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반전되는 순간
양상철과 함께 합심해서 준비한 수십 개의 기사가 일제히 인터넷을 도배했다.
『배우 도건우, 지금의 양상철 대표야말로 나를 가장 인간적으로 대우해 줘』
『그린 애플 미국진출 무기한 연기. 하지만 우리는 대표님을 믿어』
『부국제 신데렐라 한보배,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배우의 꿈을 포기했을 것』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 대표와 함께 전체 기자회견 예정』
『화분 소속 연예인들은 왜 목소리를 내는가?』
다행히도 양상철이 좋은 관계를 맺어놓은 기자들이 많아 여론은 순식간에 반전됐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와, 뭐야. 대표라는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인가 보네. 소속 연예인들이 모두 두둔할 정도면.]
[그냥 회사에서 기사만 내는 거 아닙니까?]
[맞아. 기자들한테도 돈 뿌렸을지 누가 앎?]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저기요. 화분 엔터 욕하는 사람들 팩트를 좀 봅시다. 경찰에서도 간부 혼자 벌인 일이라는데 왜 다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욕하기 바쁜 건지?]
[기자회견 곧 한다니까 그때 이야기합시다. 지금은 중립!]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제 우리에게 넘어온 흐름에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
장혜리는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운전대를 잡았다.
수습기자를 시작한 지도 어언 3개월.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요 며칠 연예계에 큰 사건이 생겨 하루에 2시간도 못 자는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선배. 어디로 가면 된다고요?”
“화분 엔터. 거기 1층에서 한다더라.”
장혜리는 3개월간 체득한 스무스한 운전기법으로 핸들을 틀었다.
“근데 보통 배우들이 이런 상황에 대표 따라 기자회견에도 나와요?”
“아니. 절대 안 나오지. 자기 소속사가 사회 란에 오르내리는데 보통은 다들 몸 사리기 바쁜 놈들이 대다수야.”
장혜리는 점점 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화분 엔터 소속들은 왜 그런 기자회견을 한다는 거예요?”
“대표가 시키지 않았을까? 까놓고 말해서 지금 화분 망하기 일보 직전이잖냐. 다 한통속 아니냐고. 그러니 계약 아직 안 끝난 애들은 끌려 나올 수밖에.”
“근데 또 찾아보니까 대표님이 그럴 분이 아닌 것 같던데.”
남자는 그녀를 빤히 보더니 물었다.
“너 혹시 그쪽 가족관계 얽혀 있고 그런 거 아니지?”
“에이. 제가 그런 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근데 혜리야. 사람 겉으로만 보고는 모르는 거다. 특히 이쪽은. 사기꾼들이 인상 더 좋은 거 알지?”
장혜리가 ‘진짜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구시렁댔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근데 화분 간판인 도건우가 정면으로 나선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도건우가 왜요?”
“너 도건우 실제로 본 적 있냐?”
장혜리가 말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고집이 세서 남의 말 절대 안 들어. 하기 싫은 걸 남이 시킨다? 절대 안 하지. 작품도 무조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해. 그래서 소속사를 얼마나 많이 바꿨는데. 처음 화분 들어갔을 때 우리끼리 내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내기요? 선배님은 얼마에 거셨는데요?”
남자가 씁쓸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1년. 30만 원 걸었는데. 쓰벌.”
*
기사가 올라간 바로 다음 날.
예고했던 기자회견을 화분 엔터 건물 1층 로비에서 진행했다.
긴 테이블엔 침울한 표정의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들이 주르륵 앉아있었다.
그중에는 도건우도, 그린 애플도, 한보배도 보였고.
테이블 앞으로는 이미 불러놓은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 가운데 앉아있던 양상철은 조용히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화분 엔터 대표 양상철 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 움직임을 모두가 따랐다.
모두 일어선 열댓 명은 허리를 최대한으로 굽혀 숙였고.
파바바바밧-!
그 모습에 기자들의 손가락은 바빠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허리를 편 양상철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이번 화분 엔터에서 벌어진 접대, 뇌물 공여 사건으로 국민 여러분께 큰 상심을 끼쳐드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개인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밝혀지긴 했으나 화분 엔터의 모든 관계자가 같이 책임질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떠한 조사도,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기자들 옆에 서 있었기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그래도 대표가 직접 나와서 사과하니 보기에 나쁘진 않네.”
“그러게. 사과도 진심이 느껴지고.”
“글쎄. 나는 뭔가 작위적인 느낌도 드는데.”
그래. 저렇게 생각하는 기자들 분명 있을 줄 알았다.
자, 그럼 슬슬 양상철 몰래 준비한 이벤트를 시작해볼까.
양상철 옆에서 나를 계속 보고 있던 도건우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에 놓여 있던 마이크를 집었다.
그저 자신의 기자회견에 따라 나온 줄로만 알고 있던 양상철은 돌발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거, 건우야.”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집은 제가 지킵니다.”
도건우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자 기자들의 손가락이 다시 바빠졌다.
파바바바밧-!
“안녕하세요. 배우 도건우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양상철 대표와는 전혀 상의 되지 않은 화분 엔터 소속 전체 연예인의 공통된 의견임을 알려드립니다.”
기자들이 동요했다.
“도건우가 직접 나선다고?”
“그것보다 도건우 맞아? 뭐가 저렇게 침착해?”
“침착한 걸 떠나서 놀랍네. 도건우가 메인으로 나설 줄은 몰랐는데.”
“야야, 일단 사진부터 올리고 보자. 단독 붙여서.”
“저, 선배님. 지금 누가 먼저 올렸는데요······.”
“야! 이 새끼야! 그럼 빨리 종합으로라도 올리던가!”
기자들은 너도나도 노트북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저희는 한낱 소속 연예인이 아닌 가족으로서 회사와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니 회사의 책임은 저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가족으로서 모두가 합심하여 이 잘못을 잡아 나가겠습니다.
또한-.”
흐름이 완전히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
다행히도 여론은 급격히 돌아왔고, 화분 엔터 이미지는 더 좋아지기까지 했다.
[도건우 원래도 알고 있었는데 멋있는 사람이었네.]
[저 이쪽 업계 사람인데 도건우 고집 센 거로 유명합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임.]
[오빠! 저는 처음부터 믿었어요!! 사랑해요! 도건우!]
[잘못을 인정한다는 건 쉽지 않지. 건우에겐 회사가 집이었구나.]
[욕하던 사람들 다 어디 갔음? 그렇게도 빼액! 거리더니만.]
[화분 엔터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당연히 <투명한 사랑> 장편 투자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신 대표. 이번에 진짜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저 하나 믿고, 영화에 투자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걸 제가 갚은 거라 생각해 주시죠.”
-아니에요. 내 이번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필름마켓에 간 건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니까요? 이렇게 귀인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허허!
흠. 귀인은 좀 오글거리는데.
그래도 전화기 너머 양상철이 원래의 그 인정 많던 목소리로 돌아와 다행이다.
양상민은 뇌물 공여, 공금횡령이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으나 초범이라는 점과 자수를 참작하여 3,000만 원의 벌금형으로 끝이 났다.
화분 엔터 이사직에선 물러나기로 했다.
잠시 속세를 잊고 살겠다며 어디 산으로 들어간다고 그랬던 것 같다.
제일 걱정했던 YJ E&M의 배급은.
<워싱>과 <투명한 사랑> 두 작품 다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영화계는 소문이 금방 퍼져서 우리가 개입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아무래도 찝찝하지만, 해준다니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3월이 막 시작된 어느 따뜻한 봄날.
본격적인 <투명한 사랑> 장편의 프리 프로덕션이 시작되었다.
“나은 대표님이 의상이랑 분장 쪽 연결해준다고 하셨거든요. 연결되면 제가 PD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대로 계약 진행하시면 될 겁니다.”
옆에 있던 정 PD가 답했다.
“예. 대표님.”
허훈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은 대표님이 직접 하시는 건······.”
영화 의상은 일반적인 패션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보통 자신의 창작물을 내놓는 디자이너와는 달리 영화에서의 의상은 그 캐릭터의 성격, 상황 등을 나타내는 하나의 연출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인력이 존재했다.
허훈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닐 거다.
그저 나은에 대한 팬심에서 하는 말이겠지.
내가 가만히 쳐다보자 허훈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죠? 아무래도 안 되겠죠. 하하.”
“예.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신 장편도 잘 찍어서 또 영화제 가시면 되죠.”
허훈은 내 말에 ‘아! 그런 방법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열정 넘치는 자세로 고쳐 앉아 회의에 집중했다.
“아, 그리고 감독님. 촬영 감독으로 생각해둔 분 혹시 계세요?”
허훈이 손가락으로 볼펜을 쌩쌩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볼펜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신기함이 도를 넘어서고 있을 때쯤.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사실 제가 학생 영화만 찍었다 보니 아는 사람도 없고, 진짜 워너비 말해도 됩니까?”
“그럼요. 어떻게든 모셔오겠습니다.”
“그게······.”
누군데 저렇게 뜸을 들여.
“고덕현 촬영 감독님요.”
와, 허훈. 투명 인간한테 볼 맡기라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악랄하구만.
“그, 혹시 제가 아는 그 고덕현 촬영 감독님 말씀하시는 거 맞죠? 동명이인 아닌 거죠?”
허훈이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고덕현! 영상미의 남자 그 고덕현!”
고덕현 촬영 감독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너무나 유명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유명감독이 섭외 1순위로 꼽았던 대단한 촬영 감독이었고.
인위적인 조명이 아닌 자연광을 활용하는 능력이 특출나서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영화인 1위에 뽑히기도 했었다.
지금 허훈은 이런 촬영 감독의 섭외를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고.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허훈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역시, 힘들겠죠.”
또 저렇게 갑자기 시무룩해지면 나는 뭐가 되냐고.
“감독님. 그래도 제가 뱉은 말이 있으니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정말요?! 와! 역시 대표님!”
사무실을 방방 뛰어다니는 허훈을 보고 있자니 혹 시무룩했던 건 다 연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고덕현 촬영 감독이라.
섭외만 된다면 영화를 위해서라도 탁월한 선택이자 기회였다.
고덕현이 선택한 영화라는 타이틀만 붙어도 흥행에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그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찌어찌 연락이 닿아 내가 그를 설득했다 쳐도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전생에서 그는 빗발치는 촬영 감독 제안을 3년 정도 전부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나도 모른다.
“뭐, 부딪치다 보면 되겠지······.”
말은 이렇게 뱉었지만, 속으론 무지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이 그 3년 중, 막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