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35화 (35/140)

#35화.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

<워싱>의 성장세는 무서웠다.

기록은 깨라고 있다는 듯이 역대 한국에서 개봉한 공포 영화 순위를 연일 갈아치웠다.

특히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한 플랫폼에 평점을 남기며 한 마디씩 적는 게 유행처럼 번질 정도였다.

[8.5 / 예고편만큼이나 신선했습니다.]

[9.0 / 팝콘 눈이 내려와~!!]

[10.0 / 오늘 여의도에서 팝콘 뿌린 새끼! 진짜 잡히면 뒤진다!!]

[9.5 / 그 팝콘 저도 맞았습니다.]

[9.0 / 보지 마세요. 병원비가 더 들어갈 듯. 정신병원 추천!]

[9.5 / 아니, 홍보 담당자 누구임. 포스터는 왜 저렇게 정신 나갈 듯이 만들어 놨어.]

[8.5 / 역시 심야 영화 보고 난 뒤에는 술이지! 개 뻥이고, 맨정신에 못 잘 것 같아서 먹으러 왔다.]

[10.0 / 여러분 윗분들 다 거짓말이에요. 하나도 안 무서움. 그래서 엄마, 집에 언제 와?]

그렇게 <워싱>은 영화 흥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고진주가 사무실로 출근했다.

연출팀 막내이다 보니 크랭크 인 직전 투입돼 오자마자 익혀야 할 업무는 태산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와 이렇다 할 몇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연출팀에게 끌려다니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또 <워싱>이 흥행을 확정하면서 슬슬 아라비안필름의 직원도 더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명한 사랑>의 촬영이 시작되면 다음 영화도 슬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또 영화제 출품과 필름마켓 방문으로 해외에 나가는 일도 많이 생길 테고.

무엇보다 세금이 제일 무섭다.

법은 철저하게 지킬 거지만, 무지하게 더 낼 생각은 없다.

일 잘하는 회계랑 예정우처럼 전반적인 업무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곧바로 구인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괜찮은 사람이 있겠지.

촬영 전 마지막 일주일은 정말 바쁘게 지나갔다.

고사도 지내고, 초반 촬영 분량의 컨디션도 체크하며 변수를 최대한 걸러냈다.

점점 사무실 사람들이 야근수당을 받는 것에 익숙해질 때쯤······.

<투명한 사랑>의 크랭크 인은 어느새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첫 촬영은 야외 공원의 놀이터에서 한보배와 아람이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아무렴 허훈과 현장 제작라인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 없었지만.

오늘만은 예정우와 현장을 찾았다.

먼저 표준근로계약서를 적극 찬성하며 우리 영화에 참여한 정 PD에게 다가가 그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틴 음료를 건넸다.

정 PD는 그중에서도 초코맛을 제일 좋아한다.

“어! 대표님! 감사합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두꺼운 팔뚝으로 내가 건넨 음료를 받아들었다.

“힘드시겠지만, 오늘부터 현장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스탭들이 처음엔 다들 익숙하지 않아 할 거예요.”

“예. 대표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안내만 잘해주면 잘들 따라올 겁니다.”

“예. 정 PD님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음으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제일 중요한 역할인 허훈에게는.

“감독님. 원체 잘하셔서 걱정 없습니다만, 첫날이니만큼 시간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예! 예! 며칠 전부터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얼마나 돌렸는지 모릅니다!”

허훈은 크랭크 인이라는 사실에 설렜는지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예. 근데 조금만 더 릴랙스하셔도 될 것 같아요. 감독님.”

내 말에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휴우!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있었는데 조금 나아졌습니다.”

잘하겠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거장의 향이 조금은 났었는데, 지금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

어쩔 수 없이 현장에 가끔 오긴 해야겠군.

“그런데요. 대표님. 제가 이 말씀을 못 드렸는데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뭔데요?”

“저에게 대표님은 정말 최고의 제작자세요!”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발언인가.

“이번에야말로 대표님을 의심했거든요······. 그런데 고덕현 감독님을 정말로 섭외해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 그거야 뭐.

내가 허훈이래도 못할 거라, 생각했을 거다.

“괜찮습니다. 운이 좋았죠. 대신 이번 영화 아주 기깔나게 한번 뽑아봅시다. 감독님.”

허훈이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저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들이! 정신 안 차릴 거야?!”

고덕현이다.

그는 촬영 감독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조명, 그립 파트를 자신이 모두 꾸려왔다.

원래 합을 맞추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아니면 일을 못 한다나 뭐라나.

아마도 내 밑에선 이들이 아니면 못 버틴다.라는 말을 돌려 한 것 같았다.

이 새끼, 저 새끼 소리를 들으면서도 다들 저렇게도 빠릿하게 움직이니 말이다.

아니면 해탈한 건가.

그런데 고덕현의 호통에는 의외의 인물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고진주.

연출팀 막내로서 모니터 테이블을 세팅하던 그녀는 너무 놀랐는지 방금 약 30cm는 점프한 것 같다.

눈을 무슨 화등잔만 하게 뜨더니 고덕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흐음,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모습인데 어떻게 생각하려나.

하여튼 둘은 영화에 함께 참여하긴 하되 서로가 부녀지간이라는 건 현장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기로 했다.

나도 그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고.

과연 그 깐깐하고 엄했던 현장에서의 고덕현이 딸 앞에서는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는데.

아직은 별다른 게 없다.

다만, 가끔 고덕현은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을 갈구는 재주가 있었는데.

고진주가 아버지의 횡포를 마냥 보고만 있을 것 같진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딸의 시선에 고덕현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든 모양새였으니.

“그으래. 그렇게 해야지!”

밸런스가 잘 맞아야 할 텐데.

배우들에게는 혹시나 해서 찾아가지 않았다.

한껏 감정을 잡고 있을 텐데 괜히 가서 방해하고 싶지 않다.

인사는 이따 끝나고 해도 된다.

요란했던 첫 씬의 세팅이 끝나고.

한보배와 아람이 카메라 앞에 섰다.

오디션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올라왔는데 옆에 서 있던 스태프 둘의 잡담이 들려왔다.

“와, 둘이 서 있으니깐 무슨 화보다. 화보.”

“그러게. 아람 씨는 이번에 살도 일부러 좀 찌웠다는데.”

“아, 진짜? 근데 찌운 게 훨씬 낫다.”

아람은 이번 영화 촬영을 위해 예쁘게 보여야 하는 아이돌로서의 모습을 잠시 버렸다.

화려하고, 도시적으로 생긴 얼굴을 의상과 분장으로 은옥 역에 맞추고, 살도 조금 찌웠다.

그녀는 특히 살을 찌워야 한다는 제안을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매니저가 옆에 붙어 촬영이 끝나면 다시 조절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중이었지만.

“조감독님. 아람 씨. 조금만 오른쪽으로 이동시켜주세요.”

아까와는 눈빛부터 달라진 허훈이 무전기로 현장의 조감독에게 전달했고.

아람이 한 걸음 이동하자 그는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오케이. 됐습니다. 가시죠.”

허훈의 신호에 조감독을 필두로 연출팀, 제작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슛 들어가겠습니다!”

“슛!!”

고덕현이 메인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 앞에 슬레이트를 든 고진주가 서자 조감독의 사인이 곧바로 이어졌다.

“자, 레디.”

녹음팀의 목소리.

“스피드!”

포커스를 잡던 촬영팀의 목소리.

“롤!”

마지막으로 고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7의 3의 1!”

딱!

그녀가 빠르게 슬레이트를 내려치고 빠지자 다시 조감독이 외쳤다.

“액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

첫 촬영이 끝나고, 키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여있던 모니터 테이블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멀리서 봤을 때 제일 힘들어 보이던 한보배는 내가 오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대표님 아~까 오셨는데.”

허훈이 대신 대답하자 그녀는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근데 왜 오셨단 말도 안 하시고!”

“집중하고 있길래요. 그보다 다들 인사드리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깐 잠시만요.”

“할 이야기요?”

“예. 중요한 이야기니깐 조금만 기다려요.”

그녀에게 그렇게 툭 던져놓곤 고덕현에게 갔다.

“감독님. 오랜만의 현장이라 힘드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찮습니다. 프로가 뭐가 힘듭니까. 일하는 건데.”

그는 카페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심술 맞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마에 ‘예민’, ‘까칠’이라고 적어놓은 줄 알았다.

소문으로만 들어서 체감을 못 했는데.

정말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그럼요. 촬영장에 딱 들어선 순간 모두가 프로정신을 가지고 있어야지요.”

내 말에 고덕현은 완강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스르르 풀더니 턱을 매만졌다.

“그렇죠? 역시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요즘 애들은 빠져가지고 말이야! 프로정신이 없어요! 프로정신이!”

“예. 저도 백번 이해합니다. 그래도 또 감독님께서 잘 이끌어주시니 다들 곧잘 따라오지 않습니까.”

고덕현의 입이 곧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어허허. 대표님. 이제 보니 저랑 말이 좀 통하십니다?”

그러더니 그는 끙차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어색한 연기를 펼쳤다.

“아이고.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연출팀! 집에-! 아, 아니지! 촬영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실수에.

“으이? 너네 이걸 아직도 다 정리 못 했어?!”

불똥은 괜한 촬영팀에게 튀었다.

그가 잔소리를 시작하며 저 멀리 멀어지자 다른 키 스태프들에게도 인사를 한마디씩 건네며 친근하게 다가갔다.

친해지면 다 좋은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사를 다 한 뒤 옆에 있던 한보배가 없길래 두리번거렸더니 매니저가 와서 옷 갈아입으러 갔단다.

잠시 그녀를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스태프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 귀를 붙잡았다.

“와, 진짜 이렇게 깔끔하게 끝나는 현장 처음이다.”

“그러니깐! 8시간 만에 촬영 종료하는 현장이 어딨냐. 이게 얼마 만에 개인 시간이야.”

“감독님이 아주 이거 딱! 저거 딱! 찍고, 됐어! 다음 씬! 이러는데, 완전 카리스마 장난 아니더라. 처음에 나이 어리다고 무시했는데 반성했다.”

“나는 무슨 이상한 계약서를 내밀길래 이게 뭔가 싶었는데 나도 반성! 최고다!! 표준 근로!”

고생해서 도입한 표준근로계약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잠시 기다리자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한보배가 나타났다.

“어! 대표님. 기다리셨어요? 바쁘시길래 빨리 갔다 온 건데.”

“아니요. 괜찮아요. 잠깐 서 있었어요. 그보다 보배 씨. 저번에 말씀하신 우주 가르쳐 줄 작곡가 말입니다.”

그녀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 나왔다.

“아! 괜찮은 분 있어요? 안 그래도 우주가 몇 번을 대표님한테 연락 왔냐고 물었거든요. 정말 배우고 싶은가 봐요.”

“그래요? 근데 아직 답은 못 받았어요.”

그녀는 조용히 내 말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연락 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그것보다는 우주, 영화 음악 시켜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영화 음악이요?”

그녀는 잘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우주가 떠오른 이미지를 음악으로 만들어낸다고 하셨잖아요? 영화 음악이라는 게 그 영상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게 작곡해야 하니 정말 딱인 것 같아서요.”

한보배의 얼굴은 더 아리송해졌다.

“그치만, 저희 우주는 앞을 못 보는데······.”

“그건 제가 생각해놓은 방법이 있어요. 걱정 마시고, 한 번 시도라도 해봅시다.”

잠시 걱정하던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대표님이 그러시다면, 저는 괜찮아요. 우주한테도 말해놓을게요!”

이제 천상현에게 연락만 오면 되는데······.

내가 먼저 해봐야 하나.

그때.

저 멀리서 예정우가 오른손에 든 핸드폰을 꼭 올림픽 봉화처럼 들고 뛰어왔다.

“대표니임!!”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형님. 천천히 오셔도 돼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허억, 헉!”

잠시 숨을 돌리던 그는 현장을 정리하던 모두가 다 쳐다볼 정도로 큰소리로 외쳤다.

“<워싱> 100만 넘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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