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잘 이겨내면 됩니다
“상민아······.”
양상철은 자신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있는 동생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렇게 가까이서 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은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형님. 그렇게 안쓰럽게 부르지 맙시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는 동생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런 거냐.”
아무 표정이 없던 양상민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형님 싫어했던 거 압니까.”
“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혼란스러운 양상철에게 그의 동생은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망나니 옆집 영수 놈이랑 싸움이 붙었습니다.”
양상철은 영문 모를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자기를 맨날 때린다던 영수 놈 형이 그새 달려와 동생을 지킨다고 막아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동생의 이야기는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나도 기다렸습니다. 형님이 와서 저 덩치 큰 놈을 때려눕혀 줄 줄 알고요.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형님이 뭐라고 했는 줄 압니까.”
“뭐라고 했는데?”
“다짜고짜 그 영수 놈한테 사과했습니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양상민은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
그랬기에 그날도 자신의 동생이 무언가 잘못을 했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옆집 사람들에게 사과한 것이었는데.
“동생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형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왜 영수 놈이랑 싸운 건지 압니까?”
양상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철이 형 호구라고, 맨날 동네 더러운 거지들 돕는다고, 너는 그렇게 사는 형 둬서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쯤 양상민은 초등학생이었고, 자신은 중학생이었다.
당연히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배움을 따랐을 뿐이었는데.
동생이 저런 이야기를 듣고 다닌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에도 양상철은 궁금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양상민이 형을 보고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좋다고 했습니다.”
양상철은 먹먹함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동생을 바라봤다.
동생은 그 눈빛이 낯간지러운지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살려보고자 한 일인데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죄는 달게 받고 오겠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돌아 문을 나서려던 그는 잠깐 멈춰 섰다.
“형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 대신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말해봐. 들어줄게.”
“그린 애플 얘들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미국진출 꼭 성공시켜 주세요.”
*
다음 날 나는 한강 변의 최고급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좋은 데서도 사네. 4502호라고 했나.”
아파트의 까마득한 위를 올려다보니 45층이면 아마도 맨 꼭대기 층인 것 같다.
입구로 들어가니 아파트 1층이 무슨 호텔마냥 전부 로비로 꾸며져 있었다.
45층으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어디에서 타야 하나 싶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덩치가 산만 한 보안 조끼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아, 4502호 왔는데요. 여기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습니까?”
덩치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되물었다.
“4502호요? 제대로 찾아오신 거 맞습니까?”
흠, 뭔가 기분 나쁜 표정인데.
“예. 맞습니다.”
덩치는 기세를 꺾지 않고, 여전히 나를 막아섰다.
“거기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서 사시는 분 아니면 못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예? 그럼 뭐, 아파트인데 인터폰? 그런 것도 없습니까?”
“있습니다만.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있다는 거로는 연락 못 드리죠. 직접 전화 통화하시죠.”
나도 사실 그의 매니저를 통해 약속을 잡은 거라 아직 직통 번호는 모르는데.
“잠시만요.”
그의 매니저에게라도 전화해보려고 핸드폰을 꺼내려던 그때.
“응? 신 대표님?”
“아! 건우 씨!”
운동이라도 하고 왔는지 땀을 닦던 도건우는 내게 반가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매니저 형이 말한 분이 대표님이셨어요?”
나를 막아서던 덩치는 도건우를 알아보고 꾸벅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거봐. 제대로 찾아온 거 맞다니까.
어쨌든 지금 덩치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답했다.
“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운명은 너한테 달렸다.
45층인데 엘리베이터가 빨라서 그런지 순식간이었다.
어휴. 한강이 아주 한눈에 보이는 통창이라 눈이 다 부시네.
깔끔하게 꾸며진 내부를 잠시 구경하고 있는데 도건우가 물었다.
“차는 뭐로 드릴까요? 커피?”
“예. 커피 주세요.”
거실에서 주방으로 향한 그는 곧 머그잔 2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앉으세요.”
우리는 거실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는 게?”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렸다.
도건우가 내 제안을 거절하면 끝이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분 엔터 양상민 이사님 곧 자수하실 겁니다.”
“예? 자수라면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예. 양 이사님이 YJ E&M 상무에게 접대, 뇌물로 청탁을 하셨어요. 그리고 공금횡령까지요.”
“아니, 양 이사님이 왜요?! 대표님 동생이잖아요?”
“배우들 광고, 작품 캐스팅 등 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겠죠.”
“이거 대표님도 아세요? 충격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도건우는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양상철부터 살뜰히 챙겼다.
“당연히 아세요. 충격도 받으셨고요.”
“하, 참나.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네.”
그는 갑자기 일어나 거실에 놓인 양주 진열장을 열더니 묵직한 것을 하나 꺼내왔다.
“대표님도 한잔하실래요? 저는 도저히 맨정신에 못 듣겠네요.”
고개를 저었다.
도건우와 이야기를 끝내더라도 할 일이 많다.
그는 곧 크리스털 잔에 얼음까지 채워와선 꼴꼴꼴 양주를 따르더니 한 모금 마셨다.
“으. 이제 살 것 같네. 근데 저한테 직접 와서까지 이야기를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화분 엔터 소속도 아닌 분이?”
“저한테도 책임이 좀 있어서요. 그보다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걸 부탁하러 왔어요.”
도건우가 크리스털 잔을 들으며 물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양상민 이사 사건이 터지면 언론은 기업들보단 화분 엔터를 더 물어뜯을 겁니다.”
“그건 당연하겠죠. 우리야 뭐 빽이 있나. 유착관계가 있나. 그냥 한낱 연예기획사 나부랭인데.”
어휴. 객관화가 심하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그렇게 되면 화분 엔터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흠. 그건 안 되는데. 여기 좋은데 나는.”
다행이다.
양상철이 도건우를 단편영화 상영회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는 양상철을 많이 따르고 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서 좀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도건우 씨부터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 전부가요.”
*
며칠 뒤 대한민국은 떠들썩해졌다.
[캐스팅 과정에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대기업 간부들에게 억대의 뇌물을 주며 공금까지 횡령한 엔터테인먼트의 간부가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부기춘 기자가 보도합니다.]
TV 속에선 누가 봐도 화분 엔터의 건물이 나오고 있었고.
남성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 엔터테인먼트 간부 양 씨는 3년 전부터 대기업 간부들에게 소속 배우의 광고와 영화 출연 등의 청탁을 위해 현금은 물론 술과 골프접대까지 이어왔습니다.
3년간 이어온 이 청탁 행위는 죄책감을 느낀 양 씨의 자수로 끝이 났습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대기업 간부 이 씨를 적발해 곧 검찰에 기소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터졌구나.
나는 얼른 핸드폰으로 관련 기사들의 댓글을 확인했다.
[저거 누가 봐도 ㅎㅂ 아님?]
[ㅎㅂ? 진짜 ㅎㅂ이에요? 헐! 나 그린 애플 팬인데!]
[그럼 지금 저기 소속 배우들 다 실력이 아닌 로비로 배역 따내고 그랬다는 겁니까? 허위사실 유포하지 마시죠!]
[위에 놈은 지능적 안티인가. 그렇게 생각 안 하던 사람들도 그렇구나. 하겠네.]
[우리 오빠는 잘못 없다구욧!!]
[그래서 대기업은 어딥니까? 이건 뭐 뉴스가 알려주는 게 하나도 없네.]
[대기업 ㅇㅈ라고 알고 있음.]
[인정이요? 그런 대기업이 어디 있음?]
[아재요. 아재. 모르시면 그냥 가만히 계세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느 기업인지 유추부터 시작해서 다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바쁜 모습이다.
다른 기사들을 살펴보니 벌써 불매운동까지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제부턴 속도전이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서 전화를 걸었다.
화면에 찍힌 세 글자는 [도건우].
-여보세요?
“예. 건우 씨. 지금 기사 보셨죠?”
-네. 와, 진짜로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잘 이겨내면 됩니다. 그럼 준비 중이던 기사 보도하겠습니다. 기자회견 준비해주세요.”
*
“이 상무.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다니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배인규 회장은 작은 키의 사나이였지만.
그가 앉아있는 의자 뒤에 걸린 커다란 호랑이 그림 액자 때문인지 꼭 그 호랑이가 배 회장을 지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학송 상무는 차마 그의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금 이게 죄송하다고 될 일이 아닌데.”
분명 뒤에 보이는 호랑이는 버럭 화를 내는 듯했으나 배인규 회장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기만 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배인규는 등을 떼고 있던 의자에 풀썩 기대며 눈을 감았다.
“책임을 져야지. 책임을.”
그 말에 이학송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책임이라고 하신다면······. 아! 그, 그건 안 됩니다! 처자식이 있습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만 한 것 아닙니까! 회장님!”
그때.
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 둘.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들은 이학송을 양쪽에서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회장님!!”
그의 절규에도 배인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온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이학송이 나가고 이번엔 여비서가 들어왔다.
“회장님. 알아보니 한 영화 제작사에서 들춰낸 일이라고 합니다.”
그제야 눈을 뜨는 배인규.
“영화사? 규모가 얼마나 되는데?”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오지 않은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비서는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늘렸다.
“그게······.”
“뭔데 그래.”
“이번에 영화 제작이 처음인 신생 제작사입니다. 그 영화로 저희 쪽에 배급 심사를 넣었다고 합니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심사 통과된 사항이던데 철회할까요?”
배인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여론이 어떻다고?”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최대한 막고 있습니다. 조만간 수그러들 것 같습니다.”
그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여비서에게 말했다.
“그럼 그냥 해줘. 이번 판은 뭔가 감이 안 좋아. 그냥 짜둔 판대로 흘러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