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해보고 싶어요
허훈은 시나리오를 당장이라도 수정할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우선 그를 진정시켰다.
메인 주인공의 설정이 바뀌는 만큼 대대적인 수정이 될 거고, 그럼 그만큼 촬영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감독님. 수정하게 되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현재 허훈은 의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주일이요. 무조건 해보겠습니다.”
일주일이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가능해요? 그게?”
“네! 밤 새면 됩니다!!”
그러나 허훈의 열정만으로 그렇게 쉽게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주인공이 청각 장애라는 설정을 넣으면 시나리오만 바뀌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준비한 촬영 계획도 바뀐다.
다행인 건 아직 프리 프로덕션이 극 초반이라는 것.
또 우리가 가장 먼저 의견을 물어야 할 사람은 성희 역의 한보배였다.
시간이 부족한 만큼 다음날 열린 긴급회의에 한보배를 불렀다.
“이렇게 수정되면 어떨 것 같으세요?”
그녀는 생각 중인지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수정이 되면 먼저 한보배는 수어를 배워야 했고, 연기의 톤부터 아예 달라진다.
촬영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선 배우로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음, 당황스럽긴 하네요.”
그래. 이런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다.
이해한다.
그런데 심각하던 그녀의 표정은 금세 싱그럽게 변했다.
“근데 해보고 싶어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에게 차고 넘치는 게 재능이었다는 것을.
그렇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또 있었다.
바로 한우주.
가족이 장애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겪은 아픔이 있다면 직접 연기로 표현해내기가 힘들 수도 있다.
영화를 위해서 그녀에게 정신적인 고통까지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덧붙은 말은 의외였다.
“그리고 우주 때문이라도 꼭 하고 싶어요. 사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거든요.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그저 앞이 안 보이고, 소리가 안 들리고, 몸이 불편할 뿐이죠. 제가 연기를 끝내주게 잘해서 이 영화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면 다들 생각이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순간 존경심마저 들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그래. 이게 바로 한보배지.
“알겠습니다. 그럼 감독님. 수정 바로 시작하시죠.”
긴급회의가 끝난 뒤.
허훈은 조감독까지 옆에 앉혀두고 정신없이 수정작업에 들어갔고.
나는 한보배를 배웅하려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근데 우주는 잘 배우고 있어요?”
“아! 맞다! 대표님. 혹시 주변에 작곡하는 분 계세요?”
“작곡이요? 작곡은 왜요?”
한보배의 볼 근육이 씰룩 씰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건가.
“그게 있잖아요. 제가 또 너무 자랑인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렸는데. 글쎄 피아노 선생님이 어느 날 전화가 와서는 우주가 생전 처음 듣는 멜로디를 치더라는 거 있죠.”
“생전 처음 듣는 멜로디요?”
“네! 그래서 선생님이 우주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피아노로 옮겼다고 했다더라고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근데 피아노 선생님이 하는 말이 그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웠대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울컥하셨다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우주한테 다시 쳐보라고 했더니 이미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날아가 같은 곡은 칠 수가 없다고 했대요!”
이 말은 지금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데.
한보배는 도대체 숨은 언제 쉬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든 게 그럼 전문적으로 작곡을 배워보면 이미지가 날아가기 전에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구요.”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볼 근육을 씰룩거렸다.
“그런데요, 대표님. 어때요? 우리 우주 진짜 천재 맞는 거죠?!”
이거 자랑하려고 그렇게도 웃음을 참았던 거구만.
그 뒤로도 조잘조잘 떠드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 집안사람들 완전 사기캐네!
*
양상철은 맞은편에 앉은 네 명의 아이들이 조금 움츠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허허. 뭘 그렇게 긴장들을 해.”
살가운 말투에도 대표라는 자신의 위치 때문인지 그린 애플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먼저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상민이가 모질게 굴었다는 말 들었다. 버텨줘서 고마워. 정말로.”
그의 진심이 닿았는지 리더 다별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이사님도 다 저희 잘되라는 마음이셨던 거 알아요.”
동생의 마음을 저리도 넓게 헤아려주니 고마울 뿐이었다.
“그래. 오늘 너희들을 이렇게 부른 건 미국진출을 좀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기 위해서야.”
양상철은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테지만, 그보다 아이들의 의사가 먼저였다.
처음에야 다들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마음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선 미국진출이 연기된 건 상민이 사건 때문만이 아니야. 회사 쪽에서 좀 더 꼼꼼히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서 가려고, 연기 중인 거란다.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준비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양상철은 이제 아이들의 마음을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미국 활동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맞아?”
그린 애플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는데.”
그 말에 항상 미국진출 준비가 힘들다며 투덜대던 보은이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저는 가고 싶어요. 다별 언니가 맨날 빌보드, 빌보드 그랬을 땐 별 감흥 없었는데 이번엔 진지하게 한번 도전해볼래요. 빌보드.”
그러자 다별이 다급한 목소리로 보은을 말렸다.
“아니야. 나 때문이면 그렇게 안 해도 돼!”
“언니 때문 아니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보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가빈도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타로에서 올해 해외로 나가야 일이 잘 풀린댔어요. 저도 갈래요. 지금까지 연습한 게 아깝기도 하고.”
다별이 별수 없다는 듯 동참했다.
“동생들은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표정 변화가 없던 아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갈게요. 근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양상철은 아람의 말을 듣고, 멤버 모두가 미국 활동에 동의하면 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럼! 사실 상민이가 했던 계획을 모두 엎는 거라,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너희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들어주려고 했어. 자유시간도 좋고, 하고 싶은 활동도 좋고.”
아람의 무표정에는 미소가 어렴풋이 서렸다.
“저 연기해 보고 싶어요. 한 작품이라도 하게 해주시면 미국 가서 더 잘할게요.”
그 말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응. 유 선생. 통화 괜찮아?”
그린 애플이 모두 나간 뒤 양상철은 곧바로 유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 대표님.
“다른 게 아니고 말이야. 혹시 그린 애플 얘들 연기도 자네가 맡았나?”
-예! 네 명 다 제가 봤고, 아람이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가끔 수업하고 있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유 선생은 심각한 양상철의 목소리에 으레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회사가 큰일을 겪으니 직원들이 사소한 일에도 자꾸 겁을 먹는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혹시 아람이 연기는 어때? 곧 잘하나?”
그 질문에 유 선생은 아주 짧은 찰나 말이 없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대뜸 사죄했다.
“응? 뭐가 말인가?”
-아람이 연기 소질 있습니다. 그쪽으로 끼가 있어요.
양상철이 의아하며 물었다.
“뭐? 그런데 왜 말을 안 했나?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양 이사한테 보고하니 미국 갔다 오기 전까진 바람 넣지 말라고 하더군요.
양상민이 미국진출을 우선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선에서 커트한 것이다.
“후우. 그래도 이 사람아. 나한테도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대표님. 양 이사 뜻이 너무 완강해서······.
그래. 유 선생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아니야. 괜찮네. 근데 지금부터 고생을 좀 더 해줘야겠어. 아람이를 집중적으로 봐주게.”
-예?
“아람이가 연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직접 말하더군. 눈빛이 얼마나 또렷하던지 못 하게 하면 날 진짜로 원망할 기세였다니까.”
*
대대적인 시나리오 수정이 결정되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조금 줄었다.
이게 수정이 다 되어야 예산과 스케줄을 짤 수 있었고.
또 그것에 맞게 배우, 스태프 계약, 장소 섭외, 디테일한 촬영 구상 등을 진행할 수 있었기에 일주일은 거의 올 스톱 됐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은옥의 오디션이라도 먼저 진행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조감독님. 내일 은옥 오디션 공고 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대표님. 오디션 공고 나가면 기사 나갈 텐데 괜찮으신 거죠?”
조감독의 말은 오디션 공고가 올라가면 주목을 받았던 <투명한 사랑>의 장편 제작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시간문제라는 말이다.
“예. 배급사에 미리 말해뒀어요. 내일 미팅 있으니까 그때 더 이야기할 겁니다. 이왕이면 아예 대대적으로 뿌리려고요. 홍보도 할 겸.”
“넵.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고덕현 촬영 감독 섭외를 본격적으로 해볼까나.
시나리오 수정이 완료되면 또 할 일이 쏟아질 테니 미리미리 해놔야 한다.
그가 작품을 쉬고 있는 이유는 주변에 물어봐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 남은 방법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밖에 없다.
그의 연락처는 몇 명을 거쳐 그다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문자로는 나의 간절함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달칵.
-여보세요?
고덕현이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라고 합니다.”
필름 소리에 벌써 그의 목소리가 의심으로 변했다.
-아라비안필름이요?
“예. 영화 제작사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투명한 사랑>이라는 영화를 준비-.”
-죄송합니다. 안 합니다.
뚝-.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말도 안 끝났는데 끊을 줄은 몰랐다.
거의 안 사요. 급인데.
나는 혹시 모르니 정성스럽게 장문의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화드린 아라비안필름의 신바드 대표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희가 현재 진행 중인 장편영화-.]
총 16줄의 장문이었고.
이 정도의 절절함으로 보냈으니 답장에 희망을 걸어 볼 만도 했으나 아까 고덕현의 태도를 보니 안 올 것 같다.
헛된 희망이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렇다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찾아갈 수도 없고, 이것 참 막막하다.
들고 다니던 서류 가방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래. 답답할 땐 이게 최고다.
[신바드의 모험]
영화제 이후로도 가지고 다니며 매일 확인했는데 힌트는 올라오지 않았다.
이쯤이면 이제 올라올 때도 된 거 아니냐!
속으로 호쾌하게 외치면서 촤르륵 뒷부분으로 넘겼는데.
있다! 있어!
그곳엔 오랜만에 본 단어 힌트가 있었다.
[오디션, 가족애, 독특한 감성]
이번엔 단어가 3개다.
정보가 많아져서 좋다 싶다가도, 세 단어가 전혀 연결되지 않아 해석이 어려웠다.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단어는 오디션.
이건 아마 은옥 역을 뽑는 그 오디션을 말하는 걸 테고.
가족애랑 독특한 감성은 뭘 의미하는 걸까.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니 단어들은 항상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디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
뭐가 됐든 오디션이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왠지 고덕현 섭외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