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33화 (33/140)

#33화. 날씨 운이 참 중요하죠

“혜리야. 그린 애플 아람 영화 찍는다니까 기사 하나 써놔.”

“예? 정말요?!”

장혜리는 깜짝 놀랐다.

“그린 애플 미국은 아예 안 가기로 했대요?”

“대표가 포기한 거 같진 않던데? 어쨌든 양상민 때문에 회사가 휘청했으니 좀 미룬 것 같더라고.”

“아아, 근데 무슨 영화를 찍는대요? 아람 연기한다는 거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이다. 아이돌 연기하면 욕을 얼마나 많이 먹는데, 그걸 하겠다고 나서는 건지.”

“욕을 많이 먹어요?”

그녀는 김 선배에게 조금 더 이야기해달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너 눈 커서 그렇게 뜨면 무서워. 하여튼 잘하면 운이라는 소리 듣고, 못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소리 듣고, 나는 연예인 죽어도 못 한다. 분명 제 명에 못 산다니까.”

“연예인 못하는 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장혜리는 4개월간 김 선배와 꽤 친해져서 이제는 농담 섞인 말까지 건넬 수 있었다.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라.”

“알겠습니다아. 영화 제목은 뭐예요?”

“<투명한 사랑>”

“으잉? 아라비안필름 거기 거요?”

김 선배는 의외라는 얼굴이다.

“너 어떻게 알았냐?”

“그때 화분 엔터 사건 이후로 뭔가 좀 이상해서 파헤쳤죠.”

지금 그녀는 탐정 코스프레를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뭘 파헤쳐?”

“아무리 봐도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양상민이 갑자기 자수한 것도 그렇고, 대표도 아닌 도건우가 소속 배우들 뜻 모아온 것도 그렇고.”

“하기야. 그건 그렇지. 근데 그거랑 그 제작사가 뭔 상관이야?”

“분명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근데 그 제작사 대표가 수상해요. <투명한 사랑> 단편에도 거기 대표가 참여했죠? 부국제 레드카펫에도 나왔잖아요.

거기다 얼마 전엔 장편도 거기서 제작한다고 하지. 아! 제가 제일 확신했던 건 그 영화 화분 엔터에서 투자하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그 대표밖에 없다! 이거예요!”

김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너는 기자 말고, 탐정해라. 탐정. 추리가 예술이네. 아주.”

“치이······.”

장혜리의 긴 연설에도 김 선배는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라는 말투였다.

“하여튼 추리 그만하고 기사나 써!”

“눼눼. 알겠습니다.”

빈정 상한 장혜리가 이죽거렸지만, 김 선배는 아무렇지 않게 지시했다.

“아, 그리고 거기 고덕현 촬영 감독도 섭외했다는 소문이 있거든?”

“고, 고덕현 촬감님이요? 그분 산에 들어가신 거 아니었어요?!”

“어, 아니란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장혜리는 순식간에 밀려들어 온 정보들이 정리되지 않아 멍하니 앉아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김 선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 선배! 그 제작사 영화도 하나 수입했다고 들었는데 아세요?!”

“우리나라 제작사들이 연간 수입하는 영화들이 몇 편인데 내가 그걸 다 어떻게 아냐.”

“태국 공포 영화라던데······.”

김 선배는 장혜리를 못 말린다는 듯 쳐다봤다.

“어휴! 그렇게 관심 많으면 시사회라도 갔다 오든가. 취재 한 번 나가봐. 그 대표라는 사람 인터뷰도 따 보고.”

장혜리가 입이 귀에 걸려서는 대답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

2개월이 지났다.

따뜻했던 날씨는 나날이 뜨거워져 반 팔을 입고 다녀야 할 후덥지근함까지 느껴졌다.

회귀 한지도 어언 1년이 지나가고 있었고.

<투명한 사랑>의 크랭크 인은 어느새 3주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워싱>의 개봉 날이 잡혔다.

“과장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YJ E&M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난 최세준 과장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인사말을 잘 못 꺼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최세준은 긍정적이었다.

“말도 못 하게 바쁘지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쁘다는 건 그만큼 영화계가 활발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이제 시사회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저희 쪽에서도 모실 분들은 일단 연락 다 돌려놨습니다.”

개봉 전 처음으로 열리는 비공개 시사회가 3일 뒤였다.

“네. 저희도 홍보해 줄 기자들이랑 평론가 연락 싹 돌려놨습니다. 또 이후 시사회에 초청될 일반 관객들 신청도 받고 있고요.”

우리는 <워싱>의 예고편을 조금 색다르게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영화의 내용이 압축된 예고편과 관객들의 반응을 녹화해 편집한 예고편.

총 두 가지 버전으로 홍보할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공포 영화의 관건은 얼마나 무서운가. 이다.

그래서 관객들의 동의를 받은 뒤 시사회장에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해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카메라는 비공개 시사회에도 설치될 예정이라 배급팀에서 할 일이 많아졌다.

“잘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기막힌 아이디어는 대표님이 주셔놓고.”

전생에서 얼핏 봤던 것이 기억나서 흘러가듯 말했을 뿐인데.

“저야 말만 했을 뿐이죠.”

“하여튼 겸손하시기는! 그나저나 <워싱> 개봉 날 너무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워싱>의 개봉은 6월 23일이었다.

“그런가요?”

“예! 보통 공포 영화 시즌이 7, 8월이잖아요? 그런데 대표님이 갑자기 6월 말에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하시길래 다른 영화 피하려고 그러시는 건가. 생각했거든요?”

영화는 개봉 날짜가 굉장히 중요하다.

흥행은 첫 주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니 그렇게 제안한 것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쏟아지는 공포 영화를 피하기 위함이 맞았다.

“그런데, 날씨까지 도와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올해는 뉴스에서도 떠들어 댈 정도로 여름이 빨리 왔다.

6월 중순인 지금부터 기온은 30도를 웃돌고 있었고, 이례적으로 더운 날씨에 휴가 시즌도 당겨지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영화는 날씨 운이 참 중요하죠.”

이건 정말, 그냥 운이어서 다행이다. 하고 있었던 건데 최세준은 그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작품의 날씨 운은 다 그 영화의 책임자가 덕을 많이 쌓아서다. 라고 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저건 보통 감독에게나 쓰이는 말이다.

“<워싱>의 한국 책임자는 대표님이시니까! 이렇게 모든 일이 일사천리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건 너무 억측 같긴 한데.

그래도 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 최세준 과장은 잊고 있던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아! 맞다!”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탁하고 내려놨다.

“어떤 기자가 대표님 인터뷰를 좀 하고 싶다던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나를? 도대체 왜?

*

천상현은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영화관에 도착했다.

오늘은 자신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워싱>의 시사회 날이다.

<워싱>은 어쩌다가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영화였다.

태국에서 난리가 난 영화로, 깔린 음악이 예술이라길래 궁금해하던 중.

시사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인의 지인까지 동원하여 간신히 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워싱>이 공포 영화라는 점.

자신은 귀신 등의 영적인 존재가 정말이지 싫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오직 음악이 좋다는 말 때문이다.

혹자들은 영화 음악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라고 할지 몰라도 처음 본 영화에서 음악이 주는 감동을 잊지 못해 업으로까지 삼은 자신에게는 특별했다.

더구나 공포 영화는 소리가 정말 중요하다.

그런 영화에서 음악이 좋다는 말이 나왔으니 얼마나 기대되는 영화겠는가.

천상현은 힘든 살림이었으나 혹시 모를 긴급상황에 눈을 가려야 할 팝콘 한 통까지 샀다.

이제 그는 시사회장 입구 벤치에 앉아 기대되는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

드디어 시사회 날이다.

일어나자마자 고시원 창문을 열어 날씨부터 확인했다.

아직 아침이라 선선하긴 하지만, 낮에는 후끈후끈할 쨍쨍한 날씨였다.

그나저나 <워싱>이 잘 되면 이 좁은 고시원부터 이사해야지, 안 되겠다.

어차피 잠만 자니 별 상관은 없었는데 좁아도 너무 좁다.

나만의 화장실을 가지고 싶기도 하고.

공동 샤워실로 가서 샤워하기 전에 <신바드의 모험>부터 펼쳤다.

힌트를 찾기 위함이었으나 별 기대는 없었다.

한동안 또 올라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런데······.

응? 있다!

그것도 지금까지 정리된 시나리오의 바로 다음 장인 걸 보니 아주 가까운 미래 같았다.

힌트는 이렇게 2개였다.

[가난한, 2장]

역시가 역시인가.

모르겠다.

그래. 언제는 뭐 알고 움직였나.

나왔으니 됐다.

<신바드의 모험>은 가방에 넣어두고,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특별한 날이니만큼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었다.

시사회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비록 수입 영화이긴 하나 아라비안필름에서 처음 개봉하는 영화다.

성공한다는 걸 알고 있어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약간의 긴장이 텐션을 기분 좋게 올려줬다.

“대표님!! 여기요! 여기!”

허훈이 저 멀리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은 사무실 식구들도 잠시 일을 놓고, 시사회장으로 모였다.

“감독님. 빨리 오셨네요?”

“그럼요! 대표님이 제일 늦게 오셨는걸요!”

근처 벤치를 보니 예정우부터 조감독, 정 PD, 신 실장 순으로 쪼르륵 앉아있는 모습이다.

예정우는 내가 빤히 보자 뭐에 찔린 눈치다.

“오늘은 회식 이야기 안 할 거야! 또 뭐라고 하려고 했지!!”

“끝나고 하려고 했는데. 하지 말까요?”

그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럼 당연히 소고기지?!”

“아니요. 돼지고기.”

예정우가 쩝 입맛을 다시며 ‘그래. 삼겹살이 어디야.’라고 중얼거렸다.

초대한 나은, 나경 자매와 번역을 맡은 전해성이자 김바로도 근처에 있길래 인사를 하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응? 저 사람······.

눈에 들어온 사람은 30대 초반의 남성.

그는 팝콘을 손에 들고, 무슨 일인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처음 보는 사람 같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곧 생각났다.

아, 천상현이다.

천상현은 전생에서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유명한 음악 감독이었다.

원래는 발라드 가수였는데.

아마도 내 기억엔 영화 음악으로 넘어오기 전 냈던 3장의 앨범이 모조리 쫄딱 망했을 거다.

그러다 한 독립영화의 음악을 의뢰받아 작곡했는데.

그게 빵 터지면서 입소문이 나, 나중에는 한국 영화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었더랬지.

그런데 저 사람이 여긴 왜 왔지?

그것도 한껏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뭐가 됐든 나로서는 당연히 잡아야 할 사람이었다.

영화의 분위기는 음악이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특히 <투명한 사랑>은 분위기가 매우 중요한 영화라 음악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렇게 떡하니 만날 줄 모르고, 말이다.

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한우주.

처음 한보배의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떤 작곡가를 소개해줘야 할지 막연하게 떠오르지 않아 미뤄두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미지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천재성은 영화 음악에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재능이었다.

그럼 아직은 접점이 없는 천상현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문제는 그가 아직 발라드 가수인지, 영화를 시작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때.

아침에 봤던 <신바드의 모험>이 떠올랐다.

‘가난한’, ‘2장’.

평소처럼 가정해보자.

가난한.

그건 천상현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않을까.

아마도 가난한 음악가? 가난한 청년?

2장은······.

아! 천상현이 냈던 앨범은 총 3장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이 2장을 냈을 때라는 건가?

지금까지 낸 앨범이 쫄딱 망했을 테니 대충 ‘가난한’도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 가정이 확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예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 발로 찾아온 그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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