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부산(6)
주최 측은 너무나도 쿨하게 내 레드카펫 입성을 허락했다.
나은의 예상치 못한 선물도 몸에 딱 맞았고.
현재는 레드카펫 뒤 대기실에서 우리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표님. 저 이상하진 않아요?”
이상하기는커녕.
사실 한보배의 드레스를 오늘 처음 본 나는 그녀가 차려입고 왔을 때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드레스는 연분홍색의 탑으로 그녀의 투명한 피부 톤과 잘 어울렸고.
앞에서 봤을 땐 언뜻 슬림한 듯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풍성해지는 고고한 스타일이었다.
뒷부분 허리쯤에 달린 리본은 한보배의 발랄한 분위기까지 잡아주고 있었다.
“아주 좋은데요? 나은 대표님이 꽤 고생하셨겠는데.”
그녀는 그래도 걱정되는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점검했는데.
반으로 갈라 묶은 머리의 꼬랑지가 달랑거렸다.
“제 인생에 레드카펫이라니. 진짜 생각도 못 했어요. 어우 떨려!”
그러더니 이번엔 나를 빤히 봤다.
“근데 대표님 오늘 완전 딴사람 같아요!”
나은 대표의 깜짝 선물은 턱시도로 약간의 푸르스름한 색이 감도는 옷감이었다.
“오랜만에 머리까지 만져서 그럴 거예요.”
“진짜! 짱 멋있어요!!”
음, 한보배가 예정우의 옆에 있어서 그런지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안 좋은 걸 더 배우기 전에 둘은 좀 떨어트려놔야겠다.
“그나저나 발목은 괜찮아요?”
그녀의 발에 신겨진 앞이 뾰족한 흰색 하이힐은 보고만 있어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한보배는 씩씩하게 대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럼요! 며칠 연습했더니 꽤 괜찮아졌죠?!”
“확실히 나아지긴 했네요.”
대기실에 걸려있던 시계는 어느새 레드카펫 행사 시작인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준비합시다.”
“넵!”
한보배는 그나마 정신을 잘 차리고 있었으나 허훈은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덜덜덜 떨고 있었다.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감독님.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좀 차려 보세요.”
“예엡! 할 수 있다아!!”
그래도 불안하니 잘 붙들고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우리는 레드카펫으로 향했고.
나는 올라서자마자 무대인사에서 이 둘이 왜 그렇게도 맥을 못 추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파바바밧-!
눈을 뜨는 게 정말 힘들구나.
연예인들은 잘도 부릅뜨고 있던데.
안 떠지는 눈을 애써 열어보려는데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영화 <투명한 사랑>의 감독 허훈, 배우 한보배,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 님이 입장하고 계십니다.”
나는 양옆에 있던 둘에게 속삭였다.
“스마~일하고, 손 흔드세요. 손.”
내 말에 둘은 그새 정신을 차리고,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자 이제 걸어가 봅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얼추 열 걸음까진 순조로웠다.
열한 걸음에서 한보배의 짧은 비명이 들리기 전까진.
“아앗!”
얼른 옆을 돌아봤는데 한보배는 입에 경련이 일어날 듯 미소 짓고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휴우. 넘어지는 줄 알았네.
안심하며 다시 앞으로 걷는데.
그녀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절뚝. 절뚝.
“왜 그래요?”
내가 조용히 묻자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답했다.
“시, 신발이 벗겨졌어요.”
잽싸게 뒤를 돌아보니 정말 한보배의 흰색 하이힐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레드카펫 위에 있어 그 신발은 더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아, <신바드의 모험>에서 말했던 ‘하이힐’이 이거였냐.
“잠시만요.”
어차피 이대론 끝까지 걷지도 못한다.
둘을 잠시 세워두곤 뚜벅뚜벅 구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허리를 굽혀 주운 다음.
다시 돌아왔고.
한보배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찡긋 보낸 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에라 모르겠다 심정이었는지 신발이 벗겨진 발을 내 무릎 위에 올렸다.
나는 그 발에 구두를 살포시 신겨 주었다.
그리고······.
파바바바밧-!
갑자기 주변에 있던 카메라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마침 스피커에서도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지금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휴우. 내일이면 또 기사 뜨겠네.
*
그날 저녁.
해운대 한 막창집.
“이모! 여기 쏘주 한 병 더 주세요!”
예정우의 우렁찬 목소리에 우리 테이블엔 금세 술이 채워졌다.
“근데 정말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회라도 사드리려고 했는데.”
나경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훈이가 여기 막창집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곳이라.”
한보배는 말없이 막창을 흡입하고 있었다.
“보배 씨. 천천히 드세요. 천천히. 그러다 체합니다.”
“예에. 아게스미다!”
전혀 알겠지 않은 전투적인 식사였다.
레드카펫 때문에 요 며칠 식단 조절 빡세게 했을 것이다.
배고플 만도 하지.
얼른 다 구워진 막창을 그녀의 접시에 올려 주웠다.
“고마스미다!”
나경이 잔을 들었다.
“선배님. 저 진짜 죄송하다는 말 드리고 싶습니다.”
“예? 갑자기요?”
“네. 사실 우리 팀 상 탈 거다. 뭐다. 하셨던 말씀 다 안 믿었거든요.”
예정우도 거들었다.
“이야. 나 진짜 놀랐잖아. 응? 대표님 혹시 신기 있는 거 아니야?!”
“신기는 무슨 신기예요. 원래 수상작 팀들 폐막식에 불러요. 그래서 추측한 거죠. 추측.”
우리는 결국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금이 무려 2,000만 원이다.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의 작품으로 제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흑흑.”
갑자기 곡소리가 나길래 보니 허훈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에?! 허훈 너 설마 진짜 우냐?!”
절친 나경의 놀림에도 그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래! 운다! 인마! 이렇게 기쁜 날 좀 울면 안 되냐!”
그러더니 소매로 눈물을 쓱쓱 훔치면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게 다 끝까지 믿어주신 대표님 덕분입니다. 사실 저도 대표님이 나은 님 앞에서 수상 이야기하실 때는 아, 좋으신 분이지만 허세가 좀 있으시구나. 생각했거든요.”
응? 이 자식이?
“그런데 진짜로 상을 받다니! 그리고 받은 상금은 대표님 다 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이건 좀 오바 같은데.
“무슨 저를 다 줍니까. 상은 감독님이 받아놓고, 아니면 다 같이 나누던가 합시다.”
나경이 끼어들었다.
“선배님 받으세요. 여기 와서 회사 경비도 많이 쓰셨잖아요.”
한보배도.
“저도 진짜 괜찮습니다! 대표님 덕분에 화분 엔터 들어가게 생겼는데, 어휴! 안 받아도 배불러요!”
많이 먹어서 배부른 것 같은데.
의외로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예정우도 싱글벙글이었다.
“흐흐, 나도 안 줘도 돼. 취직하면 대표님 돈이 내 돈이지 뭐.”
허훈은 확고한 눈빛이었다.
“대표님. 이제 사무실도 얻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명색이 영화사인데 작업할 공간은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겸사겸사 저도 거기서 작업도 좀 하고요. 하하.”
속셈이 있었구만.
“그래도 너무 큰 돈입니다. 그럼 감독님과 저랑 반반 나누죠. 그러면 받을게요. 1,000만 원이면 사무실 구하고도 남습니다.”
감독이란 직업이 얼마나 굶주리며 살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휴, 고집도 쎄셔. 그럼 상금은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저 중대 발표할 게 있습니다!”
한보배는 막창을 입에 넣다 말고 귀가 쫑긋했다.
“중대 발표요?”
“네! 저 장편 시나리오 초고 나왔습니다!!”
오, 드디어!
“와.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실 조금 더 걸릴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금방이네요!”
“저도 예상보다 더 빨리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부스터 단 것처럼 손가락이 움직이더라고요. 하하!”
“오호. 훈이 축하한다! 짜식!”
모두가 기뻐하는 것과 반대로 갑자기 한보배는 멈칫하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불판 위를 아련하게 보았다.
“응? 보배 씨는 갑자기 왜요?”
“아, 촬영 들어가려면 관리해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맛은 다시고 있었다.
“에이, 이제 초고 나왔는데요. 뭐. 촬영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은 맘껏 드셔도 돼요.”
“아! 그런가요?! 그럼 오늘만!”
그녀의 동태 같던 눈은 다시 반짝였고, 손은 바삐 움직였다.
허훈이 그 모습을 보더니 허허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럼 대표님. 이제 다음 단계는 뭡니까?”
드디어 전생에서 죽어라 했던 내 전문 분야를 써먹을 때가 왔구나.
“이제 예산 짜야죠.”
*
서울로 돌아온 뒤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우선은 양상철이 <투명한 사랑> 장편 투자 의사를 밝혔으니 먼저 이 영화를 장편 화했을 때 사용될 비용을 계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작업이 바로 ‘예산’을 정하는 일.
일반적으로 이 ‘예산’에 주된 카테고리는 바로 인건비였다.
감독, 배우부터 시작해서 각 팀의 막내까지 인건비가 항목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차지했다.
어쨌든 이 작업은 시나리오가 초고라도 나와야 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도 허훈의 초고 완성 타이밍이 부산 일정 끝나는 날과 딱 맞아떨어져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영화의 ‘예산’을 작업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바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적용하는 것.
전생에서는 제작자 겸 감독으로 활동하던 한 유명감독이 한국 영화계에 도입하면서 스태프들의 처우가 많이 개선됐었다.
그러면서 영화판에서 일해도 먹고살 만하다. 라는 말이 겨우 나왔었지.
그런데 그건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의 이야기이다.
처음에야 반발이 많았지만, 결국엔 잘 자리 잡았으니 이번 생에선 좀 더 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있다.
바로 제작비가 껑충 뛴다는 것.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투명한 사랑>이 꼭 장편 화가 되어야 할 만한 상황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결국엔 대중들의 관심을 잡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상까지 받았으니 1차 목표는 이룬 셈이었다.
여하튼 지금은 지하철 안.
한보배와 함께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보배 씨. 서울 오자마자 양 대표님이랑 계약하라니까 왜 안 했어요?”
작은 얼굴에 모자를 푹 눌러쓴 한보배는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눈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대표님이랑 같이 가야죠. 저 계약서 볼 줄 몰라요.”
“저랑 할 때는 그냥 대충 훑어보고, 하셔놓고는.”
“그건 대표님이니까 안 보고도 싸인하거죠. 원래 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닙니다!”
오늘은 양상철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던 양상철과 한보배는 아직도 계약을 못 한 상황이었고.
그 이유에는 그녀가 꼭 나와 같이 가야 한다며 꾸역꾸역 고집을 부린 탓도 있었다.
벌써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예산’이 얼추 마무리된 다음에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에 한 달을 고시원에 처박혀 일만 했던 거라.
오늘 양상철과 만나는 김에 한보배 계약과 투자 이야기까지 한방에 하고 올 셈이었다.
“알겠어요. 근데 보배 씨 지하철 타도돼요?”
“푸히히. 지금 많이 타둬야 할 것 같은데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데렐라 사건은 아직도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그 하이힐이 유리구두로 보인다나 뭐라나.
그 때문에 서울에선 나까지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실 나 혼자 다닐 땐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인상이 좀 날카로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말을 쉽게 못 걸거든.
근데 한보배로 추정되는 여자가 옆에 있는 지금의 상황이면 말이 달라진다.
그녀의 인지도가 올라가며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 여중생이 조심조심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저기! 혹시 보배 언니 아니세요??”
한보배는 내가 차마 말릴 틈도 없이 마스크를 쓰윽 벗었고.
숨겨져 있던 그녀의 싱그러운 웃음은 여중생에게 닿았다.
“예. 맞아요.”
“우와! 언니! 너무 팬이에요!!!”
여중생의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별 관심 없던 주변 사람들까지 우리에게 집중했다.
“응? 누구라고?”
“그 한보배라는데?”
“뭔데? 유명한 사람인가?”
아직 모두가 우리를 아는 건 아닌지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근데 와 진짜 개 이쁘다.”
“얼굴 소멸 직전인데?”
“허얼. 분위기 미쳤다.”
한보배 미모에 제대로 홀린 듯 보였다.
어느새 여중생은 핸드폰을 조심히 들이밀었다.
“언니 저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 주시면 안 돼요?”
“당연히 되죠!! 백 장도 찍어드릴게요!!”
어째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되게 행복해 보였다.
조금은 이 상황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