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살아갈 만한 영화판
우리는 지하철에서 내려 양상철의 사무실까지 조금 걷기로 했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바람은 꽤 차가웠다.
“안 추워요?”
“네. 괜찮아요. 흐흐.”
그녀는 추위 따위는 전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여중생 팬과의 만남이 아직도 좋은가 보다.
“그렇게 좋아요?”
“네! 제 소중한 팬들이잖아요. 팬들이 생긴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몰랐어요!”
전생에서도 그녀의 지극한 팬 사랑은 업계에서 소문까지 났었다.
사진과 사인 요청을 거부하는 건 볼 수 없을 정도였고, 팬미팅에 온 팬들에겐 직접 손편지와 작은 선물까지 할 정도였다.
역조공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었지.
그렇게 팬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녀의 오랜 인기 비결이기도 했다.
잠시 전생을 회상하는데 질문이 들어왔다.
“근데 대표님 혹시 계약금 같은 건 제가 정할 수 있는 거예요?”
“계약금이요?”
“네. 제가 목돈이 좀 필요해서요······.”
급격히 축 늘어진 그녀를 보니 사생활이라 지금까지 묻지 않았던 그 이유를 이제는 좀 알아야 할 것 같다.
“계약금은 보통 천차만별이에요. 아예 받지 않을 수도 있고, 많이 받을 수도 있고. 근데 신인 배우들은 거의 못 받는다고 봐야죠.”
그녀의 표정은 금세 풀이 죽었다.
“아, 역시 그렇겠죠.”
“근데 보배 씨는 그냥 신인이 아니잖아요?”
“예?”
한보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초대형 신인이죠. 보배 씨도 연락 좀 받지 않았어요?”
“아, 맞아요!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전화가 계속 오시더라구요!”
“양 대표님도 아실 거예요. 그래서 보배 씨 보자마자 그런 제안도 하셨을 거고요. 지금도 계약 바로 안 해서 안달 나셨을걸요?”
지금의 상황은 의도치 않은 밀당이 됐을 것이다.
“목돈이 얼마나 필요해요?”
한보배는 조금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2,000만 원정도요. 3명이 살 집을 구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겠더라구요.”
3명?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녀에게 2명의 남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양상철의 사람 좋은 웃음은 여전했다.
관상은 역시 과학인가.
“예. 대표님. 잘 지내셨습니까?”
악수를 청하는 손을 붙잡고 묻자 그는 장난스럽게 답했다.
“보배 양 계약만 성사되면 다리 뻗고 잘 수 있겠습니다! 어찌나 신 대표랑 같이 와야 한다며 완강하던지.”
한보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이고! 그렇게까지 고개 숙일 필요는 없어요! 농담입니다. 농담 그나저나 신 대표는 얼굴이 좀 야위었네요.”
예산 짜다 내 영혼까지 쪽쪽 빨려 나가긴 했다.
“대표님이 도와주신다는데 열심히 해야죠.”
허허 웃던 그는 우리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그럼 자리에 앉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자 곧이어 밖에선 비서가 차를 들고 왔다.
“날도 추워졌던데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자, 얼른 마셔요.”
우리가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시기 시작하자 그는 일어나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봉투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건 계약서 가안입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 한보배에게 건넸다.
“먼저 쭉 읽어봐요.”
“넵!”
그러나 계약서를 잘 모르는 그녀가 그것을 모두 훑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표님이 한번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역시 자신은 봐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그녀에게 양상철은 못 말리겠다는 투로 말했다.
“보배 양은 신 대표를 진짜 신뢰하나 봅니다. 허허.”
그 말에 한보배는 한술 더 떠서 대답했다.
“네! 신 대표님은 어쩐지 믿음직스러워요.”
“그건 그렇죠. 신 대표 같은 청년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지.
그 후로도 둘이 나에 대한 낯간지러운 소리를 계속 주고받길래 얼른 계약서를 훑었다.
우선 살펴볼 것은 계약 기간.
2년이다.
일반적인 계약 기간은 대략 2년에서 5년 정도인데 신인들의 경우는 대부분 길었다.
계약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소속사 입장에선 손해였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가 언제 빵 뜰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약 만료 후 재계약을 안 하면 그냥 무료 봉사한 꼴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통과.
다음으로 살펴볼 건 수익금 분배 비율.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 7:3이요?”
양상철은 뭘 놀라냐는 듯 대답했다.
“예. 배우 쪽이 7입니다. 이건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 모두에게 통용되는 비율이에요.”
와. 이건 좀 놀랍다.
양상철이 인간적인 건 알았으나 남는 게 있나 싶을 정도다.
일반적으로 신인들에게 통용되는 비율은 배우가 3인 경우가 많다.
그 분야 탑 정도는 찍어야 7이 될까 말까.
그런데 이 비율이 모두에게 통용되다니.
소속 연예인들을 급으로 나누지 않는 거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우리의 대화를 듣던 한보배가 물었다.
“좋은 거예요?”
“예. 이건 무조건 보배 씨한테 좋은 겁니다.”
그리고 신인에게 보통은 주어지지 않는 계약금까지 그녀가 딱 원하던 2,000만 원.
“계약금도 조금 넣었습니다.”
그가 자상한 말투로 한보배에게 이어서 물었다.
“혹시 추가로 넣고 싶은 항목 있어요?”
“그게 있긴 한데······.”
응? 지금도 아주 좋은데.
“편하게 말해봐요. 저는 보배 양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습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지만, 소속사가 생기면 회사 측에서 원하는 작품을 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는 무조건 상의 후 진행하거든요.”
양상철의 대답에도 그녀는 안심되지 않는 눈치다.
“그래도 계약서에 ‘아라비안필름’에서 제작하는 작품은 무조건 참여한다. 라는 말을 넣고 싶어요. 물론 신 대표님 쪽에서 저를 캐스팅해주셔야 가능하겠지만······.”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조건인가.
양상철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화통하게 웃었다.
“허허허! 알겠습니다. 그건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
“예?! 그걸 진짜 계약서에 넣어주시겠다고요?”
그녀가 요구한 조건부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양상철까지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항목에 넣는다면 계약 기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심지어 다른 스케줄이 잡혀 있어도 우리가 부르면 오겠다는 말이다.
참나, 이 사람들 내가 악용하면 어떻게 하려고.
“신 대표 능력에 이상한 작품 물어오지도 않을 거고, 그 심성에 악영향을 끼칠 리도 없겠죠.”
어휴. 이렇게까지 사람을 믿어주니 양심에 찔려 무단횡단 한번 못 하겠다.
양상철은 그 자리에서 펜을 들어 계약서에 무언가를 쓱쓱 쓰더니 한보배에게 보여줬다.
“이렇게 추가하면 되겠습니까?”
“네네! 아주 좋아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확 피었다.
흐뭇하게 웃던 그는 밖에 있던 비서에게 계약서 수정을 요청했다.
그럼 한보배의 계약도 잘 됐겠다.
본격적으로 <투명한 사랑> 장편 이야기를 해볼까나.
“양 대표님. 저희 예산 나왔습니다.”
“아! 벌써 나왔습니까?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제작비는 어느 정도입니까?”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에게 답했다.
“예. 순제작비만 30억입니다.”
차를 후루룩 마시던 그는.
“컥! 커컥! 콜록! 콜록! 예? 30억이요?!”
우리 영화는 굳이 장르로 따지자면 로맨스였다.
그 말은 돈이 드는 장면이 많이 없다는 뜻.
또 감독, 배우 등 개런티를 많이 받아 가는 스태프도 없었다.
전생에서야 영화 한 편에 이 정도는 저예산에 속하는 축이었지만.
지금 시대에 30억짜리 로맨스 영화라고 하면 큰돈이었다.
“제가 잘은 모르는데 그 정도면 꽤 높은 편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실 이번 영화에서 꼭 진행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양상철은 아주 궁금한 얼굴이었다.
“혹시 영화 촬영장 와보셨습니까.”
“예. 가보긴 했지요.”
“그럼 스탭들이 과로로 사망하는 사건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럼요. 그건 매니지 쪽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
이쪽에서 잔뼈가 굵은 양상철이 모를 리 없지.
그러나 이 분야에서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고충을 다 알 수 없을뿐더러 이런 사건 사고들의 이면을 낱낱이 알기 힘들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모두가 쉬쉬하기 바쁘니까.
또 지금 시대가 유독 심했기도 하고.
“그걸 뿌리 뽑고 싶습니다. 그래도 좀 살아갈 만한 영화판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양상철은 텅 빈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좀 살아갈 만한 영화판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대 후반 청년의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잊고 있었지만.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이 썩어 빠질 때로 빠져 문드러진 판을 바꿔보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열정으로 따지자면 그 청년 못지않았지.
그러나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 신념을 그저 젊음의 치기로 생각하고 말았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손을 잡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아, 이곳은 내가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아니구나.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데만 급급했는데,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를 눈앞에서 잃었다.
청년과 비슷한 나이에 겪었던 그 사건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무게였다.
그래서 무작정 이곳을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왜인지 떠날 수 없었다.
자신이 떠나면 그 사건은 그냥 묻혀버릴 것만 같았기에.
언젠가 이 세상에서 힘을 키워 다시 맞서 싸워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과 닮아있던 청년의 눈빛을 보자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양상철은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어떻게 그걸 잊고 살 수가 있는 거냐.
이 한심한 자식아.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저 회사의 이익을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겠다고.
그 청년이라면 정말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니 그의 손을 잡아주며 끝까지 도와야겠다고.
*
다행히도 양상철은 나를 이해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화분 엔터에서조차도 그런 문화를 없애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눈치였으니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
그러나 화분 엔터 쪽에서도 30억 모두를 투자하는 건 리스크가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나도 원래부터 투자금을 한곳에서 모두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동의했고.
양상철은 내부 회의를 통해 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역시 대표님하고 오길 잘했어.”
한보배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그래서 대표님한테 은혜 갚을 거예요!”
“무슨 은혜씩이나.”
“아니에요! 꼭 갚을 겁니다!”
“알겠어요. 든든하네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왠지 귀여워 웃음이 날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런데.
“어! 저분들은!”
한보배는 안에 타 있던 여자 네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을 보고 화들짝 놀랐고.
나조차도 갑작스러운 마주침에 당황했다.
우리가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 엘리베이터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던 여자가 물었다.
“안 타세요?”
정신을 차린 나는 여자에게 답했다.
“아, 타야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플랜 B의 주인공인 그린 애플 아람에게 싱긋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