요?”
정 PD가 얼른 와서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현장 분위기도 좋긴 한데, 확실히 다른 팀과는 친해지기 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체 스탭 이름 넣고, 한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오, 좋은 생각인데요? 재밌겠어요. 근데 저는 현장도 안 나가는데 뽑아요?”
“그거야 뽑은 사람 운인 거죠. 일주일 동안 할 거니까 중간에 현장 한번 오셔요. 대표님 뽑은 사람이 목놓아 기다릴 수도 있잖아요?”
“하하. 혹시 배우들도 해요?”
“예. 배우는 현장 상주하는 주연들만 넣었습니다.”
정 PD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전화가 울렸다.
“아이구. 전화가 왔네. 그럼 대표님도 꼭 뽑으시고, 마니또한테 잘해주셔야 합니다!”
그가 사라진 뒤로 계속 통을 들고 있던 제작팀 막내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널브러져 있는 종이 중 대충 아무거나 골라 뽑자 앳된 얼굴의 제작팀 막내는 혹시 싶었는지.
“대표님. 모르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마니또는 상대방이 알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마니또에 대한 설명까지 깔끔하게 해주었다.
“그럼요. 알고 있어요. 고생이 많아요.”
그는 방긋 웃더니 사무실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통을 들고 가버렸다.
접힌 종이를 펴보니······.
응? 이 사람까지 넣었네?
종이에 적힌 인물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마니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종이를 다시 접어 지갑에 넣어두고.
옆에서 서류 정리를 하던 예정우를 불렀다.
“형님. 저희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좀 있습니다.”
“응? 무슨 일?”
“분야를 좀 넓히려고요.”
“분야?”
<워싱>이 개봉한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현재 150만을 넘긴 상태이니 200만은 순탄하게 넘을 예정이었다.
애초에 <워싱>을 1,000만 원이란 값싼 금액에 구매하기도 했고.
극장 수입에 관해선 태국 현지 제작사와 나누지도 않는다.
배급사 YJ E&M이 많이 가져가긴 하지만, 극장에서 내린 후 VOD 서비스까지 시작하면 정산금은 아주아주 짭짤할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묵혀두는 것보다 무언가 시작하는 게 낫지.
“예. 당분간 땅 좀 보러 경기도 돌아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땅 사려고? 어느 정도 크기로 볼 건데? 혹시 투기라도 하려는 건 아니지?”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그런 걸 왜 합니까. 최소 만 평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만 평?? 돈은 있고? 아니, 그보다 그 땅으로 도대체 뭘 하려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가는 곳이 어딥니까?”
예정우는 질문 폭탄을 던지다 오히려 자신이 되돌려 받자 당황했다.
“찍을 때마다 가는 곳?”
무슨 영화를 찍든 꼭 필요한 장소가 있다.
그곳을 바로.
“예. 세트 한번 지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