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7화 (17/140)

#17화. 부산(5)

한보배의 인사 소동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면서 결과적으로 GV의 분위기를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질문이 시작된 뒤에도 허둥지둥 대던 허훈과 한보배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안정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사회자의 능숙한 진행 덕분에 끝나지 않을 것 같던 GV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했고, 마지막 순서인 관객과의 소통이 시작되자 질문은 쏟아졌다.

그 질문들은.

“영화 내내 복권이 등장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혹시 감독님이 생각하신 의미가 있으신가요?”

“투명 인간과의 사랑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생각하게 되신 겁니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 가능성을 몇 프로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등등 영화에 관련된 것들도 있었지만.

“한보배 님 혹시 차기작은 결정된 게 있으신가요?”

“한보배 씨 요즘 인기가 대단하신데 실감하십니까?”

“혹시 이상형은 어떻게 되십니까?!”

하는 등의 그녀를 향한 개인적인 질문도 쇄도했다.

영화의 관련된 질문은 허훈이 두루뭉술하게 잘 답변했고.

한보배도 긴장이 점점 풀렸는지 위트 있게 곧잘 대답했다.

그리고 곧 마지막 질문을 받을 차례.

사회자는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도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황이라 마지막 딱 한 분만! 질문받겠습니다!”

그때 허훈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사회자님.”

“아! 예! 감독님!”

“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아침부터 그렇게도 뜸을 들였을까.

차마 감독의 말은 커트할 수 없었던 사회자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 그럼 짧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제가 정말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아서요.”

옆에서 한보배가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둘이 짰나?

“먼저 정말 많은 고생해주신 <투명한 사랑> 참여 스탭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허훈의 시선이 점점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

“그리고······. 이분께 특별히 말을 전하고 싶은데요. 저희 영화에서 투명인간 역과 정신적 지주를 도맡아주신 신바드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설마 했는데······.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

모든 행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대기실로 모여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대표님! 저 잘했죠?!”

칭찬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도 나를 위해서 한 말일 테니, 고개를 끄덕여줬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영화 이야기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렇죠. 역시 우리 영화밖에 모르는 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꼭 그런 건만은 아닌데······.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신 대표.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양상철이 반가운 웃음을 전하며 들어왔다.

“아, 대표님 오셨습니까.”

대표님?

대기실에 있던 모두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양상철은 먼저 허훈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감독님. 제가 이래 봬도 영화 보는 눈이 좀 있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허훈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악수를 받으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아휴. 과찬이십니다. 이제 배워가는 중이죠.”

그쯤 나는 모두에게 양상철을 소개했다.

“이분은 화분 엔터 양상철 대표님이십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물음표였던 모두의 얼굴은 느낌표가 되었다.

제일 크게 놀란 사람은 한보배.

“예? 화분 엔터 양상철 대표님이요?!”

양상철은 그녀의 반응에 사람 좋은 웃음을 날렸다.

“예. 허허. 제가 그 양상철입니다. 한보배 씨 맞죠?! 연기를 기막히게 하던데. 아주 제가 오늘 팬이 됐습니다! 팬이!”

얼떨떨한 얼굴의 한보배는 곧 날파리라도 들어갈 듯한 입을 합! 다물고는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한보배입니다! 화분 엔터 대표님을 이렇게 뵙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아이고. 뭘 또 이렇게까지 환영해주십니까.”

모두에게 소개를 마쳤으니 양상철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예. 아주 할 말이 많습니다. 신 대표가 저를 여기 초대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사실 그가 이곳에 와서 우리 영화를 보기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건 모두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하. 대표님이시라면 알아봐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여기서 바로 이야기하실까요?”

양상철은 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허허. 이것 참. 신 대표랑은 말이 통해서 좋다니깐.”

그러더니 그는 한보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보배 씨. 혹시 지금 속해 있는 소속사가 있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제안할 첫 번째이자 내가 바라던 것은.

바로 한보배가 화분 엔터에 들어가서 쑥쑥 성장하는 것.

“예?? 아니요. 없습니다.”

“허허. 그럼 저희랑 같이 일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것 참. 괜찮은 배우들만 보면 계약부터 하고 싶어서 큰일입니다. 허허.”

한보배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예?! 그, 그럼 제가 괜찮은 배우라는······.”

“당연하지요. 기성들도 하지 못할 연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보배 양 정말 재능 있습니다.”

양상철의 인정에 한보배는 마치 <투명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에서나 볼 수 있었던 벅찬 표정을 지었다.

“칭찬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휴!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 건은 서울에서 다시 보고 이야기하는 걸로 하죠.”

“넵!!”

이로써 한 가지는 해결된 것 같고.

이번엔 양상철의 뒤에서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가 앞으로 나왔다.

“와. 대표님. 소원 성취하셨네요?”

그는 도건우였다.

아마도 아까 양상철 옆에서 꽁꽁 싸매고 있던 이가 도건우였나보다.

나는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양옆에선 난리가 났다.

“왓! 도건우!”

“허얼. 이거 지금 꿈인가요.”

“아니! 도건우 님이 여길 어떻게?!”

다들 한마디씩 하고 나니 도건우는 슬몃 웃었다.

“저희 대표님이 하도 오자고 하셔서 오긴 했는데 저도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허훈은 그 말에.

“도건우 배우님이 우리 영화를 봤다니! 그것도 호평?!”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예. 저 거짓말 잘 못 합니다. 그나저나 대표님. 어쨌든 캐스팅은 캐스팅이고, 또 하실 말씀 있으시잖아요? 메인이벤트.”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필름마켓에서 양상철을 봤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투명한 사랑> 장편 제작은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겠구나. 라고.

양상철은 왠지 자신이 더 신난 것 같았다.

“아차차. 그렇네, 참. 신 대표 혹시 <투명한 사랑> 장편 만들어볼 생각 없습니까?”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표님. 그쪽은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

『‘투명한 사랑’ 허훈과 한보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성공적인 데뷔』

『관객들의 호평. ‘투명한 사랑’ 상영연장 목소리까지 나와』

『‘투명한 사랑’에 쏟아지는 관심. 정말로 장편 제작, 시작하나』

확인한 기사만 해도 몇십 개였다.

장편 소식은 풀지도 않았는데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선 장편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나 보다.

오늘은 드디어 기다리던 레드카펫을 밟는 날.

우리가 수상하는 날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나만 아는 내용이긴 하지만.

예정우와 나경은 아침부터 허훈과 한보배를 데리고 다니면서 준비하기 바빴고.

나는 해운대가 바로 보이는 별다방 2층에 앉아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지잉-.

문자가 왔길래 확인하니 허훈이다.

[대표님. 저기······. 제가 정말 웬만하면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뭐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얼른 답장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아무래도 오늘 레드카펫에 보배 씨랑 단둘이 올라간다는 게 너무 걱정됩니다. 제가 에스코트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나도 조금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전생에서 <처절한 인생>으로 초청받은 한 해외 영화제 레드카펫을 당당히 걸어가다 넘어진 적이 있었다.

외신과 국내 기자들까지 그 재밌는 해프닝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기사로 찍어냈고.

그에겐 흑역사로 남았더랬지.

또 <신바드의 모험>에서 나온 단어가 계속 신경 쓰였다.

아직 ‘하이힐’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무대인사 직전 한보배가 하이힐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 자꾸 걸리기도 하고.

혹시 그녀가 레드카펫에서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잠시 생각 회로를 돌려 보는데, 허훈의 문자가 이어서 도착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대표님이 같이 올라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표님이 계시면 긴장을 좀 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당일 추가되면 주최 측에도 알려야 하고, 무엇보다 준비된 옷도 없다.

물론 나까지 쫙 빼입을 필요는 없지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주최 측에 연락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넵!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허훈과의 문자를 끝내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레드카펫 담당자 연락처를 검색하려는데.

지이잉-. 지이잉-.

이번엔 전화가 왔다.

나은 대표다.

“여보세요?”

-대표님! 오늘 레드카펫 맞죠?

“예. 맞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 한번 드리려고 했는데. 레드카펫 7시부터 시작입니다. 아마 인터넷에서 생중계할 거고요.”

-아휴. 생중계도 생중계인데, 요즘 <투명한 사랑> 인기 실감하고 계세요? 무대인사 이후로 저희 브랜드 사이트 접속자가 엄청 늘었다니까요? 판매량도 눈에 띄게 올라가고 있고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대표님께 큰소리쳐 놓은 게 많아서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하하.”

-세상의 풍파 따윈 전혀 없는 목소리로 그런 이야길 하시네. 호호. 하여튼 그것 때문에 전화드린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떤 것 때문에?”

-제가 나경이 통해서 보내드린 옷 중에 대표님 것도 있거든요?

처음 듣는 소리다.

“제 옷이요?”

-네. 나경이한테 방금 전화했으니깐 가면 준비해놨을 거예요.

절묘한 타이밍이네.

그나저나 순수한 궁금증이 생겼다.

“근데 제 사이즈는 어떻게 아시고?”

-호호. 이래 봬도 저 전문가잖아요? 농담이고. 그때 한번 제가 장난식으로 줄자 가지고 어슬렁거렸던 적 있잖아요. 그때 스피드하게 완료했죠.

아, 그랬던 적이 있긴 했다.

그냥 심심한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나은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말했죠. 좋은 모델을 보면 이 직업병을 어쩔 수가 없다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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