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24화 (24/140)

#24화. 인연이란 게 참 끝이 없다

<워싱>의 번역이 한 달 만에야 끝이 났다.

원래 영화 한 편 번역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주.

정말 급하게 의뢰하면 일주일 안에 받는 경우도 있었으니 <워싱>은 이례적으로 오래 걸린 것이다.

그 이유는 전해성이 필요하다고 한 시간이 한 달이었기 때문이다.

딱히 급한 것도 없었고, 시간을 더 달라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 상관없었다.

영화 퀄리티를 위해서라면 느긋하게 기다려줄 수 있지.

어쨌든 <워싱>은 한 달 만에야 자막을 다 입힐 수 있었고, 작업이 다 끝난 뒤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상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 기대를 하고 틀었는데······.

“응? 갑자기 전화가 왔네. 나 통화 좀.”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예정우는 울리지도 않은 핸드폰을 들고 후다닥 뛰쳐나갔고.

그다음엔.

“음, 대표님! 제가 급하게 하던 일이 있어서 마무리를 좀······.”

“아? 조감독님도? 저도. 하하하.”

“어이쿠! 3시에 미팅이 있었던 걸 깜박했네!”

“가, 같이 가요! 피디님!”

이렇듯 조감독, 허훈, 제작 피디, 실장 순으로 다 나가버리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결말은 나만 볼 수 있었다.

그렇게도 무섭나.

뛰쳐나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영화는 어땠냐고 물으니 다들 재미는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공통된 의견으론 절대 영화가 무서워서 나간 것은 아니라는 핑계가 뒤를 이었다.

뭐, 공포 영화는 무서워야 잘 팔리니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번역도 깔끔하게 입혀진 걸 보니 전해성이 심혈을 기울인 것도 느껴졌다.

자, 그럼 번역도 완료했으니 다음 순서로 가볼까나.

이제 해야 할 일은 배급사 미팅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YJ E&M 배급팀 최세준 과장입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입니다.”

우리는 서로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드디어 YJ E&M 측과 첫 미팅을 하는 날.

“우선 저희 쪽에서 만든 기획서입니다.”

일주일간 열심히 PPT로 정리한 두 작품의 기획서 출력물을 전달했다.

“네. 꼼꼼히 만들어 오셨네요. 배급 심사할 때 윗분들이 좋아하시겠어요.”

최세준은 <워싱>의 기획서를 휙휙 넘기다가 이미지로 넣어놨던 여자 얼굴 포스터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어유! 깜짝이야! 이거 엄청 무서울 것 같은데요? 번역도 다 하셨네요?”

“예. 저희 쪽에서 가시사 해봤을 때는 꽤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그러시구나. 요즘같이 공포 영화 핫한 시대에 그것도 태국 공포라니. 대표님 안목 있으시네요.”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최세준이 아무리 좋게 본다 한들 배급 확정에는 어차피 아까 언급했던 윗분들의 입김이 셀 것이다.

“아무래도 저희가 <워싱>을 직접 보고 결정하겠지만. 이건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워싱>에 대한 짧은 의견을 마친 그는 이번엔 <투명한 사랑>의 기획서를 펼쳤다.

“와. 이게 그거구나. 부국제에서 상 받으셨죠? 저 그때 레드카펫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잖아요.”

하필이면 또 그걸 본 사람일 줄이야.

“아, 보셨습니까?”

최세준이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세우자 형광등이 비친 안경 유리가 반짝였다.

“예! 한동안 부국제 신데렐라 뭐 이런 걸로 떠들썩했잖아요. 그때 회사 여직원들이 대표님 이야기를 얼마나 하던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반응했다.

“하하, 그랬습니까. 작은 사고였죠. 뭐.”

그런데 기획서를 한 장 더 넘겨보던 최세준은 뭔가를 보고 의아한 얼굴이었다.

“응? 이분 화분 엔터 소속이네요?”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한보배의 프로필.

“예. 맞습니다. 최근에 계약했어요.”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아, 이러면 제가 결재받기가 더 수월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이지?

내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자 최세준이 말이 이었다.

“아하. 대표님은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저희 팀 상무님이 화분 엔터 양 이사님이랑 굉장히 친분이 두터우시거든요.”

양상민은 안 나오는 곳이 없구나.

그런데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매니지먼트 이사가 방송국 PD도 아니고, 영화감독이나 제작사도 아닌 배급사 상무와 친하다?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다면 모를까 일로 만난 사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께름칙했다.

대표인 양상철도 나에게 소개해 줄 배급사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러시군요. 그건 몰랐습니다.”

“모르실 수도 있죠. 여하튼 여주인공이 화분 엔터 소속이니 배급 심사는 무난하게 통과할 것 같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나도 다행인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기획서를 한 장 더 넘기던 최세준은 오늘 열두 번도 더 놀란다.

“어! 이거 감독님이 운서대학교 영화과 나오셨어요?!”

“졸업 예정입니다. 아직 졸업한 건 아니라서요.”

“와. 그럼 더 대단한데요? 입봉이 진짜 빠른 감독님이시네? 이거 홍보로도 쓸 수 있겠어요. 그건 둘째치고, 아까 말씀드린 저희 상무님 아드님이 여기 다니세요!”

인연이란 게 참 끝이 없다.

“하도 자랑하셔서 이름이 기억날 것 같은데. 그 뭐라더라. 이주호? 뭐 그런 이름이었어요. 혹시 아세요?”

전생 같았으면 제가 운서대학교 학생들 이름까지 어떻게 압니까.

했겠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하, 참. 잘 알다마다요.”

*

“아, 예. 상무님. 잘 지내셨습니까? 제가 통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양상민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엠보싱이 콕콕 박힌 의자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에이, 양 이사. 미국물 한번 먹어보려고 애쓰는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이해해야지.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기 전에 한 번 뵈어야지요. 저번에 모셨던 곳은 어떠셨습니까?”

-아, 거기? 좋긴 한데. 애들이 좀······.

“아, 그러셨습니까! 그럼 제가 조만간 좀 더 심혈을 기울여서 물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그래. 아 그보다 말이야. 내가 전화한 이유가 우리 배급 심사에 화분 엔터 여자애 주연인 영화가 하나 올라왔더라고. 나야 뭐 화분 엔터라 바로 심사 콜 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말이야. 이것도 거기에 포함되는 거 맞지?

양상민의 표정은 찰나에 와득 구겨졌다.

‘이놈은 안에 돈벌레가 사나. 진짜.’

하지만 이 상무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내 비출 수는 없었다.

“아아, 예. 당연히 드려야지요. 이런 건 또 확실한 건 바이 건 아니겠습니까. 제가 요즘 배우 쪽은 신경 못 쓰고 있으니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 항상 화분 엔터 소속 배우들이 1순위지! 어쨌든 이 작품도 부탁할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이학송 상무와 전화를 끊은 양상민 이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엔 그저 회사에 발전을 위해서였다.

물러터진 형은 절대 못 할 일이었기에 자신이 총대를 메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은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질 뿐이었다.

더 비싼 술. 여자. 돈.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은 어느새 카드빚에 허덕이는 사회초년생과 같았다.

이쪽저쪽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모두 들어주려면 이사에게 허락된 권한으론 택도 없었다.

그러다 결국 회삿돈까지 만지게 되었고.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은 너무나도 쉬웠다.

양상민은 이제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린 애플의 미국진출을 아주 보란 듯이 성공으로 이끄는 것.

그래야 더는 이따위 더러운 짓은 하지 않고, 떵떵거릴 수 있었고.

형에게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의 확고한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꼭 해내고 말 거라고.

*

어느새 달력은 2월로 넘어갔다.

회귀한 후로 해가 바뀐 것도, 모자라 한 달이나 지났다니.

시간 빠른 건 이번 생도 마찬가지다.

나는 꽃다발 2개를 들고, 운서대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옆으로 시꺼먼 카니발 한 대가 쓱 서길래 움찔하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하도 세상이 흉흉하니 언제든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는 내 경계를 무시하듯 카니발의 창문은 지잉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풉! 대표님!! 뭘 그렇게 놀라세요!”

아, 한보배구나.

“아휴. 보배 씨. 놀란 거 아닌데. 하하. 썬팅을 어느 업체에서 했는지 아주 잘했네요. 나중에 차사면 저도 하게 어딘지 좀 알려주세요.”

민망함에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데 그녀 얼굴 양옆으로 무언가가 비집고 나왔다.

“대표님! 저희도 왔어요!”

“아, 다훈이랑 우주도 왔구나.”

“네! 훈이 형이랑 나경 누나 졸업식인데 와야죠! 꽃다발도 되게 큰 거 사 왔어요!”

“그래그래 잘했다.”

한보배는 잠깐 앞에 있던 매니저에게 뭐라고 하더니 동생들과 함께 내렸다.

얼른 흰 지팡이를 펼치는 한우주를 도왔고.

다 내린 아이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렇게 내가 한우주를 부축하면서 우리는 조금 걸었다.

“매니저 오빠한테 저희끼리 간다고 그랬는데 우주 때문이라도 위험하니 데려다준다고 하셔서요. 주차장에서 기다리신다니 저희는 얼굴만 보고 금방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양상철이 좋은 매니저를 붙여줬나 보다.

어찌 그리 형제가 다른지.

“그래요. 아니면 끝나고 매니저님도 같이 밥 먹어도 괜찮고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모르는 분이라 괜히 서로 어색해하실까 봐.”

“이제 촬영 들어가면 몇 달은 볼 텐데요. 그전에 친해지면 좋죠. 뭐.”

“그럼 오빠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신이 나는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만났기에 우리는 금방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사람 많네요.”

“그러게요. 잘못하면 몰릴 수도 있겠는데요?”

“에이, 요즘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따로 활동을 안 하니깐. 가끔 한두 분 정도?”

“그런 것치고는 너무 시선이 집중됐는데요?”

운서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선 그녀가 유명할 것이다.

자신의 학교 학생이 영화제에서 상을 탔고, 화제도 됐으니 그 영화 주연 배우에게도 관심이 가는 건 지극히 정상인 거다.

“그, 그렇네요. 여긴 조금 따갑긴 하네.”

그때.

저 멀리 학사모를 쓴 두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대표니임!”

“선배니임!!”

허훈과 나경이다.

“뭘 그렇게까지 뛰어와요.”

“오셨다는데 당연히 버선발로 뛰어와야죠!”

나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

“여기요. 변변치 않지만 그래도 사 왔습니다. 졸업 축하해요.”

“어휴. 뭘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옆에 서 있던 한다훈과 한우주도 주춤주춤 꽃다발을 꺼냈다.

“형. 누나. 저희도 사 왔어요. 축하드립니다.”

나경은 그런 둘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양손을 어찌 못하고 볼 옆에 두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아익! 너무 귀여워! 나도 나중에 이런 아들 낳아야지!!”

“우선 결혼부터-! 윽!”

언젠가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하여튼 이런 모자란 친구와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나고 밥 먹어요! 우리!”

“예. 알겠습니다. 사진도 한 장 찍죠? 거기 다들 서보세요.”

모두가 운서대학교의 캠퍼스를 배경으로 주르륵 섰다.

“자, 찍습니다.”

“잠깐! 대표님은요?”

나경이 얼른 와서는 핸드폰을 뺏어 들고,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았다.

“저기. 죄송한데 저희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부탁을 받은 남학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한 장 더 찍을게요! 가운데 두 분 학사모 한번 던져보실래요?”

찰칵!

그 뒤로도 남학생은 10장은 더 찍어 주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 부탁받은 사진 상당히 공들여 찍는 건 이때부터 그랬구나.

그 덕분에 우리는 꽤 괜찮은 사진들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이거 저 보내주세요!”

“저도요!”

“저도!!”

사진을 모두에게 보내주자 허훈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저는 탕수육!!”

“무슨 이런 날도 중국집이야!”

“원래 졸업식은 짜장면이야! 모르냐 너!”

오늘도 역시 투덕거리는 허훈과 나경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그리고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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