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오디션 보시죠
그가 3년을 쉬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고덕현을 섭외하려면 이것부터 알아야 했다.
그래야 공략할 수 있다.
좁디, 좁은 영화판이니 몇 번만 전화해보면 대충 윤곽은 나올 것이다.
첫 번째로 회귀하자마자 촬영장 한복판에 떨어졌던 영화 <파노라마>의 촬영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형 잘 지내셨어요? 통화 가능해요?”
-응. 지금 잠깐 쉬는 시간. 근데 바드 오랜만이네. 무슨 일 있어?
“다른 게 아니고, 혹시 형 고덕현 촬영 감독님이랑 작품 해본 적 있으세요? 아니면 연이 있다던가?”
-고덕현 감독님? 아······.
그는 굉장히 고심하더니.
-아니. 전혀 없는데.
맥 빠지는 답을 줬다.
“그럼 요즘 뭐 준비하신다는 것도 모르세요?”
-아, 그건 들었다. 고 감독님 요즘 작품 활동 안 하신다고. 일 들어와도 아예 안 받으신다던데?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정말요? 혹시 왜 작품 안 하시는지 아세요?”
-잠깐만.
그러더니 뜬금없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모양이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마치 누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낮아졌다.
-이건 나도 들은 이야긴데 고 감독님이 워낙 열정이 넘치셨잖아. 그래서 만성피로에 번 아웃에 몸이랑 정신이 아주 아작나셨다고 하더라고.
“예? 진짜로요?”
-그래! 고 감독님 계속 따라다니던 형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럼 좀 신뢰가 가긴 하는데.
“그렇구나. 고급 정보 고마워요. 형.”
-딴 데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 비밀이야. 비밀.
이렇게 술술 이야기해줘 놓고, 비밀이란다.
이래서 영화판엔 비밀이 없는 거다.
-근데 갑자기 고덕현 감독님은 왜?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나중에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그래! 인마! 우리 술 한잔해야지?!
그 뒤로도 약속을 지금 당장 잡네, 마네 하는 바람에 전화는 5분이나 더 지속됐다.
그와의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항상 열정 넘치던 고덕현 촬영 감독에게 만성피로나 번 아웃이라는 단어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지독한 일 중독으로 현장에서 항상 프로페셔널한 모습만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촬영 기간엔 사람이 깐깐해지고, 촬영팀이 잘못이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독설가로 변했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독설을 퍼붓는 인간 쓰레기류는 아니었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온갖 쌍욕과 갈굼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촬영 현장이 집중도가 높지 않으면 사고도 날 수 있고, 작품에까지 영향을 끼치니 그러는 거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신기한 건 촬영 기간이 끝나면 원래 성격으로 돌아오는데, 아예 정반대로 바뀌었다.
배려 깊고, 겸손하고, 활발해지는 성격까지.
또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회귀하기 직전 영화판에서는 그의 유별난 아내와 딸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인터뷰엔 항상 가족이 1순위라는 말이 실려있을 정도였으니까.
말하고 보니 뭔가 굉장히 이상한 사람 같긴 한데 어쨌든 이런 사람이 번 아웃이라니.
아니다. 이런 사람이라서 온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통화한 영화 스태프 두 명에게 들은 말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 명은.
-고덕현 촬감(촬영감독)님? 나는 도박에 빠지셨다고 들었는데.
또 다른 한 명은.
-아! 맞다! 맞아! 고 감독님. 로또 당첨되셨다고 했어!
뭐야. 뭐가 이렇게 소문이 각기 다르고, 무성해?
만만치 않은 여정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최근 프리 프로덕션이 시작되면서 나는 간간이 주말에도 출근하고 있었다.
고덕현도 섭외해야 하지.
기타 촬영 스태프들도 꾸려야지.
아직 배우 캐스팅도 마무리가 안 됐지.
예산도 봐줘야 하지.
보통의 제작사 대표들이 하는 일들은 아니었지만, <투명한 사랑>은 달랐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처음 도입하다 보니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뭐, 처음만 잘 다져두면 두 번째는 편하겠지.
고시원보다는 아무렴 사무실이 일하기 편하기 때문에 토요일인 오늘도 사무실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도착한 사무실.
막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내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아라비안필름’이 있는 건물은 오래된 건물이라 주차장이 딱 두 칸 있었다.
평일에는 그마저도 항상 풀이어서 아직은 차가 없길 천만다행이다, 생각하며 지나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주차장에 처음 보는 외제 차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제 혼자 두 칸을 다 먹고서.
와. 어떤 양심은 없고, 돈만 많은 놈이!
후다닥 가서는 차를 구경했다.
하얀색의 차는 영롱했다.
아니! 이 차는 항공기 제작에나 쓰인다는 슈퍼 포밍 기술이 적용된! 그래서 고속주행 시에 마치 비행기 1등 석을 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그 차-!
지이잉-.
무슨 창문이 맨날 내려가냐.
“대표님. 출근하셨네요?”
응? 그런데 이 사람이 여긴 왜 있는 거지?
영롱한 외제 차의 주인은 도건우였다.
잠시 후 우리는 아라비안필름 사무실 안 조촐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커피를 달라기에 맥심을 타다 줬더니 되게 잘 먹는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시겠지만, 제가 말을 돌려서 못합니다.”
그는 뭔가 중대 발표라도 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더니.
“아, 예. 말씀하세요.”
“<투명한 사랑>에 출연하고 싶습니다.”
“예?!”
진짜로 중대 발표를 하고 말았다.
“저희 영화에요? 왜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기도 했고,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냥요. 제가 그 단편을 굉장히 재밌게 봤거든요.”
막무가내라더니 진짜네.
“근데 저희 영화는 남주가 투명 인간이어서 남자 배우 출연 분량이 거의 없는데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장편 시나리오는 또 다르겠지만, 단편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죠. 아무튼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싶어요.”
어우. 탑 배우가, 그것도 자기 멋대로라고 소문난 도건우가 이런 소릴 하니 적응이 안 된다.
허훈이 옆에 있었다면 또 사무실을 방방 뛰어다녔겠지.
“알겠습니다. 감독님하고 상의해볼게요. 아마도 한다고 하실 것 같지만요. 배역은 또 회의해 봐야 하니까요.”
“예. 우정 출연도 괜찮으니 연락 주세요.”
가끔 영화를 보다 보면 크레딧에 우정 출연과 특별출연이 나눠서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저 둘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길래 나누는 걸까.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둘에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특별출연은 돈을 받고.
우정 출연은 돈을 받지 않는다.
즉, 도건우는 지금 노페이로 우리 영화에 출연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
“저기. 대표님.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허훈의 저 물음은 3번째였다.
“감독님. 이해가 안 되는 건 저도 마찬가지니 그냥 외우세요! 도건우가 <투명한 사랑> 출연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 그게 무슨 배역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돈 안 받고도 출연하겠다!”
따발총처럼 내뱉자 그 말들이 멍하니 있던 허훈의 귓속으로 쏙쏙 박혔나 보다.
“지, 진짠 거죠?! 아, 잠깐만! 저 우는 거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갔네. 휴우.”
감독이라 그런가, 감수성이 풍부하네.
막창집에서도 울더니만.
허훈이 눈물을 닦으러 화장실로 들어가자 느낌적인 느낌이 딱 왔다.
이제 그 말이 어디선가 들려올 때가 됐는데.
“와우! 대표님! 이게 무슨 경사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식-!”
“안 됩니다.”
“응. 알겠어. 그렇게까지 냉정할 줄은 몰랐네.”
예정우는 조금 삐졌는지 옆에 있던 제작 PD에게 조잘조잘 불만을 늘어놓았다.
PD도 고생이다. 참.
“아, 그나저나 저희 다른 배역 캐스팅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옆에서 열심히 회의 내용을 메모하던 조감독이 대답했다.
“다른 배역들은 거의 마무리됐는데 은옥 역이 아직이요.”
조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장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허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지 맞는 배우가 없어요.”
도건우가 했던 말처럼 <투명한 사랑> 장편은 단편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갔으나 전체적인 줄거리가 바뀌었다.
그러면서 은옥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아마도 허훈은 단편에서 겪었던 은옥 역할의 배우 때문에 트라우마라도 생긴 모양이다.
“기성 중엔 감독님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다는 거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흐음,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오디션 보시죠. 좀 힘들어도 한번 찾아봅시다.”
회의가 끝난 후 허훈이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진짜 손을 번쩍 들고 신청했다.
순간 해보지도 않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지.
“저기, 대표님. 저 정말로 이런 말씀 드리기는 싫었는데요.”
불길하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제가 지금 시나리오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전생에서야 꼰대 문화가 조금씩 없어지면서 나아졌지만.
지금 시대의 감독들은 대부분 성정이 굳고, 고집이 세 타인에게 이런 고민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특히나 시나리오에 관한 것을 제작사 대표에게는 더더욱.
“어느 부분이요?”
그럼 허훈도 어렵게 물은 것일 테니 나도 도움을 줘야지.
그는 잽싸게 시나리오를 가져와서는 고민을 내뱉었다.
“성희(한보배)에게 뭔가의 핸디캡을 하나 더 주고 싶어요. 그럼 투명 인간에게 더 의지할 수 있을 것 같고, 나중에 직접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도 당위성이 보충될 것 같거든요?”
내가 명확한 해답을 줄 순 없겠지만, 어떤 문제든 토론을 하다 보면 답이 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열심히 받아쳤다.
“근데 그건 성희(한보배)가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설정으로 충족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조금 더 극적인 설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근데 그 설정을 뭐로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물론 허훈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그는 지금 이 둘의 사랑을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만들 수 있는 설정을 추가하고 싶다는 건데 나라고 해서 그게 금방 떠오르-.
이게 또 생각이 나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감독님. 그냥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이니깐 한번 참고만 해보세요.”
“네!!”
허훈의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제가 생각해본 건 성희가 청각 장애를 가지게 되면 어떨까입니다.”
“청각 장애요?!”
“예. 어릴 때 가정폭력으로 장애를 얻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성희는 더 고립되면서 투명 인간에게 더욱 의지할 거고, 은옥은 수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여서 같이 투명 인간을 찾으러 간다. 어때요?”
허훈의 눈은 더 커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까지 커지다가 멈췄다.
“대표님.”
“예?”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해졌지.
불안하게.
“진짜 천재 아니세요?!”
그는 또 사무실을 방방 뛰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