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36화 (36/140)

#36화. 빛을 발할 겁니다

<워싱>의 100만 돌파 소식에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게 아직 개봉 초반이었고.

입소문을 타고 있어 더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

기다리던 천상현의 전화가 왔다.

나는 그가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바로 약속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우리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예. 잘 지냈습니다. 연락을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주셨으니 됐죠.”

그래도 그는 미안했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3번째 앨범을 준비 중이었거든요. 근데 접었습니다. 우선 먹고는 살아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천상현은 자신이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의 꿈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

“그러셨군요. 그래도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보다······. 대표님은 당연히 <워싱> 예고편 보셨겠죠?”

아, 그 팝콘 파티.

사실 오늘 자리에 나오면서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꺼내주다니.

“예. 봤죠. <워싱> 흥행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불쾌함을 표시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런데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도움 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인터넷에서 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습니다.”

무명 가수 생활이 길어 대중의 관심에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다행이네.

“제가 저희 영화 음악 감독으로 더 주목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천상현은 설마 하는 눈초리였으나 미래를 알고 있어요. 할 수도 없으니 대충 넘어갔다.

“의뢰할 영화 주제는 투명 인간과의 사랑인데 전체적인 톤은 다크하지만, 아름답고, 황홀한 느낌으로 부분부분 포인트를 줄 겁니다.”

내가 말해놓고도 애매한 설명이었으나 천상현은 메모까지 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재는 받아들이는 것도 남다른 건가.

“촬영은 10월 초에 끝납니다. 그전에 시나리오랑 콘티 보면서 구상하시다가 편집본 나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작업해주시면 됩니다. 기한은 3달 드리겠습니다.”

“10월 초요? 그럼 아직은 꽤 많이 남았네요?”

지금이 7월 중순이니 약 두 달 반 정도 남은 셈이다.

“예. 시나리오랑 콘티는.”

가방에서 두툼한 A4 묶음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가지고 왔으니 쭉 읽어보시면 되고요.”

내가 그것들을 내밀자 그는 갑자기 입을 달싹였다.

돈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다.

“페이는 업계 평균으로 맞춰드릴게요.”

아무리 천상현이라고 해도 아직 그는 영화 음악의 대가가 아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대신 형편이 어려운 줄 뻔히 아니까.

“오늘 계약서 사인하시면 내일 바로 계약금 50% 먼저 보내드릴게요.”

이 정도는 해줘야겠다.

그럼 그의 숨통이 조금이라도 트이겠지.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예상대로 천상현은 내 손을 붙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럼 음악 감독으로서의 설명은 대충 끝났으니 이제 한우주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어떤 걸······?”

“아이 한 명을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예? 아이를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빛이다.

“예. 작곡을 과외 형식으로 가르쳐주시면 됩니다. 물론 이 부분 페이는 따로 지불하는 걸로 하고요.”

“아······. 이번 제안은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왠지 이걸 들으면 더 당황할 것 같긴 한데.

“제 지인의 동생인데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중학생 아이입니다.”

역시 천상현은 또 한 번 놀랐다.

“예?!”

“근데 이 아이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음악으로 배출해내요. 아무래도 제가 봤을 땐 청각 쪽 재능이 많이 발달한 것 같습니다.”

이제 천상현은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입을 떠억 벌리고만 있었다.

“그 재능은 분명 영화 음악에서도 빛을 발할 겁니다.”

*

사무실로 도착해 천상현이 사인한 계약서를 파일철에 보관하고, 계약금을 입금했다.

그는 내 두 번째 제안에는 우선 아이를 먼저 볼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오케이 했다.

시각 장애인에게 가르치는 작곡이라······.

천상현이 어렵다고 느낄 만하다.

그런데 그 둘은 천재와 천재의 만남이지 않은가.

분명 통하는 게 있을 것이다.

사무실로 걸어오는 길에 바로 한보배에게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고.

며칠 뒤 근처 작업실을 대여해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자, 어디 보자.”

<투명한 사랑> 촬영으로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메일함을 확인했다.

2주 전 올린 구인 글에 하나, 둘 이력서가 도착하고 있었다.

면접도 꾸준히 보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아직 글을 못 내렸다.

오늘은 괜찮은 사람의 이력서가 와 있으려나.

5개의 이메일이 와 있길래 첫 번째부터 클릭했다.

첨부파일에 있던 이력서를 클릭하자 어딘가 낯설지 않은 여자가 화면에 띄워졌다.

응? 익숙한 이름과 얼굴인데?

[박지연]

경력란을 보려고, 스크롤을 조금 내렸는데.

역시 아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왜?

우리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지?

그녀는 화분 엔터 비리를 정리해 내게 건네준 그 박지연이었다.

놀란 가슴을 잠시 가라앉히고, 생각을 좀 해보려는데.

지잉-.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나경이다.

“여보세요?”

-대표님! 바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들뜬 듯한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있잖아요! 대표님!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폼이 뭔가 이상하다.

“예?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요?”

-그게 아니고, 음, 아니다. 맞아요! 부탁!

“뭔데요?”

-잡서울에 글 올리셨던데! 맞죠?

“아아, 그거요. 예. 안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혹시 추천할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녀는 반장선거에라도 나간 어린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저를 추천합니다!!

허, 오늘 무슨 날인가?

*

몇 번의 밤이 지나고.

오늘 하루 대여한 홍대 근처 작업실로 향했다.

오늘은 천상현이 한우주를 테스트(?)하는 날이었다.

한우주가 짧더라도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피아노와 녹음할 수 있는 기계가 있는 곳으로 대여했다.

셋을 이곳으로 불렀고.

며칠 전만 해도 관련성이라곤 전혀 없던 우리는 그곳에 둘러앉았다.

“안녕하세요.”

한우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고.

천상현은 그런 아이의 인사를 자상하게 받았다.

“아, 네가 우주구나. 만나서 반가워. 형은 천상현이라고 해. 편하게 상현이 형이라고 부르면 돼.”

“네에.”

혹시라도 일에 관해선 고덕현처럼 괴팍한 성격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은근 상냥한 스타일이다.

한우주를 잘 가르쳐 줄 수 있겠다.

그때 한보배가 내게 물었다.

“근데 대표님. 저번에 이야기하신 ‘방법’이란 거, 지금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앞을 못 보는 우주가 어떻게 영상을 이해하며 그 분위기에 맞는 음악까지 작곡하냐는 뜻이다.

“궁금한 걸 얼마나 꾹 참았는지 몰라요. 우주도 궁금해하구요.”

음, 그렇다면 말을 해줘야지.

“제가 생각한 우주에게 이미지를 알려주는 방법은······.”

내 말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기대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없습니다.”

생각해놨던 걸 바깥으로 꺼냈다.

“네? 없다구요?”

당황한 한보배의 물음에 내 생각을 설명했다.

“우선 시나리오는 점자 번역을 맡겨놨습니다. 아마도 한 달 정도 더 걸릴 것 같으니 그동안 천 감독님이 작곡부터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기본적인 것 위주로요. 물론 우주가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하면요.

그리고 점자 시나리오가 도착하면 우주는 그걸 읽습니다. 우주야, 할 수 있겠어?”

“네. 누나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는데 재밌을 것 같아요.”

한우주가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럼 우주는 시나리오를 보고, 떠오르는 음악을 대략적으로만 생각해보는 거죠. 그때는 작곡을 배웠으니 메모해둘 수 있을 거예요.”

한보배가 흥미로운지 재촉했다.

“그다음은요?”

“편집본을 듣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들어가지 않은 오리지널 편집본의 소리를요. 녹음된 대사와 소리를 들으면 우주 머릿속에는 이미지로 떠오를 거예요. 그럼 굳이 우리가 뭘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주 혼자서 하는 거죠.”

설명이 끝나자 천상현은 조용히 일어나더니 작업실 밖으로 나를 잠시 불렀다.

“대표님. 잠깐 이야기 좀.”

아마도 한우주 앞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나오자마자 천상현은 봇물 터지듯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런 반응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는 더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어린애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좌절감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중간하게 있는 재능으로 크게 좌절하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어요. 가뜩이나 우주는 장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천상현은 한우주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테스트라도 한번 해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그때도 생각이 똑같으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사서 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천상현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테스트를 진행했다.

천상현은 한우주에게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자상한 톤으로 이야기했다.

“그럼 우주야. 내가 장면을 설명해줄 테니까 떠오르는 느낌을 피아노로 쳐봐. 긴장할 필요 없고, 그냥 평소처럼 하면 돼.”

“네에.”

한우주가 피아노 앞에 앉자 천상현은 어떤 장면의 묘사를 시작했다.

“오늘처럼 더운 날씨야. 너는 시골 오두막에 앉아있어. 오두막 옆 큰 나무에 붙은 매미는 맴맴 울고, 눈앞으로는 초록의 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너의 손에는 조각난 수박 한 덩이가 들려있지.”

그도 같이 상상했는지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는 말을 이었다.

“자,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옮겨봐.”

한우주가 곧바로 피아노 위에 손을 얹었다.

아이가 치는 첫 음계는 청량한 소리가 되어 귀를 파고들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 청량함은 하나둘 모여 하나의 음악으로 변하더니 작업실은 금세 한여름의 오두막이 되었다.

한우주는 흠뻑 빠져들어 멈추지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진다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려나.

우리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우주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감상하던 우리는······.

“저, 끝났는데요.”

“응?”

피아노 위 손가락이 멈춘 줄도 모르고, 감정에 빠져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천상현에게 물었다.

“어떠셨어요?”

천상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와, 와······.”

동생이 만들어낸 음악을 직접 듣는 게 처음인 한보배의 반응도 엇비슷했다.

“대표님. 제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진짜로 너무 좋아요. 저 팔불출 아닌 거죠? 그렇죠? 그리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첫사랑이 생각나네요.”

음악이란 그 사람의 추억을 꺼내기도 한다.

“그렇네요. 저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피아노 앞의 아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겠지만,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피아노를 그렇게 괴물처럼 쳐놓고서 쑥스러워하는 얼굴은 마냥 아이다.

천상현은 마침내 정신을 차렸는지 내게 물었다.

“대표님.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를 정말 제가 가르쳐도 될까요?”

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으리라.

이런 천재를 자신이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이 잘못 가르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한 이유도 궁금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를 믿는다.

한우주를 가르치는 일은 천상현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물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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