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30화 (30/140)

#30화. 누군가의 운명이 바뀐다는 건

예약해 둔 한정식집에 홀로 앉아있는데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반갑게 얼굴을 내미는 이들은 양상철과 류봉수였다.

나는 얼른 일어나 둘에게 인사했다.

“아, 어서 오세요. 어떻게 같이 오십니까?”

양상철의 기분 좋은 대답이 이어졌다.

“이 앞에서 만났습니다! 단박에 이분이 신 대표가 말한 분이구나. 했지요!”

오늘은 영화의 진행 상황을 투자자에게 알려주는 자리였는데, 이참에 둘을 소개해줘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같이 약속을 잡았다.

“아, 그러셨습니까. 들어오시죠!”

그렇게 둘은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두 분 초면이시죠? 소개부터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먼저 양상철에게 류봉수를 소개했다.

“대표님만큼 저희 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참여해 주신 분입니다.”

그러자 류봉수는 명함을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었는지.

“신 대표님. 소개는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양상철에게 내밀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영화 미디어연구소 소장 류봉수라고 합니다. 이제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이니 끝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상철은 명함을 받아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화분 엔터테인먼트 대표 양상철입니다.”

류봉수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양상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뜬금없는 고백을 날렸다.

“알고 있습니다! 저 그린 애플 팬입니다!”

아, 류봉수 삼촌 팬이었구나.

양상철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았는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어이쿠! 그럼 이대로 보낼 순 없지요! 자, 한잔 하십시다!”

이 사람들 생각보다 금방 친해지겠는데.

어쨌든 코스로 나오는 음식들과 알싸한 증류주를 목 뒤로 넘기니 분위기는 한껏 좋아졌다.

이제 슬슬 일 이야기를 해보려는데, 양상철이 내게 물었다.

“신 대표는 어떻게, 사업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아라비안필름을 개업하면서 모든 일이 쉽지 않았지만, 즐거웠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예. 저는 아무래도 사업이 체질인가 봅니다.”

“허허! 그렇지, 참! 신 대표가 이렇게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구만!”

“농담입니다. 다 두 분 덕분이죠.”

내 대답에도 류봉수는 양상철 말에 동의했다.

“양 대표님 말씀이 맞죠! 제가 어디 가서 괴짜 소리 정말 많이 듣는데, 신 대표는 솔직히 저보다 더합니다.”

칭찬인가.

“아! 맞다! 괴짜 하니까 생각이 나네! 우리 노래방 가야지 않습니까. 2차는 노래나 한 곡씩 뽑읍시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니.

아니, 그것보다 자꾸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데 이대로는 오늘 만난 목적이 흐려진다.

한 잔, 두 잔 연거푸 마시더니, 양상철과 류봉수 얼굴이 벌써 벌게진 것 같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그 대신 오늘 배급사 만나고 온 이야기부터 해드리겠습니다.”

배급사 이야기가 나오자 흐릿하던 둘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배급사요?”

“예. 저희 배역 하나를 오디션 보기로 했는데, 그렇게 되면 장편 제작이 어차피 알려지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참에 장편 확정 기사랑 오디션 기사까지 대대적으로 뿌리기로 했습니다.”

양상철은 흥미와 기대가 반반 섞인 얼굴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예. 아마도 한두 시간 후면 올라올 겁니다. 그때 확인하시면 될 것 같아요.”

“호오. 그렇다는 말이지.”

양상철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왜 저러지?

“저, 혹시 신 대표. 그 오디션 말입니다.”

“예. 말씀하세요.”

“걸그룹도 지원 가능합니까?”

“걸그룹이요?”

그의 말이 조금 뜬금없긴 했으나 안될 거 없었다.

“그럼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게 오디션 아니겠습니까? 근데 누구를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우리 아람이요. 아람이.”

놀라운 일이었다.

전생에서 아람은 연기로 활동한 적이 아예 없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그렇게도 하고 싶었는데 말도 못 하고 있었나 보더라고요. 곧잘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미국 가기 전에 한 작품이라도 하고 가면 그게 다 경험이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죠.”

“<투명한 사랑>이야 어차피 신 대표가 잘 이끌어 갈 거고, 또 보배 옆에서 같이 연기하다 보면 배우는 게 있겠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람은 아마도 양상민 사퇴로 인해 연예계 활동의 인식이 변한 모양이다.

전생에서도 연기는 하고 싶었으나 양상민에 의해 꽃피우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탈퇴까지 하게 된 거겠지.

우리로서는 그녀가 <투명한 사랑>에 참여하게 된다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아이돌의 팬덤은 상상을 초월해서 영화를 찍을 때 은근 많은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오디션에서 그녀를 편애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은옥 역은 연기가 기본이 되어야 하니까.

모든 전제는 그녀가 연기를 잘한다면. 을 깔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암, 오디션 앞에선 만인이 평등해야지.

그것보다 내 가슴이 아까부터 두근거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운명이 좋은 쪽으로 바뀐다는 건 생각보다 아주 벅찬 일이었다.

*

오디션 일정이 잡혔다.

<투명한 사랑> 단편과 한보배의 화제성 때문인지 오디션엔 약 500명의 프로필이 들어왔고, 우리는 며칠간 그들 중 200명을 걸러냈다.

1차로 뽑힌 300명도 많은 인원이라 오디션은 이틀에 걸쳐 진행하기로 했다.

허훈은 시나리오의 막바지 수정 때문에, 혼이 거의 나가 있는 모습으로 이렇게 전했다.

“대표님. 인물 조감독이랑 같이 가셔서 오디션 좀 봐주세요. 300명 중에서 50명으로만 줄여주시면 제가 그중에서 선택하겠습니다.”

“직접 안 보셔도 되겠어요?”

“네. 대표님 믿습니다!”

무슨 이런 신앙심이.

뭐, 인물 담당 연출팀이 오디션 영상을 찍어 놓을 테니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디션엔 어차피 허수들이 많이 몰린다.

1명을 뽑는 게 어려운 일이지 50명 골라내는 건 단순 노동과도 비슷한 일이었다.

하여튼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행요원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

항상 일 처리가 똑 부러지던 나경이 생각났다.

안부도 물을 겸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배님!

오랜만이지만, 살갑게도 맞아준다.

“아, 예. 나경 씨. 잘 지냈어요?”

-그럼요! 많이 바쁘실까 봐 전화 못 드렸어요.

“어휴. 나경 씨 전화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막 하세요. 그리고 뭐 제가 할 일이 많은가요. 감독님이 바쁘지.”

-허훈 그 자식은 좀 바빠도 돼요! 막 굴리세요! 막!

그녀는 잠시 쿠쿡 웃다가 물었다.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다른 게 아니고, 저희가 이번에 은옥 역 오디션 진행하거든요. 그래서 이번 주 목, 금 시간 있으면 와서 좀 도와줄래요? 일당은 제가 두둑하게 챙겨드릴게요.”

-오! 완전 좋죠! 요즘 취업 준비다 뭐다 집에 눈치도 보였는데. 알바는 항상 오케이입니다!

취업 준비라는 게 자칫 잘못하면 자존감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어째 졸업하고 나서 더 씩씩해진 것 같다.

“그럼 문자로 장소랑 시간 보내 놓을게요. 그때 봐요.”

-네엡!

유쾌했던 나경과의 전화를 끊고, 이번엔 메일함을 열었다.

최근 업무량이 많아져 메일함 확인은 수시로 해줘야 했다.

그런데 반가운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워싱> 한국판 포스터 가안 보내드립니다.]

며칠 전 YJ E&M 최세준 과장이 전화가 와서는 한국판 포스터를 새로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길래 오케이를 했는데 그게 얼추 완성됐나 보다.

어떻게 완성이 됐으려나 궁금증에 첨부파일을 내려받아서 더블클릭했다.

그런데.

“어? 바드야. 뭐 보는-. 아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뭔가가 나뒹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예정우가 저 멀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져 있었다.

“형, 괜찮아요?!”

그는 끙끙대다가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일어났다.

“어어, 와 겁나 아프다. 너는 무슨 그런 걸 보고 있냐아.”

나는 다시 등을 돌려 노트북을 바라봤다.

노트북 화면은 <워싱>의 포스터가 꽉 채우고 있었는데.

흰 피부의 눈동자도 없는 검은 눈, 입,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곧 포스터를 찢고 나올 것처럼 꾸며진 모습이었다.

그녀의 뒤로는 기괴하게 꺾인 시체들이 슬쩍슬쩍 보여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예정우가 저리도 놀라는 걸 보니 포스터는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네.

최세준 과장 칭찬해줘야겠다.

“근데 대표님. 그거 이제 내리면 안 돼? 진짜 꿈에 나올까 무서워 죽겠다!”

그러게, 누가 보랬냐고요.

*

“저기 진주야. 거기에 꼭 나가야겠어?”

고덕현은 오늘도 딸아이와 실랑이 중이었다.

사춘기도 훨씬 지난 녀석이 자신의 말은 귀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곳이라 경험을 가지고 해주는 이야기인데.

“응. 아빠. 나 꼭 배우 하고 싶다니까. 아빠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했잖아. 꿈도 찾으라고 했고.”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배우를 꿈꾸다니.

촬영 감독을 오래 하다 보니 무명 배우들의 서러움이나 그 무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함을 가까이서 수없이 봐왔다.

그러니 고덕현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에게 그 세계를 선뜻 추천할 수 없었다.

“그래도 또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그렇지?”

“아니. 나는 영화가 하고 싶어. 아빠도 카메라 잡는다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그랬잖아. 얼마나 재밌었으면 그랬겠어? 그래서 나도 한 번 그 카메라 앞에 서보고 싶다고.”

또 그 이야기다.

왜 매번 대화가 이렇게 끝나는지.

아직도 딸아이는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모양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고덕현은 일 중독이었다.

영화가 좋아서, 카메라가 좋아서.

가족을 신경 쓰지 못했다.

아니, 쓰지 않았다가 맞는 표현이었다.

올해 20살이 된 딸아이의 초중고 입학식과 졸업식은 물론이고, 가족여행 한번 같이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작년 아내가 딸과 함께 친정집으로 한 달간 가출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은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한 자기 위안이었던 것이다.

깨달음을 얻자 자연스레 들어오는 작품들을 거절했다.

이제부터라도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고.

마음을 독하게 먹기 위해 연락 오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이상한 소문들을 일부러 퍼뜨렸다.

영화를 정말 사랑하고, 애정하는 자신이 좋은 작품이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또 눈이 뒤집혀 가족들을 잊을까 봐.

다행히 이런 방법이 먹혔는지 점차 작품 관련 연락이 뜨문해지더니 지금은 거의 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웬 이상한 이름의 제작사에서 전화가 오긴 했지만.

이런 노력을 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낸 지도 1년이 지나고 있었으나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추억이 없는 딸아이는 아직도 자신을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흐음. 그럼 아빠도 같이 가자. 위험할 수도 있잖아.”

고진주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알겠어. 근데 가서는 잔소리하지 마. 알겠지?”

“그래그래. 제작사 이름이 뭐랬지?”

“아라비안필름.”

“응? 아라비안필름?”

“응. 이름은 좀 이상하지?”

고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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