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25화 (25/140)

#25화. 내가 해야 할 일은

YJ E&M 최세준 과장에게 양상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다 도출해낸 추측은 이거였다.

지금 양상민은 온갖 곳에 뇌물을 뿌리며 청탁 중인 건 아닐까.

이런 일은 전생에서도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지금이라고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다만, 분명 YJ E&M 배급팀 상무와도 접대와 뇌물로 맺어진 사이일 텐데 왜 그가 배급사를 택했냐는 것이다.

어쩌면 양상민의 의중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배급사는 어떻게 보면 제작사보다 갑의 위치에 있다.

뼈 빠지게 영화 찍어 놓으면 뭐 하나.

극장에서 안 걸어주면 말짱 도루묵인데.

그래도 회귀 전에는 OTT 플랫폼이 활성화돼있어서 좀 나았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그들의 말 한마디면 끔뻑 죽었어야 할 시대인 것이다.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감독조차 이런 판에선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배급사에서 꽂는 배우를 막을 힘은 더더욱 없을 테고.

이런 더러운 판이다 보니 상업 영화 제안이 들어와도 독립영화만 찍는 감독도 있었다.

내 눈엔 그게 자신은 입김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양상민이 배급사를 선택한 건 제일 꼭대기에 있는 놈만 잡고 흔들겠다.

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양상민의 만행을 까발리면 어떤 형태로든 나와 내 주변에 불이익이 온다는 것.

제작비의 3분의 2를 투자한 화분 엔터가 휘청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배급을 맡게 될 YJ E&M도 무사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화분 엔터 소속 배우와 그린 애플도 피해를 보겠지.

한보배까지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번 생에서 모든 불운을 피하겠다는 내 말을 지킬 수 있을까.

우리는 짜장면을 꼭 먹어야 한다는 허훈의 고집에 결국 고급 중식당으로 합의를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우와! 이걸 다 시킨 거야? 대표님?”

예정우 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이렇게까지 꽉 채울 줄 몰랐지.

양장피, 팔보채, 고추잡채, 칠리새우, 전복냉채, 오향장육 등등.

커다란 회전 테이블 위로 요리란 요리는 다 주문해놓으니 무거워서 테이블이 잘 돌아가지 않은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들 많이 드세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내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행복한 표정으로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요 며칠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고민의 결론을 내렸다.

불이익에 대해선 아직 생각하지 않기로.

어차피 더 먼 미래를 위해 곪은 부분은 지금 도려내는 것이 맞다고.

만약 사건이 터져 YJ E&M에서 배급해주지 않겠다는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상관없었다.

배급사는 또 찾으면 된다.

화분 엔터도 무너지지 않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옆에서 막 칠리새우를 집은 한보배의 어깨를 톡톡 쳤다.

“보배 씨. 그때 전화로 이야기했던 탕비실 있잖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눈이 동그래진다.

“탕비실이요?”

“예. 보배 씨가 막 1인 2역 하면서 재연해 줬던 이야기요.”

“아아! 네! 생각나요! 근데 그건 왜요?”

“혹시 거기서 좀 순둥순둥하게 표현했던 직원분 연결해 줄 수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뭔가에 깜짝 놀란 듯 칠리새우를 앞접시에 툭 떨어뜨렸다.

“그분은 왜······.”

뭘 이렇게 놀라지.

“예?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그러자 그녀는 동그란 눈을 한두 번 감았다가 뜨더니 냉큼 앞접시에 놓인 칠리새우를 다시 집었다.

“아, 그런가요?! 난 또! 근데 직원분들은 제가 잘 몰라요. 레슨 선생님이면 몰라도.”

그때.

근처에서 듣고 있던 한보배의 매니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

지잉-.

지잉-.

한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저기. 저 왔는데 혹시 어디 계시나요?

주변을 둘러보자 카페 입구에서 서성이는 한 여자가 보인다.

일어서선 손을 흔들었다.

“여깁니다!”

주춤주춤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째 한보배는 성대모사에도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따라 했던 목소리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

상상했던 이미지랑도 비슷하네.

어느새 내가 있는 테이블까지 온 그녀는 낯을 많이 가리는지 조심스레 인사했다.

“화분 엔터 회계팀 박지연 대리입니다.”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녀가 선 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길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우선 앉으시죠.”

“아, 네.”

한동안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을 열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원하는 커피를 주문해 가져다주며 좀 더 이 자리가 편하게 느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저, 정말로 익명 보장되는 거 맞나요?”

“예. 당연합니다. 받는 불이익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표님께 직접 말씀드릴 거니까요.”

“아······.”

머뭇거리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분 엔터로 이직한 지는 3년 차인데 저 왔을 때부터 계속 그러셨어요. 전에 있던 회사도 이쪽 계열이었던 터라 뭐 접대나 그런 게 기본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했던 회사는 없었거든요.”

“심하다는 정도가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지연은 눈을 한번 꾹 감더니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휴우. 양상민 이사님 지금 공금에도 손대고 계세요. 물론 이사님은 제가 모르는 줄 알고 계시지만, 그게 숨겨지나요. 뭐.”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혹시 회사에서 이 사실을 또 알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공금에 관한 건 저만 알고 있어요. 이제는 더 보고 있기도 뭐한 찰나에 연락받고 여기까지 나온 거고요.”

사실을 들으니 더 복잡해졌다.

이걸 터뜨리려면 증인이 아닌 증거들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에 빠지자 박지연은 자신이 매고 온 숄더백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혹시 몰라서 정리해둔 거예요. 내부고발이다 뭐다 제가 직접 하진 못할 것 같아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그래. 세상엔 이렇듯 숨겨진 인재들이 많다니까.

*

“이, 이게 다 뭡니까?”

양상철은 내가 내미는 서류 봉투 안 서류들을 보고 말까지 더듬었다.

“양상민 이사가 그동안 진행한 접대와 뇌물 내역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왜.”

그는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이건 꼭 확인해야 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양상철은 망연자실한 얼굴을 가로저었다.

“전혀요. 상민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니······.”

“그럼 독단적으로 진행하셨던 거군요. 서류를 확인해 보니 작품마다 화분 엔터 소속 배우가 캐스팅되면 돈을 지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하신 것 같고요.”

그는 내 말을 멍하니 듣고만 있다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내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려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야. 맞는 벌을 받아야겠지요.”

혹시나 전생처럼 양상철이 동생의 죄를 그냥 덮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이번엔 그럴 생각이 아닌 눈빛이었다.

“신 대표. 부끄러운 일을 보여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제게 제일 먼저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동생분 일인데 먼저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예. 이 일을 내게 맡겨 줄 수 있겠습니까. 잘못에 대한 대가는 꼭 받겠지만, 먼저 상민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사업한다면서 지금까지 같이 고생해 준 동생의 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차피 나는 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리려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대신 대표님도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서류는 내부인이 아니면 줄 수 없는 서류입니다. 그러니 이걸 제가 누구에게 받았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정도는 덮어 주시죠.”

“그럼요. 사건의 본질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책임지고, 묻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이제 마지막 말을 해볼까 하는데 양상철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신 대표. 어쩌면 나머지 투자금이 조금 늦게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투자를 한다고 해서 절대 한 번에 모든 금액을 주진 않는다.

몇 차례 절차에 걸쳐서 지급하고, 정산을 받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데.

<투명한 사랑> 투자금은 현재 겨우 1차 지급이 진행된 상태.

20억에서 받을 돈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이게 터지면 외부에서 조사도 나올 테고, 내부도 정신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지급하도록 할게요.”

투자금이 아예 통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대표님. 그 건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무슨 말을?”

할 말이 남았다는 내 말에 그는 다시금 긴장하는 눈치였다.

“양상민 이사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화분 엔터 전체가 피해를 보는 건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대중들도 돌아설 테고······.”

항상 인정 많던 그 얼굴엔 근심만이 가득했다.

“네. 그럴 겁니다. 그런데 대중들이 돌아서면 다시 돌려놓으면 됩니다.”

내 말에 양상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터뜨리기 전에 준비를 좀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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