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31화 (31/140)

#31화. 당당함과 건방짐의 사이

아람은 자신의 방에서 매니저에게 부탁한 책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책의 이름은.

[만화로 배우는 수어]

아람은 책을 보다 말고, 엊그제 걸려 온 양상철 대표의 전화를 떠올렸다.

-아람아! 너 혹시 수어 할 줄 아니?

-수어요?

-그래! 내가 너한테 딱 맞는 캐릭터를 찾았다!

갑작스러운 양상철 대표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저녁 11시였다.

-수어는 못 하는데······. 근데 대표님 혹시 술 드셨어요?

그곳은 아마도 노래방이었는지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아아, 조금 먹긴 했는데 끄떡없다! 그보다 잠깐만!

양상철의 목소리가 잠시 멀어졌다가 다시 들려왔을 때 그는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아람아! 괜찮대! 괜찮아! 근데 이게 공개오디션이라 할 수 있으려나.

아람은 그런 각오도 없이 연기하겠다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예. 배역만 괜찮으면 저는 상관없어요. 그보다 무슨 역할이에요?

잠깐의 짧은 설명이 끝나자 아람은 동요했다.

투명 인간과의 사랑이 주제인 로맨스 영화이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톤이 다크 할 것 같은 흥미로운 주제와.

배우로선 깔 게 없는 선배 도건우가 먼저 출연을 제안했다는 점.

모든 것이 끌렸다.

‘그 선배님이 연기도 연기지만, 작품 보는 눈이 엄청나다고 했어.’

거기다 주인공을 계속 따라다니는 친구 역할이라 분량도 꽤 많은 편이었다.

자신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

오디션의 날이 밝았다.

오늘과 내일을 위해 우리는 오디션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를 대여했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모였다.

오디션 멤버는 나와 심사를 할 예정우, 인물 조감독, 또 진행을 도와줄 나경과 연출팀 1명이었다.

이른 아침이긴 했으나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기운이 팔팔한 모습이었다.

아마 내일이면 녹초가 돼 있을 것 같지만.

“자, 커피 사 왔으니까 다들 마시고 힘냅시다!”

커피를 모두에게 나눠준 뒤 나경과 연출팀에게 전달했다.

“두 분은 번호 순서대로 대기 시키면서 지정 대사 프린트물 나눠주시고, 입장 도와주시면 됩니다. 아, 끝난 분들 교통비 챙겨주시고요.”

전생에서도 교통비는 꼭 챙겼다.

오디션은 물론이고, 작은 회사였지만, 면접 보러 오는 사람까지 모두에게.

연기를 잘하든 뭣하든 여기까지 와준 것이 고마워 집에 갈 차비 정도는 쥐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제 총 300개의 봉투에 일일이 현금을 집어넣느라 고생 좀 했다.

오디션장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복도로 나가보니 나경과 연출팀이 순서대로 세워 놓은 참가자들이 보였다.

창밖을 슬쩍 보니 줄은 1층까지 늘어서 있었다.

자, 준비도 끝났겠다.

모두에게 알렸다.

“그럼 오디션 시작합시다.”

“네. 1번 참가자 입장하겠습니다.”

나경의 말을 기점으로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

“어? 저 사람 연예인 아니야?”

“누구누구?”

복도에 서 있던 아람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누르고, 마스크는 한껏 올렸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네.’

자신이 슬쩍 움츠리자 옆에 서 있던 커다란 덩치의 매니저는 몸을 더욱 부풀려 자신을 가리기에 바빴다.

매니저 때문에 이목이 더 집중됐지만, 자신을 위한 행동을 그만하라고 하기도 뭐 해서 가만히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오디션도 정말 오랜만이다.

한창 걸그룹이 되겠다며 온갖 기획사들을 돌아다녔었는데······.

옛날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그때의 간절함이 떠올랐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제 막 발을 디딘 오늘의 아람도 그때와 같이 간절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 얻은 소중한 기회를 어설프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하고 싶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오디션에 합격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합격한 오디션 때문에 걸그룹으로 데뷔까지 한 것이고.

오디션에도 노하우가 있었다.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기.

긴장하면 안 된다.

앞에 앉은 심사위원들의 기를 꺾어 누르면서 내 끼를 모두 발산해도 생존할까 말까 한 곳이었다.

‘그래. 할 수 있어.’

그때 입장을 돕던 여자가 자신을 불렀다.

“56번 참가자 입장하겠습니다.”

*

“다음이 아람 씨네?”

예정우의 입이 헤벌쭉해졌다.

“형님. 이상한 질문 같은 거 하면 안 됩니다. 여기 오디션장이에요.”

“내가 무슨! 팬이긴 하지만, 지킬 건 지킨다!”

내가 말 안 해뒀으면 분명 사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냐고 한마디는 했을 거다.

그래도 기대가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람이 하는 연기는 미래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궁금한 게 당연했다.

어떤 연기를 보여주려나.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아람이 들어왔다.

현역 걸그룹답게 팔과 다리는 늘씬하게 쭉쭉 뻗어 있었으나 전체적인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너무 말랐다.

그녀는 씩씩하게 걸어와 우리 앞에 서서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가려져 있던 작은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들어가 있었고.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은 고혹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사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연기를 봐야 하겠지만,

한보배와는 또 다른 결의 미인이라 같이 세워 놓으면 괜찮은 케미를 형성할 수 있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보통의 참가자들이라면 바로 하는 인사 따윈 없고, 난데없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응? 뭐 하려는 거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주먹을 쥔 왼손을 쭉 뻗은 다음 오른손을 들어 왼팔을 쓸어내렸다.

곧이어 바로 두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가슴 앞으로 가져간 상태에서 아래로 꾸벅 내렸다.

수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람은 다음 말도 수어로 이은 후 우리에게 해석했는데.

“그린 애플의 아람입니다.”

급하게 배웠는지 삐거덕대는 모습이 영 어설펐다.

우리가 참가자들에게 알려준 정보는 모두 같았다.

영화의 짤막한 설명과 오디션에 합격하면 맡게 될 배역이 수어를 한다는 점.

그런데 56번인 아람이 들어오기까지 단 한 명도 그녀처럼 우리에게 수어를 직접 보여주며, 어필한 참가자는 없었다.

당연히 플러스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옆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뭐.

연기력이 조금 안 좋아도 50명 안에는 무난하게 들겠다.

“수어를 연습해오셨네요?”

“네. 합격하면 배워야 할 것 같아서요.”

와우. 자신감이 무슨.

합격을 확신한다는 건가?

보통 저런 태도로 나오면 사람이 건방져 보이거나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인데.

아람은 그렇지 않았다.

당당함과 건방짐의 사이라고나 할까.

놀라움을 숨기며 다음 순서로 넘어가려던 그때.

“어?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아람은 정확히 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봤는데······. 그게, 어디서 봤더라.”

아, 잊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나 얘 앞에서 노래 불렀었지.

양상철도 그렇고, 기억력이 다들 좋네.

그래도 아람이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니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아! 맞다! 엘리베이터, 있을 때 잘해! 맞죠?!”

아니, 무슨 지칭하는 명칭이 저래.

“아, 네. 맞습니다.”

기억해 냈는데 또 아니라고 하긴 뭐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선 예정우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선.

도대체 네가 걸그룹이랑 어떻게 친분이 있는 거냐!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낯빛이었다.

그런 그에게 절대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두 번 저어주고, 다시 아람을 바라봤다.

그녀는 아주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아람은 그때의 나를 아마도 한보배의 매니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라비안필름 대표 자격으로 왔습니다.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네요. 아람 씨 여기 오디션 보러 온 겁니다.”

그녀는 잠시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깜짝 놀라서.”

“괜찮습니다. 그럼 연기 보여주시죠.”

잠깐의 해프닝으로 조금 가벼워졌던 오디션의 분위기는 다시금 엄숙하게 변했다.

우리가 참가자들에게 요구한 건.

지정 연기와 자유연기.

지정 연기는 <투명한 사랑>의 한 부분으로 성희(한보배)가 은옥에게 투명 인간 이야기를 수어로 하자 은옥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혼자 떠들어대는 장면이었다.

시나리오 발췌본은 비밀유지 때문에 참가자에게 미리 보내줄 수 없어 입장하기 직전 나경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오디션이 끝나면 반납이다.

그 말은 즉.

참가자들에게 준비시간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만큼 대본 인지능력과 순발력도 볼 수 있었다.

급할수록 자신의 본 실력이 나오는 법이니까.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람은 얼굴에 잔뜩 짜증을 머금더니 내뱉었다.

“아, 진짜! 성희야. 너 공상과학 만화 많이 보는 건 알겠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고. 혹시 나한테까지 거짓말하는 거야?”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아람.

앞에서 수어를 하고 있을 가상의 성희를 보는 것이다.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니까 말이 되냐고. 너 혹시라도 어디 가서 지금 한 말 절대 하지 마. 알았지? 나니까 들어주지. 모르는 사람이면 너 미친년 소리 듣는다니까?”

그 뒤로도 아람은 열과 성을 다해 연기했다.

준비해 온 자유연기까지 끝날 때쯤 우리는 서로 슬쩍슬쩍 눈빛 교환을 했고.

“이상입니다.”

공통적인 의견은 아람이 연기를 꽤 잘한다는 것이었다.

“어땠어요?”

아람이 나간 뒤 우리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인물 조감독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 처음 본다.

“와. 진짜 잘하던데요. 왜 지금까지 연기 안 했을까 싶을 정도로요.”

도통 진지한 모습을 보기 힘든 예정우도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좀 이상하더라. 저렇게 끼가 있는데 왜 이제 시작한 거지? 끼뿐만 아니라 발성이랑 발음은 또 얼마나 좋은지 귀에 쏙쏙 들어오던데?”

“메인보컬이라 그런가. 그건 저도 동감이요.”

모두의 의견이 얼추 비슷했다.

“그럼 아람은 1차 합격시키는 거로 하고, 쉬는 김에 10분만 더 쉬시죠.”

아직 오늘 참가자 중 반도 못 봤지만, 다들 벌써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어휴! 그러자! 오디션도 볼 게 못 된다. 아! 근데 대표님! 아람 씨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보배 씨 데리고 화분 엔터 갔다가 잠깐 마주친 거예요.”

“아, 그래······? 난, 또 되게 친한 줄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실망해야 하는 일인가.

어쨌든 우리는 소중한 10분의 자유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각자 화장실로, 흡연실로 흩어졌다.

나는 복도로 나가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며 나경에게 물었다.

“나경 씨. 할 만해요?”

“네! 너무 재밌는데요?! 촬영 현장도 좋지만, 이런 것도 은근 적성에 맞네요.”

이건 나경이 일을 잘해서 그런다.

뭐든지 계획해서 움직이면서 효율을 찾아가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일 처리 속도가 빨랐다.

아주 탐나는 인재란 말이야.

“취업 준비는 잘 돼가요?”

나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뭐, 열심히 서류 넣고 있기는 한데 쉽지 않네요.”

“현장은 안 가요? 나는 나경 씨 바로 현장 갈 줄 알았는데.”

“현장도 좋죠. 근데 저는 제작사나 투자사에 다니고 싶어서요.”

“오, 좋은데요? 사실 프리랜서란 게 있어 보여도 항상 불안한 직업이잖아요.”

“네. 그래서 열심히 도전해보려고요.”

“잘 될 거예요.”

그녀에게 격려와 캔 커피 하나를 건네면서도 복도는 유심히 살폈다.

분명 시나리오 북에 ‘오디션’이 나왔으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써 벌어져야 하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내가 찾아보는 수밖에.

아직도 많이 남은 참가자들만 눈에 들어올 뿐 특이점은 없었다.

그때, 계속 1층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제 막 올라온 한 참가자와 중년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부녀로 보이는 두 사람 중 중년남성의 얼굴이 어딘가 눈에 익어서 유심히 살폈는데 순간 너무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는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고덕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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