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20화 (20/140)

#20화. 있을 때 잘해♬

“와, 언니 아까 봤어요? 얼굴 개 쩔던데.”

차를 타고 이동하던 그린 애플 멤버 보은의 입은 리더 다별 옆에서 조잘조잘 한 틈도 쉬지 않았다.

다별은 날카로운 눈매로 보은을 차갑게 쳐다봤다.

순간 보은이 움찔하자 혼이라도 낼 것 같던 그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러게. 이쁘긴 하더라. 그래두 역시 우리 보은이가 제일 이쁘지!”

인상과는 다른 따뜻한 말투였다.

보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어휴. 놀래라! 언니 얼굴은 너무 냉미녀라 봐도 봐도 적응이 잘 안돼! 또 화난 줄 알았다니까요!”

“후훗. 최대한 웃은 거였는데. 하여튼 보은아. 우리는 걸그룹이니까. 개 쩐다는 그런 말은 삼가자. 습관 돼.”

그 말에 보은은 시무룩해졌다.

“알겠어요. 근데 언니 어차피 미국 가면 사람들이 한국어 못 알아들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때,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빈은 만지작거리던 타로카드를 정리했다.

“바보냐. 원래 비속어는 만국 공통이야. 그런 건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다니까?”

보은은 다별과 대화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톤이 되었다.

“바아보오?! 이게! 너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면서 그런 소릴 하냐!”

“너보다는?”

동갑내기인 보은과 가빈의 티격태격은 오늘도 시작되었다.

조용히 창밖을 보고 있던 아람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리더 다별도 이 상황이 익숙한지 그들을 말리는 것 대신 운전하던 매니저에게 물었다.

“근데 오빠 그래서 우리 진짜 미국 가긴 가요? 언제쯤인지 정해졌어요?”

매니저는 룸미러로 다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회의 끝났다던데? 양 이사님이 총괄하시기로 했어. 그리고 지금 미국진출 관련해서 이사님 많이 예민하신 거 알지?”

“네. 아까도 회사에서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 아니었으면 이 차 안까지 따라오셨을걸요.”

매니저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엘리베이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

“네. 보은이가 이야기한 엄청 예쁘게 생긴 여자랑 조금 말 걸기 힘들게 생긴 남자였는데. 갑자기 인사를 하더니 어쨌는 줄 아세요?”

보은이 말을 덧붙였다.

“맞아. 우리 보고 깜짝 놀라더니 타서는! 진짜 웃겼어요!”

매니저가 의아하며 물었다.

“응? 그 사람이 뭘 어쨌는데?”

다별이 마저 답하려는데 아람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지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그 남자가 대뜸 양 이사님한테 있을 때 잘하라는 노래를 엄청 크게 부르던데요?”

*

한보배가 계약서에 사인한 이후부터 그녀의 본격적인 소속사 생활은 시작되었고.

배우 전문 매니저 한 명이 든든하게 붙어 케어해 주니 이제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없었다.

또 화분 엔터 측에서는 현재 그녀의 인지도가 가만히 놔둬도 쑥쑥 올라가고 있으니 아직 그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투명한 사랑>의 장편 촬영이 끝날 때까지 다른 스케줄은 잡지 않는 대신 제대로 된 연기 레슨과 피부과 시술, 탄력 있는 몸매를 위한 운동 등을 주로 진행하기로 했으며.

내가 이런 구체적인 것들까지 속속 들어 알고 있는 이유는······.

-여보세요? 대표님! 듣고 계시죠?!

한보배의 전화가 매일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통 하루의 마지막에 있었던 일과를 정리해 내게 보고하는 등 알 수 없는 행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예. 듣고 있습니다. 근데 보배 씨 혹시 매일 전화하시는 이유가? 하하.”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다 알고 계셔야죠. 제가 혹시 부당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원래 이렇게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내 말에는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만 보여왔던 터라 굉장히 어색했다.

어쨌든 그녀가 가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화분 엔터 내부 이야기도 해주고 있어서 의도치 않은 정보통이 생겼으니 나쁘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현재까지 보배 씨 이야기만 들어보면 전혀 부당한 일은 없는 것 같네요.”

-사실 너무 좋은 회사인 것 같긴 해요. 아, 그보다 대표님! 저 이사해요! 드디어 집 구했어요!

계약하고 이사부터 해야겠다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였다.

“와 잘됐네요! 집들이는 안 해요? 다들 한번 모이죠?”

-음, 집들이 너무 하고 싶긴 한데······.

잠시 뜸 들이던 그녀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소리쳤다.

-아니다! 해야죠! 할래요!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이니깐 괜찮을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속 사정에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와의 전화 통화를 마친 나는 고시원 책상에 앉아 한국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영화 팸플릿 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팸플릿을 거의 다 채울 정도로 스산하게 클로즈업된 여자의 얼굴이 보였고 그 아래의 적힌 유일한 영어가 제목이다.

[WASHING]

부산 필름마켓에서 구매하면서 인상 좋던 세일즈 담당자에게서 받아온 것이다.

슬슬 이 영화의 국내 개봉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번역부터 맡겨야 했다.

영화 번역은 번역가에 따라 완성되는 퀄리티가 천차만별이다.

단어가 가진 힘은 대단해서 자칫 잘못 번역하기라도 하면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에 전생에서도 번역 논란은 꾸준했다.

오역, 의역, 직역 등 심한 경우에는 자기 마음대로 대사를 바꿔버리는 번역가들도 있었으니.

그런 의미로 전생에서 가히 전설이라 불리던 남자가 한 명 있었지.

그의 이름은 전해성.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던 학생이었고.

나중에 통역사가 되어서도 영화 관련 일을 도맡아 했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허훈과도 엮이게 된다.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허훈과 동행하며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전 세계인에게 통역한 것이다.

전해성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는 여타 통역사들과는 확연히 달랐고.

통역사의 자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꼼꼼함과 센스를 모두 갖추어 영화제 이후 화제가 되며 승승장구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은퇴하면서 밝힌 비밀 하나 덕분에 더 유명해지기도 했고.

이번 생에선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그를 찾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찰나.

노트북을 열어 통번역 구인 구직 사이트를 검색해 제일 위에 있는 곳을 클릭했다.

촤르륵 나열된 게시글을 살펴보니 꽤 많은 인원이 이 사이트를 통해 연결되는 듯하다.

게시글을 검색할 수 있는 칸에 이름 석 자를 타이핑했다.

[김바로]

그러자 게시글 하나가 검색됐다.

[센스와 감성이 살아 있는 영화 번역해 드립니다.]

찾았다.

이 사람 또한 전생에서 전설적인 번역가로 평가되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기가 막힌 초월 번역으로 유명했고, 영어, 불어, 태국어까지 4개 국어를 하는 능력자라 번역의 폭이 넓었던 천재였다.

특이한 점은 아무 영화나 번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영화를 본 다음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만 번역을 해주기로 유명했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다소 패기 넘치는 신념이었다.

처음에야 뭐 이런 번역가가 다 있냐면서 수입사들이 기피했으나 어쩌다 한 번씩 그가 번역한 영화마다 초대박이 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나중에는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렇다면 내가 왜 전해성을 이야기해놓고, 김바로를 검색했을까.

그건 이 둘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지이잉-.

지이잉-.

“여보세요?”

-신 대표. 잘 지냈어요?

양상철이다.

“아, 예. 대표님. 저야 항상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도 신 대표 덕분에 요즘 살맛 납니다.

“저 때문에요?”

-그럼요. 지금 보배 양이 회사에서 아주 유명인이에요. 연기를 시켜보니 리듬감이 꽤 있는 것 같길래 노래랑 춤도 시켜봤거든요? 그런데 글쎄 레슨 선생마다 극찬하고 있어요.

한보배야 전생에서도 재능이 차고 넘쳤으니 뭐.

예상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 재능을 잘 가꿔 줄 회사를 찾아갔으니 말입니다.”

-허허. 이것 참. 신 대표 덕분에 요즘 뭔가 잊고 있던 열정이 되살아났달까? 그렇습니다. 아 그건 그렇고, 원래는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전화로 먼저 하는 게 진행에 좋을 것 같아서요. 투자금액 결정됐습니다.

꿀꺽.

긴장감에 침이 넘어갔다.

-우선 회사 측에서 신 대표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이 영화판 바꿔볼 때도 됐지요. 영화가 좋으니 흥행은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주셨다는 게. 그런데 제가 대표이긴 해도 저 혼자 모든 걸 결정할 순 없는 노릇이라서요. 최대한 끌어모았는데 20억 정도가 딱 부담되지 않는 선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원래는 3분의 1만 투자해 줘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다.

“괜찮을 뿐이겠습니까. 제가 어떻게든 이 영화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역시 신 대표는 믿음이 가요. 믿음이. 허허. 아! 그리고 혹시 저번에 제 동생 만나지 않았습니까?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구만.

그날 엘리베이터를 타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양상철 동생이구나.

그래서 계획 중이던 플랜 B를 바로 실행에 옮겼다.

사실 플랜 B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아무래도 양상철에게 동생을 미국으로 보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으니 내가 직접 하자.

이런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양상철 동생에게 나를 각인시켜야 했다.

그린 애플까지도 나를 알게 되면 더 좋고.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그들에게 미래를 경고하는 노래를 불렀더랬지.

“예. 뵀습니다.”

-그날 동생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대뜸 엄청난 괴짜를 만났다고 하길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 대표인 것 같아 물은 거였는데. 허허. 진짜였습니까?

아직 미래를 모르는 양상철 입장에서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양상철에게까지 또라이로 보일 필요는 없지.

“그냥 그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서 불렀던 것뿐입니다. 하하.”

-아, 그렇습니까? 신 대표가 노래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또 처음 알았네요. 언제 노래방이라도 한번 갑시다. 허허.

음, 왠지 또라이로 보이지 않기는 실패한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