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6화 (16/140)

#16화. 부산(4)

부산 태종대 해녀 촌.

파도가 넘실거려 곧 덮칠 듯한 바위 곳곳엔 고무대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앞 겨우 수평만 맞는 평상 위에 깔린 알록달록한 돗자리.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갈까 가장자리엔 투박한 돌들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그 돗자리 위에 앉아있던 류봉수는 회의실에서 수상 작품 선정을 위해 격분하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키야! 죽인다! 부산까지 왔는데 주구장창 어두컴컴한데 앉아서 회의만 하다가 갈 순 없잖아?”

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

양 볼에 쏘옥 들어가는 보조개는 중년 미를 내뿜고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여자는 지성미.

류봉수와 설전을 펼치며 대립하던 이다.

“그거야 네 말이 맞긴 한데, 갑자기 무슨 낮술이냐! 낮술은!”

둘 앞에는 해녀가 직접 손질해서 가져다준 자연산 멍게와 해삼이 올려져 있었다.

류봉수는 들고 있던 소주를 그녀의 잔에 따르면서 이야기했다.

“성미야. 부산에 와서 대선도 안 먹고 가면 그게 부산에 온 거냐?! 또 이게 이런 푸른 바다를 보면서 먹어야 제맛이라 껌껌한 밤에 먹으면 그 맛이 안 나요. 맛이.”

“잘났다. 잘났어. 아주 그냥 오늘 신났지?”

지성미의 말에 류봉수는 되지도 않는 겸손을 떨어 보였다.

“아휴. 무슨! 설마 내가 <투명한 사랑> 올 매진된 것 때문에 기분이 좋겠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히히’ 웃는 류봉수가 얄미워 지성미는 자신의 잔을 원샷 했다.

“나도 그 영화 좋게 봤다고 했잖아. 근데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진짜 운도 좋은 놈의 자식.”

“저기요. 지성미 씨. 이건 운이 아니라 작품 보는 눈이 있는 실력이거든요? 류봉수 아직 안 죽었다 이거야!”

“예예. 알겠습니다! 아주 학교 다닐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가끔 진짜로 재수 없다니까!”

“······.”

류봉수가 금방 날려야 할 대꾸가 없자 지성미는 자신의 말이 조금 심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삐졌어? 뭘 그 나이에도 삐지고 그러냐······.”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된 류봉수는 근처에서 날고 있던 갈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응?”

“나 그 영화감독 한 번 만나보려고.”

지성미는 어이가 없었다.

“야! 너 내 말은 아예 듣지도 않-! 응? 뭐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너 잊었냐! 우리 심사위원 자격으로 여기 온 거?”

“당연히 영화제 끝나고를 이야기하는 거다. 나는.”

평소 유쾌한 성격의 류봉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지성미도 그의 이야기를 조금은 귀 기울여 들으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왜 만나려고 하는 건데.”

“우리 연구소에서 영화 투자도 하고 있잖아. 혹시라도 그 영화 장편 제작한다고 하면 투자하려고. 어때 괜찮지?”

“하아. 난 또 뭐라고.”

혀끝을 차던 그녀의 자세는 다시 흐트러졌다.

“아서라. 아서. 잘 빠진 단편, 장편으로 제작해서 성공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잖아? 그 정도 밀어줬으면 됐어. 이제 우리 손 떠난 거야. 무슨 또 투자로 손을 담그려고 그래.”

그러나 류봉수의 눈은 반짝였다.

“성미야. 이번엔 그냥 좀 믿어봐라. 그 영화 진짜 된다니까.”

*

단편영화임에도 전 좌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우리는 당장이라도 축배를 들고 싶었으나 아직 부산에서의 공식 스케줄이 남아 있어 뒤로 미뤄야만 했다.

다음날 우리는 조식을 먹기 위해 호텔 1층에서 모였다.

한보배는 다채롭게 차려진 뷔페식 조식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렸다.

“입에 안 맞아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따 무대인사가 너무 긴장돼서요.”

“그냥 팬들이랑 인사한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가요. 밥도 팍팍 먹고요. 힘내야죠.”

“팬······. 팬들이라니! 더 긴장되는데 어떡하죠!!”

갑자기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한보배는 그릇에 있던 스크램블을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와구 먹었다.

“이판사판이다! 혹시라도 너무 긴장해서 쓰러지면 안 되니깐 아침은 든든히!”

왠지 그녀의 또 다른 부스터를 작동시킨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한보배가 밥을 잘 먹으니 다행인 셈 치고, 예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호텔을 거덜이라도 낼 참인지 조식 뷔페의 온 메뉴를 앞에 가져다 놓고 먹고 있었다.

“형님은 이따 시간 맞춰서 보배 씨 샵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극장으로 바로 와주세요.”

예정우는 먹는 것이 바쁜지 냉큼 대답했다.

“예! 대표님! 알겠습니다!”

하여튼 오버하는 건 1등이다.

옆을 보니 허훈은 멍한 얼굴로 조식을 먹는 건지 젓가락을 먹는 건지 모를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어째 멀쩡한 사람이 나랑 나경밖에 없다.

“저기. 감독님. 지금 젓가락을 먹고 계세요.”

그제야 눈을 번쩍 뜨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보는 허훈.

“어, 어! 그렇네요. 하하.”

“긴장할 거 없습니다. 저희 영화 다 좋아해 주실 거예요.”

“그렇겠죠? 근데 무대인사를 해본 적이 없어서 막 질문 같은 것도 하실까요??”

“음, 저희 영화 관심이 대단하니깐 당연히 질문이 들어오지 않을까요?”

내 말에 허훈은 뭔가를 다짐한 듯 보였다.

“그럼 꼭 그 말을 해야겠다!”

“예? 무슨 말이요?”

내게는 비밀인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얼른 식사하시죠. 대표님!!”

혹시 몰라 그에게 덧붙였다.

“감독님 장편 제작은 아직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이게 타이밍을 좀 더 봐야 해서요.”

“에이,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개인적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왠지 걱정되는 건 그저 우려일까.

아, 할 말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이따가 무대인사 끝나고 모두에게 소개해 줄 분이 있습니다.”

소개라는 말에 예정우가 눈을 번쩍 떴다.

“누구?! 여자야?!”

어휴. 생각하는 게 딱 청춘이네. 청춘.

*

화분 엔터 소속 배우 도건우는 대표인 양상철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투명한 사랑>의 상영관을 찾았다.

요즘 우울증이 다시 도지고 있는 자신에게 호텔에만 있으니 더 그러는 거라며 아버지 같은 소리를 해대는 그가 조금은 짜증 났지만.

그래도 따라 나왔다.

누구의 말을 착실히 듣는 스타일은 아니었음에도 양상철의 말은 이상하게 듣게 됐다.

유명 기획사 대표가 비서도 없이 돌아다니는 게 좀 안쓰럽기도 했고.

어쨌든 온갖 아이템으로 꽁꽁 싸매고 온 도건우는 보러 온 영화를 확인하자마자 어이가 없었다.

단편영화라니?

고작 15분짜리 단편 때문에, 이 도건우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가?

옆에 앉은 양상철에게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려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인자한 웃음만 짓고 있어 참았다.

15분이다.

딱 15분만 버티자.

그렇게 시작된 영화······.

는 순식간에 휘몰아치며 끝났다.

사실 끝난 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끝나 있었다.

딱 이 말이 맞았다.

그리고 조금 뒤엔 순수한 호기심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과연 저 둘은 어떻게 됐을까.

도대체 저 둘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무대인사고 뭐고, 끝나자마자 양상철을 이끌고 이곳을 나가자는 처음 다짐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반응도 자신과 비슷한지 궁금해 귀를 기울였다.

“와. 이거 뭐야. 왜 벌써 끝났어!”

“이거 단편만으로는 너무 아까운 것 같은데.”

“무대인사 한다길래 그냥 한보배 실물이나 보려고 왔는데 영화가 너무 기대 이상이잖아?”

도건우는 옆자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영화가 끝난 후 내내 심각한 표정이던 양상철에게 물었다.

“대표님. 저 여배우 데려오고 싶어서 그런 표정 짓고 계신 거죠?”

양상철은 당황했다.

“어? 어어. 뭐 그렇지. 허허. 이거 걸어가다 금덩이 발견한 기분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런데 도건우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대표님. 그 뭐냐 우리도 영화사업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뭐 생각 중이지. 그래서 필름마켓도 이번에 처음 가본 거고. 이 영화 제작사 대표도 거기서 만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내막을 처음 들은 도건우는 답답해했다.

“예?! 대표님! 그런 사람을 다이렉트로 알고 있는데 뭐 하셨어요!”

양상철은 도건우가 갑자기 흥분하자 어리둥절했다.

“으응?”

도건우는 울화통이 터졌다.

“이 영화를 잡으셨어야죠!!”

*

모두가 긴장하던 <투명한 사랑>의 상영은 시작되었다.

무대인사는 상영 후 관객과 만남인 GV식으로 진행되는 수순이었고.

우리는 대기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한보배와 허훈 둘 다 나은의 옷발이 제대로 받는 모습이다.

한보배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검은색의 높은 힐을 신은 채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서울 가서 하이힐 신는 연습이라도 해야겠어요. 안 신어봤더니 되게 불편하네요.”

“아파요?”

“네. 무지무지요. 옛날에 주어진 문제를 시간 내 못 풀면 사방의 벽이 줄어드는 영화가 있었는데 제 발이 꼭 그 안에 들어간 멍청한 사람이 된 느낌이라니까요.”

배우 아니랄까 봐 누가 발 아프다는 표현을 저렇게 한담.

“많이 아프다는 말이네요. 우선은 벗고 있어요. 이따 올라갈 때만 신고요.”

“네에. 그래도 꼭 이런 힐 신고도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조금 무섭긴 했으나 나는 그녀의 이런 독기 있는 모습이 좋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죽어라 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전생에서도 존경스러웠다고나 할까?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진행요원이 들어와 전달했다.

“영화 끝나가니깐 준비하실게요.”

한보배와 허훈은 무대 쪽 통로 앞에 섰고.

나와 예정우, 나경은 무대 옆 관객석으로 연결되는 문에서 대기했다.

곧 진행요원의 들어가라는 수신호가 보이자 둘은 무대에 올랐다.

무대 위의 둘을 보기 위해 우리 셋도 관객석으로 들어섰는데 안은 그야말로 벅찬 광경이었다.

우선 무대 바로 앞으론 기자들의 플래시가 연신 터지고 있어 그 눈부심에 한보배와 허훈이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고.

“한보배 씨! 이쪽 좀 봐주세요!”

“보배 씨! 활짝 웃어 주시겠습니까!”

기자들의 요청은 정신없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둘은 그래도 수많은 요청에 보답하고자 삐걱삐걱 로봇 같은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관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은.

“언니! 너무 예뻐요!!”

“사랑스럽다아!!!!”

“누나아아아아!!”

그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지잉-.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양상철이 보낸 문자다.

[신 대표! 저 왔습니다. 지금 바쁜 것 같으니 이따가 무대인사 끝나고 잠깐 봅시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관객석을 둘러보니 저 멀리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양상철이 보였다.

그 옆엔 수상한 몰골을 한 일행도 있었는데.

푹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실내임에도 꿋꿋이 쓴 선글라스.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소속 배우랑 같이 온 모양이다.

그들 주변에서도 나와 같은 의심을 하는 몇몇이 보이긴 했으나 지금은 앞에 나온 한보배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양상철에게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다시 무대로 고개를 돌리니 잠시 당황하던 사회자가 GV 진행을 위해 모두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 <투명한 사랑>의 인기가 실감 나네요. 우선 기자님들 저희 GV 시작해야 하니 사진 찍으실 때 플래시는 조금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사회자의 말에 번쩍임은 잦아들었고.

무대에는 의자가 세팅되었다.

무대 위 세 명이 의자에 앉으려는데.

꼭 마지막까지 말 안 듣는 사람은 어디에든 있다.

“한보배 씨! 인사 한 번만 해주세요!!”

한 기자의 애처로운 비명에 그녀는 의자에 앉다 말고, 벌떡 일어서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한보배입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기함했다.

아니, 저렇게 인사하는 여배우가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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