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막내 뽑았어요?
오디션이 재개됐다.
나는 참가자들의 연기를 유심히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까의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고덕현의 딸이 오디션에 참가하다니.
슬쩍 옆으로 가서 둘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무슨 일인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고덕현은 딸이 배우에 도전한다는 걸 못마땅해하는 눈치, 딸은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그 모습은 전생에서 그렇게도 사이좋던 모습과는 분명 거리가 멀어 보였다.
또 고덕현의 겉모습은 무성한 소문과는 전혀 맞는 구석이 없었다.
만성피로나 번 아웃, 도박도 전혀.
아, 로또 1등이 당첨된 건가.
하여튼 그렇게도 찾던 고덕현을 만났으니 당장이라도 달려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관계자인 내가 그럴 수 없었다.
아람에게 냉정하게 말했던 것처럼 이곳은 만인이 평등한 오디션장이다.
절대 친분을 끌어와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고덕현의 딸이 85번 참가자라는 것만 확인하고, 들어왔는데.
오디션은 어느새 83번까지 진행되어 곧 84번 참가자가 들어올 차례였다.
생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른 프로필을 뒤로 넘겨 85번에서 멈췄다.
고진주.
고덕현의 딸 이름이다.
그녀는 올해 20살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였다.
그런데 배우를 준비 중이라는 사람치고 프로필 사진에 공을 들인 흔적도 없었고, 경력란에 작품은커녕 참가한 오디션조차 몇 개 없는 상태였다.
오디션의 전형적인 허수인 것이다.
이런 참가자가 연기를 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 뭐지.
오디션은 왜 보러 온 걸까.
진짜 배우가 꿈인 걸까.
이제 84번 참가자의 연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은 고진주의 차례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시나리오 북의 힌트도 알아내고, 고덕현도 잡을 수 있을까.
힌트를 다시 되새겼다.
‘오디션’, ‘가족애’, ‘독특한 감성’.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부딪쳐보자.
그때, 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85번 참가자 입장하겠습니다.”
드디어 고진주가 쭈뼛쭈뼛한 걸음걸이로 오디션장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85번 고진주입니다.”
“예. 지정 연기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그녀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네. 그럼······.”
고진주는 앞에서 받은 프린트물을 주섬주섬 펼치고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큼! 아, 진짜? 흐음, 성희야. 너 공상과학 만화 많이 보는 건 알겠어. 근데 나는 본 적도 없는-, 아니다. 투명 인간이니까 어차피 못 보겠구나. 하여튼 나로서는 믿기 힘들 수밖에 없지. 혹시 나한테까지 거짓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
으응?
대사가 추가된 것 같은데.
아니 그것보다 지금까지의 참가자들과는 전혀 다른 톤이었다.
아람이 성희를 다그치듯 연기했다면.
고진주는 타이르듯 연기하고 있었다.
원래 허훈의 의도 대로라면 아람의 톤이 맞다.
참가자의 대부분이 그렇게 해석해서 연기하기도 했고.
그런데 고진주는 왜 다른 톤으로 연기를 하는 걸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자유연기가 끝날 때까지 꾹 참았다.
그렇게 나만이 느끼던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고진주의 연기가 모두 끝났다.
옆을 돌아보니 다들 딱히 할 질문이 없는 눈치였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녀의 연기는 별로였기에 불합격이다.
그런 참가자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인물 조감독도 그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고진주에게 전했다.
“예. 수고하셨-.”
“잠깐만요.”
나는 고진주를 내보내려는 인물 조감독의 말을 잘라먹었다.
미안하다.
이 형이 질문할 게 좀 있단다.
그녀가 나가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고진주 씨.”
“예?”
그녀는 고작 이름을 부르는데도 깜짝깜짝 놀랐다.
“아까 지정 연기에서 왜 성희를 타이르듯 연기했어요?”
“아, 그거는······.”
“혼내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말해보세요.”
고진주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 저는 투명 인간이 있다고 믿거든요.”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제가 은옥이었다면 성희의 말을 조금은 들어줬을 것 같아요. 또 은옥도 은연중에 투명 인간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답을 듣고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독특한 감성’.
이건 혹시 고진주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뜻하는 것 아닐까.
나는 두 번째로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대학은 왜 안 갔어요?”
“영화가 좋아서요.”
“영화과 가면 되잖아요?”
“대학을 가야만 영화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그건 아니죠.”
어유. 누가 고덕현 촬영 감독 딸 아니랄까 봐 말발이 점점 세진다.
그러더니 고진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최대한 빨리 느껴보고 싶었어요.”
“뭘요?”
“아빠가 보고 있던 곳이요. 아빠가 그렇게도 좋아하고, 미쳐있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어요.”
어? 이거 뭔가 ‘가족애’랑 얽히는 거 같기도 하고?
문득 고진주는 배우가 아닌 영화 자체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녀가 가진 ‘독특한 감성’은 영화의 어떤 분야에서도 기가 막히게 발휘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에게 꼭 제안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먼저 옆에 있던 인물 조감독에게 물었다.
“혹시 연출팀 막내 뽑았어요?”
그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내 물음에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가 풀렸다.
“아, 아니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진주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고진주 씨. 이렇게 해봅시다. 혹시 현장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요?”
인생사가 뭐 그런 거지.
오디션장에서 겸사겸사 스태프도 꾸리고 뭐 그러는 거 아니겠어?
*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음 번호, 다음 번호, 또 다음 번호.
그렇게 총 300명의 연기를 보다 보니 어느새 오디션은 끝이 나 있었다.
1차 합격시킨 50명의 영상을 허훈에게 그대로 전달했으니 이제 은옥 역을 뽑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또 우리는 허훈이 수정한 시나리오대로 서둘러 촬영 준비에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고진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 여보세요?
“아, 진주 씨! 잘 지냈어요?”
오디션장에서 연출팀 막내를 제안한 뒤로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길래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나. 싶었는데 반가운 전화가 드디어 왔다.
-네. 영화 준비는 잘 돼가세요?
“그럼요! 생각은 좀 해보셨어요?”
-그, 그게······.
무슨 문제가 있나?
“왜요?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요. 저는 너무 하고 싶은데······. 대표님. 저희 아빠 좀 설득해주시면 안 될까요?
*
고덕현은 차를 운전해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에도 울화통이 터지려는 걸 꾹꾹 참고 있었다.
‘아니, 배우 하겠다는 것도 겨우 말리고 있었는데, 뭐? 연출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며칠 전 딸의 성화에 따라간 오디션에서 딸은 당연히 떨어졌다.
그런데 웬 이상한 대표라는 놈이 딸에게 현장 취직을 제안했다는 거 아니겠는가.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딸은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현장으로 가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야말로 물러설 수 없었다.
촬영 현장이 얼마나 험하고 억세며 힘든지 알고 있는 그였다.
절대 소중한 딸에게 그 고생을 시킬 순 없었다.
“아빠. 아무리 그래도 대표님한테 화는 내지 마. 알았지?”
‘참나, 언제 봤다고 또 대표님이라는지.’
“알겠어.”
그러나 조수석에 앉은 딸은 모를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화를 참고 있으며, 벼르고 있는지를.
*
“안녕하십니까.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입니다.”
고덕현은 카페에 들어올 때부터 심술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예. 고덕현이요.”
내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의 이 자리는 고진주가 아버지를 설득해달라는 부탁으로 나오긴 했으나 내 목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렵게 독대하게 된 만큼 오늘 무조건 이 사람을 섭외해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촬영 기간이 아니라 그나마 온순한 고덕현이라는 것.
그럼 시작해볼까.
나는 한껏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아니?! 혹시 고덕현 촬영 감독님 아니십니까?”
고덕현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옆에 앉아 아이스 초코를 마시던 고진주도 놀랐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응? 저희 아빠 아세요?”
“당연하죠! 영화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영광입니다! 감독님!”
벌떡 일어나 고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복잡 미묘한 얼굴이었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는 고진주의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뭘, 또 영광까지.”
내 악수를 못 이기는 척 받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는데.
미처 다 숨기지 못한 미소가 찰나에 보였다.
그래.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더구나 자신의 딸 앞에서는.
“하여튼 그건 그거고, 우리 딸한테 왜 그런 제안을 한 겁니까.”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풀린 듯했으나 여전히 고진주 이야기에는 고압적인 태도였다.
물론 이해는 충분히 된다.
고덕현 입장에선 딸의 고생길이 눈에 훤하겠지.
근데 그건 그가 지금의 영화판만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진주 양이 영화를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영화의 길은 배우 말고도 많은데 자세히 모르니 오디션장에 나온 것 같았고요.”
고덕현의 미간이 움찔했다.
“감독님도 잘 아시겠지만, 현장에서 배우고, 느끼는 게 참 많지 않습니까. 단 한 작품을 하더라도요.”
“한 작품을 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지요. 상종 못 할 곳이라면서. 현장에서 일 안 해봤습니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저도 지금의 영화판은 잘 못 됐다고 생각해서 제작사를 차렸습니다. 상종해볼 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고요.”
곧바로 가지고 온 표준근로계약서를 꺼내 고덕현에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내 설명이 계속되는 중에 그의 귀가 조금씩 쫑긋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계약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또 저희 영화가 어떤 건지도 궁금하시겠죠. 먼저 단편으로 제작해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상도 받았고요. 그래서 장편으로-.”
차근차근 우리 영화에 대한 장점을 나열했다.
설명이 거의 끝났을 때쯤에는 맞은편의 앉은 그의 몸이 내 쪽으로 쑤욱 튀어나와 있었다.
이건 우리 영화가 아주 흥미롭다는 뜻이겠지.
“예. 영화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고덕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확실히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되면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이 되겠군요. 그리고 영화가 좋네요. 제가 다 하고 싶을 정도로.”
오케이. 넘어오고 있구나.
“무엇보다 제가 그런 제안을 한 건 진주 양에게서 재능을 봤기 때문입니다.”
“재능이요?”
“예. 진주 양은 해석 능력이 특별해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우리 같이 영화하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축복받은 재능인지는 아시죠?”
고덕현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자신의 딸에게로 시선이 넘어갔다.
그런 재능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는 안색이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고진주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빠. 나 정말로 하고 싶어요.”
딸의 진심 어린 말에 고덕현은 고개를 떨궜다.
“하아, 사실은 오늘 무조건 반대하려고 나왔습니다.”
말과는 반대로 그의 경계는 완전히 풀려있었다.
“그런데 대표님도 생각보다 괜찮고, 딸이 또 이렇게도 하고 싶어 하니 허락해야겠지요.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사실이네요.”
나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도 걱정되십니까.”
“그럼요. 딸아이 혼자 사지로 보내는 느낌입니다······.”
오케이. 이제 아까부터 입안에서 맴돌고만 있던 그 말을 속 시원하게 꺼내야겠다.
“진주 양 때문에 뵙게 된 자리라 말씀드리기 좀 어려웠는데,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저희 영화, 촬영 맡아주시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