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누구 뒷담화를요?
“자자! 다들 조금만 더 힘내자!”
그린 애플 리더 다별은 연습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세 명을 다독였다.
“언니는 어쩜 그렇게 안 지쳐요. 나는 죽겠는데······.”
흘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던 보은이 다별에게 묻자 옆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동갑내기 가빈이 입을 열었다.
“언니라고 안 힘들겠냐. 힘들지. 저 냉미녀 컨셉도 힘든 티 안 내려고 유지한다는 게 우리 팬클럽 계의 정설이잖아.”
다별이 슬몃 웃었다.
“얘들아, 힘들면 우리가 빌보드 1위 한다는 생각을 한번 해봐. 그럼 막 힘이 나!”
다별이 하는 말엔 웬만하면 토를 달지 않던 보은이 반박했다.
“에이, 언니. 그건 너무 갔다.”
항상 티격대던 가빈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래요. 언니. 이건 오랜만에 보은이 말에 동감.”
그때.
“뭐가 동감이야.”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춤 연습으로 후끈했던 공간엔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너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갈 거야?”
문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람은 양상민 이사.
그는 하이에나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별이 얼른 허리를 굽혔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그녀는 최근 간신히 고친 옛 버릇이 다시 생겨났다.
연습생 시절 항상 입에 달고 살던 ‘죄송합니다.’가 또 입에 붙은 것이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아람은 다별의 ‘죄송합니다.’ 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마디 하고 싶던 걸 꾹 참는 표정이다.
“미국 갈 날 얼마 안 남았어. 거기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은 줄 알아?! 가면 연습할 시간도 없이 스케줄 소화하느라 돌아다니기만 할 텐데 이러고 자빠져 있을 시간이 있냐고!”
또 시작이다.
요 며칠 양상민은 매일 연습실로 찾아와 그린 애플을 들들 볶고 있었다.
그렇다고 네 명 모두가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미국진출 준비로 매일 새벽부터 춤, 노래 연습, 영어 공부까지 해내느라 녹초였고.
살을 더 빼라는 양상민의 요구에 극한까지 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람은 화를 삭여 가며 참고 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희 열심히 하고 있어요.”
다별은 아람의 말에 아무도 들리지 않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저 말을 꾹 참은 것은 저 말로 인해 이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러나 아람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눈에 힘을 더 세차게 주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끔은 당근도 주세요. 채찍질만 하지 마시고.”
양상민은 어이가 없었다.
“하, 참나. 요즘 애들 진짜 당돌하네. 야. 아람아. 너 이제 내가 옆에서 계속 편하게 말 걸어주고 하니까 내가 누군지도 까먹었냐?”
“저 금붕어 아닙니다. 양상민 이사님.”
이대로는 사태가 점점 커지기만 할 뿐이다.
다별은 다급히 아람의 손목을 잡았다.
“아람아. 그만해. 얼른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다별의 얼굴은 평소 차갑던 온도보다 더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아람의 눈엔 그 무섭고도 차가운 눈빛이 슬프게만 보였다.
옆에서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보고 있는 두 동생까지도.
“휴우. 알겠어.”
그녀는 양상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있을 때 잘해에~ 후회하지 말고!”
“뭐 하냐?”
나는 사무실 바닥을 물걸레로 신나게 닦다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으아악! 아, 형 뭐해요!”
“출근하는 사람한테 뭐 하냐는 건 말이 좀 심한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 있어?”
들고 있던 물걸레를 한쪽에 세워두고 대답했다.
“좋은 일이야 항상 있죠.”
“오올. 신바드. 여유만만인데!”
예정우는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올려두고, 좁은 탕비실로 가 머그잔을 꺼내 들었다.
“너도 커피 마실래?”
“아니요. 괜찮습니다.”
“짜식이. 담배에 커피에 몸에 안 좋은 건 다 끊었네. 하여튼 무슨 일인데?”
“저희 투자 다 받았어요, 배급사도 곧 연결될 것 같고요.”
예정우는 배급사라는 말에 호들갑을 떨었다.
“아! 진짜? 어딘데?!”
그도 그런 게 우리가 배급사를 좀 늦게 찾은 격이니 나에게 표현은 안 했어도 전전긍긍 중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웠던 류봉수의 방문으로 나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나머지 제작비였던 10억 모두를 흔쾌히 투자하겠다고 결정해 준 그에게 혹시나 해서 연결해 줄 배급사를 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연락이 왔다.
소개해 줄 배급사를 찾았다고.
“YJ E&M이요. 대박이죠?”
YJ 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 하나로 극장, 미디어, 음식, 유통 등 다양한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중 YJ E&M은 YJ 그룹의 계열사로 국내 배급사 중 1위였고, 그 기록은 몇 년째 깨지지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확정만 되면 대박인 거다.
다행히도 YJ E&M 측에서 <워싱>과 <투명한 사랑> 두 작품 모두에 관심을 표했고.
이 건으로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와, 대표님!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 회식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요즘 예정우 입에서 왜 회식 이야기가 안 나오나 했다.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그리고 형님. 저희 회사 제일 많은 지출이 회식비예요. 회식비.”
“쩝. 알겠어······.”
감정 변화가 참 한순간인 사람이다.
그래도 축 늘어진 예정우에게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날려볼까나.
“뭐, 하나 더 진행 중인 게 있는데 이거 잘 되면 소고기 쏩니다!”
“소고기이!! 뭔데! 뭔데! 대표님 그게 뭔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았다.
“그때 부국제에서 샀던 영화 <워싱> 말입니다.”
“아, 그거. 번역 맡긴다면서. 통번역대학원 학생 이랬나?”
“예. 맞아요. 그분이 의뢰 수락하신다고 연락 왔습니다.”
그런데 예정우는 뭔가 께름칙한 얼굴이었다.
“근데 아직 학생이라며 믿을만한 사람한테 맡긴 거 맞아?”
꿀꺽!
목젖까지 스쳤던 말을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 전설의 전해성이자 김바로가 의뢰를 받았다는 건 우리 영화 초대박이라는 소립니다!’
*
지잉-. 지잉-.
퇴근 후 고시원에 앉아 루틴을 지키던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온 한보배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대표님! 잘 지내시죠?!
음, 어제도 통화했는데.
“예. 그럼요. 보배 씨도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네네! 오늘도 레슨이 많이 잡혀 있어서 정신이 없었어요!
“그렇구나. 우주는 학원 잘 다녀요?”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전화기 너머로 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왜 진작 안 보냈나 싶어요. 선생님이 직접 전화까지 오셨다니까요.
“뭐라고 왔는데요?”
-천재래요. 천재!
한우주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알고 있던 피아노 학원을 추천했다.
-사실은 한번 보내볼까 하다가도 망설였거든요. 일반 학생들이 있는 학원을 가면 기죽지는 않을까 하고요.
나도 그녀의 마음이 왠지 이럴 것 같아 더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근데 대표님 말대로 나름 잘 적응하고 있나 봐요! 집에 가면 새로 사귄 친구 소개하느라 잠들 때까지 수다를 떤다니까요!
“다행이네요. 우주가 정말로 재능이 있다면 까짓것 뭐 가수 한번 시켜보죠.”
-에이! 대표님! 그건 너무 가셨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의 환한 표정이 얼굴에 선했다.
“아,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별일 없다고 연락드린 거죠. 아! 맞다! 그런데 대표님. 제가 오늘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상한 이야기요?”
그녀가 만약 앞에 있었다면 고개를 연신 끄덕이느라 머리카락들이 사방으로 날렸을 목소리였다.
-네! 회사에 들른 김에 매니저 오빠가 잠깐 회계팀에 영수증 줘야 한다고 해서 6층에서 기다렸거든요.
“6층이요?”
-아아, 내 정신 좀 봐! 회계팀이 6층에 있어요! 여하튼 그러다 오빠가 좀 늦길래 목이 말라서 둘러보니깐 탕비실이라고 적힌 방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요?”
-하하. 이런 말 드리긴 뭐 하지만······.
한보배가 잠시 뜸을 들였다.
-제가 탕비실이라는 곳에 환상이 좀 있었거든요!
“네? 무슨 환상이요?”
-회사 생활을 해본 게 아니니까 드라마 같은 곳에서만 봤는데. 막 그곳엔 사회에 찌든 멋있는 직장인들이 딱! 커피 내려서 먹고, 과자도 막막 쌓여 있을 것 같고!!
그냥 과자가 먹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들어가 봤어요?”
-들어가 보려고 살금살금 가서는 문을 잡았는데 이미 살짝 열려 있는 거예요. 안에선 말소리가 들려오고.
“누가 있었나 보네요.”
-네. 그래서 제가 그래도 배우인데 직원분들 사용하는 곳에 막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하면서 몸을 돌렸는데!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하는 재주가 있네.
예능도 잘할 것 같은 스타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한보배의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안에 있던 분들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누구 뒷담화를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제가 한번 재연해드릴게요. 잘 들어보세요.
무슨 또 재연까지.
배우들은 다 이런 건지.
한보배만 이러는 건지 헷갈릴 때쯤.
그녀는 목소리까지 큼큼, 다듬더니 재연을 시작했다.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자기야!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이번엔 조금 순둥순둥한 여자 목소리.
-과장님. 저 진짜 이제 못하겠어요.
다시 날카로운 여자가 말을 받았다.
-왜? 또 이사님이 뭐라고 하셨어?
1인 2역을 잘도 왔다 갔다 한다.
그나저나 이사님? 양상민 이사를 말하는 건가?
이사가 양상철 동생만 있는 건 아닐 테니,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뭐라고 하시는 건 둘째치고, 자꾸 저한테 비용처리 안 되는 영수증들을 한 묶음씩 가져오시니까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요.
-아직도 그러셔?
-예? 과장님도 아세요?
-그럼! 이사님 그러시는 거 좀 됐어.
-근데 대표님이 이런 거 진짜 싫어하시잖아요. 두 분은 형제시니까 이거 걸리면 괜히 저만 모가지 댕강 되는 거 아니에요?
형제라.
양상민 이사가 맞다.
-에이, 설마. 그래도 책임은 지시겠지.
그 뒤로도 한보배는 어떻게 다 외운 건지도 모를 만큼의 긴 대화를 한참이나 늘어뜨려 놨고.
그에 대한 감탄과 동시에 내 머릿속의 촉은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양상민 이사.
이거 분명 뭐가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