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야, 언제 오냐?
아직 사무실엔 외부인과 이야기를 할 만한 마땅한 공간조차 없어 주로 이용하던 카페로 향했다.
마주 앉은 류봉수는 기분이 좋은지 아까부터 실실 웃고 있었다.
우리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어도 대뜸 투자하겠다는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순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앞에 놓인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저희 영화에 투자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제가 잘 몰라서 여쭤보는 건데 영화 미디어 연구소에서 영화 투자도 하시는 겁니까?”
그는 자신의 연구소를 소개할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저희 연구소는 영화의 미학과 기술을 복합적으로 연구하는 시설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영화 발전이지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워크숍, 학술대회, 세미나 등등 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그러시군요.”
“예. 사실 영화 투자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독립영화 위주로 진행했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상업 장편영화 투자 예산이 책정되었습니다.”
“그 영화사업에 저희 영화가 선정된 거고요?”
류봉수는 빙긋 웃었다.
“예! 맞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군요. <투명한 사랑> 제작비가 얼마나 됩니까?”
가뜩이나 투자금이 모자랐는데 넝쿨째 들어온 것이다.
물론 연구소에서 10억을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순 제작비만 30억입니다. 이 중 20억은 투자받은 상태이고요.”
줄곧 웃던 류봉수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30억이요?”
“예. 좀 많지요. 전 스태프 표준근로계약 진행할 예정입니다. 거의 인건비라고 보시면 돼요.”
그 뒤로 류봉수는 내가 덧붙인 설명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잠시간 말이 없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 제가 사실 <투명한 사랑>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습니다.”
아, 그래서 찾아온 거였구나.
어쩐지 영화가 아직 유통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했다.
“상영회 때 보셨나 보군요.”
“아니요. 심사위원이었습니다.”
“예?”
그 고마웠던 심사위원인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투명한 사랑> 장편 소식 들리면 꼭 투자해야지 했는데 역시나 소문이 돌더라고요. 부랴부랴 연구소 직원들 모두에게 동의를 받느라 좀 늦었습니다.”
우리 영화를 좋게 본 뒤 나름 고군분투하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거 참 다행입니다. 조금이라도 제 행동이 굼떠 이런 영화를 놓쳤다면 평생의 후회가 될 뻔했습니다.”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대표님 생각이 정말 남다르십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시다니요.”
“누군가는 언젠가 했을 일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했다.
“사실 5억을 생각하고 왔습니다.”
협상하러 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패를 이렇게도 바로 까는 협상가가 어디 있겠는가.
“5억만으로도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
그는 눈빛은 마치 독립운동가처럼 비장했다.
“남으셨다는 10억. 모두 투자하고 싶습니다.”
*
전해성은 기숙사로 돌아와 컴퓨터 전원 버튼부터 눌렀다.
아까 만난 이름이 특이한 제작사 대표는 굉장히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최종 의뢰 수락 시 자신에게 지급할 페이 등 간단한 설명과 함께 비밀유지 서약서를 받아내더니 더는 할 말도 없는지 영상이 담긴 CD를 건넬 뿐이었다.
아, 그 말을 덧붙이긴 했다.
복사 불가능한 CD이니 유통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활짝 웃으며 했더랬지.
그때 조금 오싹하긴 했다.
여하튼 젊어서 그런지 보통의 대표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멋있는 동네 형 같았달까.
그래도 그렇지.
자신을 만나게 되면 왜 영화를 먼저 보고 의뢰를 받는지 정도는 물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결정하면 연락을 달라는 말뿐이었다.
또 그의 모든 말투와 행동에선 당당함과 확신이 묻어있었다.
영화에 그렇게도 자신이 있나?
그의 태도를 보니 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졌다.
그래서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영화부터 시청할 준비를 한 것이다.
“자, 그럼 준비를 좀 해볼까.”
그에겐 공포 영화를 볼 때 꼭 지키는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로 혼자 볼 것.
누군가 옆에 있으면 공포심은 반이 된다.
술을 좋아하는 룸메이트가 기숙사에 없는 걸 보니 아마 자신이 영화를 다 볼 때까진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로 불을 끌 것.
후다닥 가선 불을 끄고 돌아왔다.
세 번째로 헤드셋을 낄 것.
공포 영화는 소리가 8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용하던 귀를 꼭 감싸는 헤드셋까지 끼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전해성은 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조심히 클릭했다.
약 2시간 후.
화면은 검게 바뀌었고, 영화에 참여한 태국인들의 이름이 하나둘 올라오더니 OST까지 바뀌었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전해성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내용은 심플했다.
태국 곳곳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시체가 기괴한 모습으로 세탁기 안에서 발견됐다는 점.
사건을 파헤치던 형사는 죽은 사람들 모두 생전에 똑같은 귀신을 목격하며 고통스러워했다는 실마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날.
형사에게도 같은 귀신이 찾아온다.
이때부터 영화는 공포 영화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시작한다.
귀신의 소름 돋는 괴기한 모습과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로 귀를 괴롭히며 숨도 못 쉬게 만들더니 결말을 향해 치달았다.
상영 내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태국의 배경은 공포를 배로 만들어주었고.
자칫 긴 설명이 들어가 지루할 수도 있는 장면이 전혀 없었다.
결말 또한 깔끔했다.
끝나자마자 감독이 누구인지, 속편 계획이 있는지 외국 사이트까지 들어가선 정보를 찾아댔으니 정말 오랜만에 발견한 수작이었다.
전해성은 그렇게 한참을 인터넷으로 <워싱>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차차, 자신은 의뢰를 위해 이 영화를 본 것이지.
시간을 보니 저녁 9시가 넘었다.
의뢰 수락 연락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내일 눈 뜨자마자 오늘 만난 대표에게 전화해 이 영화를 꼭 번역하고 싶다고, 아니 자신이 꼭 해야만 한다고 말해야겠다.
다짐하며 일어나 방 불을 켜고 침대 위에 앉았다.
아직도 쾌감이 가시지 않던 그의 눈에 문득 방 한쪽에 쌓여 있는 빨랫감이 들어왔다.
미루다 미룬 탓에 오늘은 꼭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데.
읏차! 언제나 피곤한 몸을 일으켜 바구니에 빨랫감을 주섬주섬 담고는 공동세탁실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다.
전해성은 바구니를 급하게 내려놓고, 난데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코골이새끼]라고 적힌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다.
[야. 언제 오냐?]
곧 답장이 왔다.
[왜]
[아, 그냥. 언제 오냐고.]
[뭔 마누라 같은 소리야.]
[아씨. 됐고. 치맥 먹을 건데, 오든가 말든가.]
[지금 감.]
절대 세탁실에 혼자 가는 게 무서워 룸메이트를 부른 건 아니었다.
*
“이야. 잘 꾸며놨네?”
“당연하지. 우리 연구소의 자랑이 이 소장실이다! 하핫!”
지성미는 부산국제영화제 이후로 약 두 달 만에 친구 류봉수를 찾았다.
류봉수가 연구소장으로 일임된 후로는 처음 방문한 그의 사무실이라 이것저것 구경할 게 많았다.
누가 영화광 아니랄까 봐, 사방에 빽빽이 걸린 포스터 덕에 벽지가 무슨 색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 정도면 병 아니냐?”
“크큼! 너 요새 말이 좀 심하다. 그건 그렇고, 앉아. 우리 이제 다리 튼튼할 나이 지났다.”
지성미는 폭신한 의자에 풀썩 앉았다.
“무슨 소리야. 아직 한창인데. 부탁할 건 뭐야?”
“역시 우리 성미가 성미 급한 거로는 1등이지. 암.”
“그거 꼭 나 죽을 때도 장례식장 와서는 아이고, 우리 성미가 성미 급해서 먼저 갔네에! 할 것 같으니까 하지 마.”
“좋은데?”
류봉수는 한참을 키득대다 본론을 꺼냈다.
“너 부국제(부산국제영화제)에서 <투명한 사랑> 기억하지?”
“그럼. 그 영화를 어떻게 잊냐.”
“그거 장편 진행 중이더라. 연구소에서 투자하기로 했어.”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네 고집이야. 모르는 사람 있냐. 할 줄 알았다. 근데 그거랑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제작사 대표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아직 배급사를 못 찾았더라고.”
“배급사?”
“응. 네가 원래 배급으로 시작해서 그쪽에 아는 사람 많잖아. 그러니까 다리 좀 놔줘.”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그럼 오늘 밥 네가 사는 거냐?”
류봉수는 무슨 말이냐는 얼굴이었다.
“응? 아니. 나 요새 거지야.”
“부탁하는 입장이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해? 아니 그보다 왜 거지야?”
그가 대답을 조금 주춤거리자 지성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사고 쳤구나.
“너 혹시 도박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지?”
혹시나 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다행히도 아닌지 류봉수는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뭔 소리야! 내가 옛날부터 그런 거 질색하는 거 몰라?”
“아는데, 너무 수상해 보이니깐 물어봤지! 그래서 그럼 무슨 사고를 친 건데?”
“티 많이 나?”
역시 큰 사고를 친 게 분명하다.
“응. 얼굴에 써 있어. 뭔데.”
“나 <투명한 사랑> 투자했다.”
지성미는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말투로 물었다.
“뭐? 그 이야기는 아까 했잖아.”
“그러니깐 투자를 했다고.”
그녀는 평소 장난이 심한 류봉수가 지금 자신과 말장난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하, 참나. 그래서 얼마나 했는데?”
“5억.”
“크게 지르긴 했네. 근데 어차피 연구소 측 적정예산인 거 아니야? 나이 들어 소심해졌냐. 지 돈도 아니면서-.”
지성미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땅 친 것 같았다.
“응? 너 설마?!”
류봉수가 씩 웃었다.
“맞아. 연구소에서 5억. 내 돈으로 5억. 총 10억 투자했다.”
지성미에 눈이 동그랗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느닷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찾는 게 없는 눈치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소파는 쿠션도 하나 없어! 너 미쳤어?!”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류봉수가 얄밉게 말했다.
“당연히 너 온다니까 치웠지!”
지성미는 얼른 테이블 위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곤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영화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야?”
“응. 이거부터 보고 이야기해.”
류봉수는 서류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데.”
“거기 제작사 대표가 <투명한 사랑> 전 스태프한테 도입할 표준근로계약서 가안이란다.”
“뭐?”
지성미는 얼른 서류를 살폈다.
“이제 그 영화 하나로 이쪽 판이 들썩거릴 거야. 우리가 항상 원해왔던 거잖아? 당장에 할리우드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노력은 해야지. 그 이야기 듣는데 너 같으면 5억을 안 부을 수 있겠냐.”
그녀는 손에 들린 A4용지를 거칠게 넘겼다.
종이엔 촬영 시간을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넘기지 않는다는 내용과.
상호 간의 합의 후 연장된다면 수당이 보장된다는 내용 등의 현재의 영화판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항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게 다 돈이 얼만데. 이걸 진짜로 하겠대?”
류봉수는 어떤 면에선 자신보다 더 괴짜였던 신바드를 떠올리며 답했다.
“응. 아주 확신에 찬 얼굴이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