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21화 (21/140)

#21화. 투자하고 싶습니다

투자도 받았겠다.

이제 슬슬 <투명한 사랑>의 스태프들을 꾸려야 했으니 사무실을 구해야만 했다.

우선 형편에 맞는 사무실을 구하기 위해 예정우와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대표님. 나 괜찮은 사무실 찾으면 정식 출근하는 거 맞지?”

“예. 형님이 뭐 찾는 건 또 기가 막히게 잘하지 않으십니까.”

정식 출근할 사무실을 찾는 거였으니 당연히 급여도 챙겨주었고.

그렇게 꼬박 보름을 돌아다닌 끝에 홍대 구석에 있는 한 허름한 사무실을 구할 수 있었다.

[아라비안필름]

작은 평수의 사무실이었으나 간판까지 내다 거니 뿌듯했다.

전생에서도 처음엔 이렇듯 작은 규모로 시작했었다.

그땐 정말 모든 일이 다 잘 될 줄 알았지.

이번 생엔 꼭 하고 싶던 일들을 다 해내고 말 것이다.

“이야. 우리 바드 드디어 사무실 생겼네!! 이 형이 다 눈물 나려고 한다!!”

옆에서 같이 간판을 올려다보던 예정우는 나보다 더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문득 전생에서 나와 고생했던 이 과장이 생각났다.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얼른 회사 키워서 이번에도 같이 일해줄 수 있냐고 물어야지.

어디에 있든 업계 최고 대우로 스카우트해서 이번 생엔 고생 안 시켜야지.

머릿속엔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다.

“으으. 근데 너무 춥다. 벌써 12월이라니 시간 빠르다. 빨라.”

어느새 하얀 입김과 군고구마의 계절이 오고 있었다.

“그러게요. 얼른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가요. 형님. 오늘 회식-.”

회식이라는 단어가 끝나기도 전에 예정우는 후다닥 벌려져 있던 짐들을 2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무실이 2층인데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고생 좀 해야 한다.

“대표님! 거! 빨리빨리 좀 합시다! 나 해 떨어지기 전에 먹고 싶어!!”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이곤 나도 짐을 옮기는 일에 합류했다.

그렇게 비품들을 사무실 안으로 채워 넣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축하드려요!”

작은 개업 화분을 들고 있던 허훈과 한보배, 나경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나경은 얼른 팔을 걷어붙이며 물었다.

“이거 포장 뜯으면 돼요?”

“어휴! 놔둬요. 놔둬. 저희끼리 하면 됩니다. 괜히 몸 쓰지 말아요.”

그러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허훈은 두꺼운 패딩까지 내팽개쳐 놓은 채 책상을 들어 옮기고 있었다.

“이사할 땐 서로 돕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연락도 안 하시고! 섭섭합니다!”

그들은 일부러 부르지 않은 것인데······.

말없이 예정우를 쳐다보니 그는 내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중이다.

“오면 괜히 고생만 하시니 연락 안 드렸죠. 이제 촬영 들어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이번엔 한보배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사무실 이산데 연락 안 하신 건 너무하셨어요! 그나저나 대표님 오늘 회식이라고 들었는데.”

예정우를 다시 쳐다봤다.

이번엔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다.

“아니. 다 같은 식구인데 회식에 안 부를 수가 있겠어?”

뭐, 맞는 말이긴 하지.

오늘 회식도 시끌벅적하겠군.

한보배가 예정우의 행동에 짧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오늘 저희 집에서 회식하는 거 어때요? 집들이 겸이요.”

*

모두가 달라붙어 정리하니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이사는 금방 끝났다.

다 같이 이동한 한보배의 집은 조금 오래된 빌라였다.

2,000만 원으로 그렇게 호화스러운 곳을 얻을 순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유명해지면 사정은 점점 나아질 테니 걱정은 없었다.

현관문 앞에 선 한보배가 주섬주섬 열쇠를 꺼내려는데.

벌컥!

“누나 왔어?!”

문을 연 이는 그녀의 동생으로 보였다.

“다훈아! 깜짝이야. 집 잘 지키고 있었어?”

다훈이라 불린 아이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그 뒤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아이는 얼추 중학생 정도.

다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애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응! 누나만 기다렸지!”

그러고는 뒤에 있던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보배 누나 첫째 동생 한다훈입니다! 우주야. 너도 인사해야지. 자 형 손잡고 나와.”

“으응.”

그리고 우리는 잠시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다훈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나온 아이는 다른 손으로 앞을 휘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히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가 든 아이가 수줍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배 누나 둘째 동생 한우주입니다.”

한우주는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티 없이 맑았다.

어째 사춘기라도 올 법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둘은 우리와의 대화가 재밌었는지 저녁 늦게까지 옆에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놀라셨죠. 숨기려던 건 아닌데. 먼저 말을 꺼내기도 이상해서요.”

한보배는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와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애가 있는 것이 뭐 어떻습니까. 저렇게도 밝은 아이들인데. 저는 외동이라 보배 씨가 부럽습니다.”

내 말에 모두는 한마디씩 보탰다.

“맞아요. 둘 다 너무 훤칠하던데요?”

“예! 그리고 저렇게 누나 말 잘 듣는 동생들도 드뭅니다.”

“그럼요! 저는 여동생이랑 아직도 싸워요. 웬수. 웬수!”

마지막 예정우의 말에 한보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가요? 사실 말씀은 못 드렸지만, 이사 오기 전 같이 살았던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셨거든요. 그 때문에 꼭 집을 나와야 했고, 아르바이트도 그래서 했던 거였어요.”

형편이 어려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까지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어쨌든 이렇게 셋이 오순도순 살 수 있게 된 것도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리고 저 동생들 때문이라도 꼭 성공할 거예요. 꼭 성공해서 둘 뒷바라지 잘하고 말 겁니다!”

그녀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좀 뜬금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아이들 꿈이 뭡니까?”

그녀는 잠시 골똘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음, 다훈이는 아무리 물어봐도 저한테 그런 이야길 잘 안 해서 아직 모르겠는데 공부는 열심히 해요. 그리고 우주는······. 음악을 좀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음악이요?”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팔불출처럼 변했다.

“예! 이게 꼭 제 아이 천재 아닌가요? 라고 묻는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말 못 했는데 음계를 정확히 안다니깐요?!”

*

전해성은 오늘도 힘겨운 통번역대학원 생활을 끝마치고, 기숙사 책상에 앉았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메일을 확인했다.

한 달 전 구인 구직 사이트에 번역 알바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구직 글의 내용이 조금 황당한 탓인지 한 건의 의뢰도 받지 못해 오랜만에 메일함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

한 통의 메일이 와있었다.

[영화 번역 의뢰합니다.]

전해성은 얼른 메일을 더블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사이트 보고 연락드립니다.

제작사 아라비안필름에서 수입한 영화 <워싱>을 의뢰 드립니다.

영화를 먼저 확인하신 후 최종 번역 의뢰를 받으신다길래 우선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 밑으로는 영화의 대략적인 장르, 내용, 러닝타임 등과 아라비안필름이라는 곳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신바드? 이름 진짜 특이하다.”

처음 번역 알바를 해보려고 한 것은 외국 영화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가장 빨리 보고 싶은 그런 충동적인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또 재미없는 영화를 몇 번씩 고통스럽게 보면서 번역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구직 글에 영화를 먼저 본 뒤 최종 의뢰를 받겠다고 쓴 것인데.

사실 진짜 연락이 올 줄 몰랐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공포인 데다 쉽게 접해보지 못한 태국 영화라니.

구미가 확 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피곤함을 싹 잊고,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메일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

사무실이 생긴 이후로는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방학이 시작된 허훈이 시나리오 작업 마무리를 위해 매일 출근하면서 내게 의견을 묻는 시간이 잦아졌고.

<투명한 사랑>의 현장을 진두지휘할 조감독과 제작 피디, 실장 후보들을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물어 직접 면접까지 봤다.

면접을 진행하면서 최초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겠다는 내 포부를 밝히면 그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인 놀라움을 표현했다.

반면 나를 의심하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도 하나같았다.

그렇게 쉽게 변할 영화판이 아니라고.

물론 나를 믿어주지 않는 이런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경험 많고, 내 의견에 이견이 없는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었고.

이제 사무실에 고정 출근하는 인원도 꽤 늘었다.

그리고 어제는 반가운 이의 전화까지 왔다.

바로 예명을 쓰고 있는 전해성의 전화.

그의 글이 한 달 전 게시된 거라 답이 올까 했으나 다행히도 연락이 왔다.

만나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사무실 주소를 알려줬고.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남은 제작비 10억과 <워싱>, <투명한 사랑>의 유통을 책임질 배급사.

둘 다 만만치 않은 일이자 빠르게 진행해야 할 일이다.

영화판은 인맥이 없으면 정말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그래서 배급사를 구할 때 아무리 내가 발로 뛴다 해도 한계가 있다.

작은 연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나만 알고 있는 전생의 연을 끌어다 쓸 수도 없으니 현재 내 인맥 중 가장 높은 사람이었던 양상철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소개해 줄 만큼 괜찮은 연이 없다는 것.

사실 매니지먼트 회사와 영화 배급사는 별다른 커넥션이 없었기에 이해했다.

조금은 무리한 부탁이었겠지.

그때.

사무실을 들어오는 한 남자.

응? 전해성이 벌써 도착했나?

그런데 생각하던 얼굴과 조금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여기가 <투명한 사랑> 제작사무실 아라비안필름 맞습니까?”

나는 책상에서 일어섰다.

“예. 맞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는 ‘제대로 찾아왔네.’라며 작게 중얼거리곤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영화 미디어 연구소장 류봉수]

일단 전해성이 아닌 건 확실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의 명함이었다.

우선은 나도 명함을 건넸다.

“그런데 영화 미디어 연구소에 여긴 어쩐 일로?”

명함을 유심히 보던 그는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좀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 투자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