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부산(3)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들리는 새까만 광안리의 밤.
나는 그 앞 포차에 앉아 웃음소리가 정겨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진짜 많이 배웠어요. 허허. 이것 참. 나이 먹을수록 배울 게 더 많습니다.”
그는 마켓에서 만났던 양상철.
“아닙니다. 저도 혼자 다니는 것보단 훨씬 재밌었습니다.”
“근데 정말 포차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맛있는 거 사드리려고 했는데.”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부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여기거든요.”
“허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오늘 신 대표는 괜찮은 영화 좀 찾았습니까?”
“아니요. 원래 마켓에선 꼭 마지막 날 좋은 영화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양상철은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런데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 동년배처럼 느껴지네요. 허허. 이런 말 젊은 사람한테는 실례인가.”
실제로 회귀 전 내 나이와 별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런 소리 평소에 많이 들어서요.”
“어쨌든 이렇게 저녁까지 같이 먹어줘서 고맙습니다. 신 대표도 알겠지만. 대표라는 직책이 참 외롭거든요.”
전생에서 많이 느껴봐서 알고 있다.
원래 위로 올라갈수록 쓸쓸하다.
“어차피 저도 혼자 먹을 생각이었는데 서로에게 잘 된 거죠. 뭐.”
“그래요. 그래. 자 한잔합시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쳐 단숨에 털어 넘겼다.
“크어! 광안리에서 먹는 소주 맛은 왜 이리도 맛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대답하려는 찰나 저 멀리 노란 불빛이던 광안대교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맞습니다. 술은 역시 분위기에 먹는 거죠.”
양상철은 포차 테이블에 놓인 두툼한 회 한 점을.
나는 자극적인 불 향을 과시하는 꼼장어 구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오물거리며 앞에 앉은 양상철을 유심히 살폈다.
종일 같이 다니면서 관찰한 그는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한 유명 엔터 회사의 대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털털했고.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인정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그린 애플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그런데 양 대표님. 혹시 그린 애플 해외 활동 준비 중이십니까?”
양상철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 회사 극비인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쪽 소문이 좀 빠르지 않습니까. 완전한 비밀은 힘들죠.”
“그렇긴 하죠. 휴우. 그것 때문에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조금 더 그를 유도했다.
“그러게요.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예. 거의 개척 수준으로 해내 가야 하는 상황이라.”
흐음. 아직은 언론을 조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말을 속 시원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패를 좀 더 까줘야지.
“그런데 개척이라면 정말 미국진출이 맞는 겁니까?”
“어이구! 이거 거의 스파이를 심어놓으신 수준의 정보력입니다!”
“제가 좀 발이 넓습니다. 아직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니 기자들한테까지 새어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양상철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보니 신 대표는 믿을만한 사람 같아요. 그래서 걱정하진 않습니다. 이왕 거기까지 알고 계신다니 맘 편히 이야기하죠.”
나는 조용히 그의 비워진 소주잔을 채웠다.
“미국진출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국내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거라 준비할 게 많더군요.”
“그렇겠죠. 그럼 대표님께서 직접 미국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는 답답한지 채워진 소주잔을 곧바로 마셨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참. 회사에 그린 애플 애들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론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해외 스케줄을 소화하는 담당자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누가 그녀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을까.
그리고 왜 양상철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한 일이 아님에도 뒤늦은 후회의 고백을 한 것일까.
그 의문은 곧 사라졌다.
“그래서 제 동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회사를 같이 꾸려온 놈이거든요.”
아.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양상철은 동생의 악행을 자신이 덮어쓴 것이다.
그때.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저절로 내뱉어졌다.
“양 대표님. 안 됩니다.”
갑작스러운 내 발언에 그의 눈이 똥그래졌다.
“예? 뭐 가요?”
“미국에 동생분 보내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이 직접 가셔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린 애플이.”
잠시 나를 빤히 보더니 빙긋 웃었다.
“신 대표! 취했어요?! 에이! 술이 쪼금 약하네! 그나저나 소주 한 병 더 주문해도 되죠?!”
답답한 마음에 냅다 지른 건데 말하면서도 안 믿을 줄 알았다.
흠, 그럼 어쩔 수 없지.
플랜 B로 가는 수밖에.
*
광안리에서 양상철과 헤어지기 전 이 말을 전했다.
<투명한 사랑>의 상영 날에 꼭 와달라고.
그는 가슴팍까지 탁탁 치며 참석을 약속했으나 만약 오지 않더라도 내 계획에 차질은 없었다.
오면 일이 더 쉬워지긴 했지만.
그리고 본업으로 돌아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켓 개최 시간에 맞춰 벡스코로 향했고, 종일 열심히 걸었다.
마켓이 열리는 총 3일간 그 넓은 곳을 꼼꼼하게 훑었는데도.
결국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도 마음에 드는 영화를 찾지 못했다.
현재 시각 17시.
한 시간 뒤면 마켓은 문을 닫는다.
요 며칠간의 일정이 너무 빡빡해 당장이라도 벤치에 앉아 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번 영화제를 놓치면 최소 몇 개월은 더 기다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둘러보자.
라는 심정으로 곧 나갈 것 같은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그 후로 미로 같던 부스 사이를 정말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굽이굽이 들어가야만 보이는 곳의 부스를 하나 찾았는데.
그곳에 크게 붙여진 포스터가 눈에 익었다.
푸르스름한 배경 앞으로 클로즈업된 한 여자의 기괴한 눈에는 검은색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기억난다.
이 맘쯤 개봉했던 태국의 공포 영화.
<워싱>이었다.
지금 시대는 전생과는 달리 공포 영화의 전성기였다.
한국, 일본, 태국 할 것 없이 수많은 공포 영화들이 제작되었고.
만들어 놓기만 하면 대부분 손익분기점은 넘겼었다.
그리고 저 <워싱>은 가히 공포 영화계의 획을 그은 영화라고 할 수 있었다.
공포 영화의 성지인 일본을 제치고, 태국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초대박을 친 후 국내 제작자들 가슴에 공포라는 장르로 불을 지폈었지.
공포 영화는 다른 장르보다 제작비가 낮기도 해서 가격이 그렇게 높게 측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순간 이거다!
라는 필이 왔다.
부스의 위치 때문인지.
그곳은 다른 곳과 확연하게 비교되며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내가 부스 안으로 발을 옮기자 다른 곳과는 달리 세일즈 담당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부스에 걸린 포스터와는 완전히 다른 선한 인상의 태국인이었고.
국제 행사라 그런지 신경을 많이 쓴 모습이었다.
잘 다려 날이 서 있는 정장 바지와 재킷.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머리까지.
내가 정한 기준에 딱 맞는 영화를 발견해서 그런지 별게 다 마음에 든다.
“어서 오세요!”
“예. 안녕하세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영화 얼마입니까?”
*
다음날.
나는 영화제에서 지정해 준 호텔로 옮겨 체크 인한 후 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빵빵-.
클랙슨을 울려대던 렌터카는 내 앞에 멈춰 섰고.
지잉-.
내려간 조수석 창문에는 나경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선배님! 부산까지 와서 굶으셨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반가웠던 게 아니라 내 몰골에 놀랐던 거구나.
3일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걸어 다녀서 그런지 살까지 빠진 모양이다.
“할 일이 좀 많았습니다.”
운전석에 있던 예정우는 이미 여름이 다 지나갔음에도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와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내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표님!”
또 시작이다.
“여기가 바로 영화인의 축제가 열린다는 그 영화의 도시인가! 하하하!!”
어지간히 신났나 보다.
뒷좌석에서 내린 허훈과 한보배는 텐션이 잔뜩 떨어진 모습이었다.
“아이고.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휴우.”
안 봐도 뻔하다.
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영혼이 갈려 나가고 있는 거겠지.
비척비척 쓰러질 것 같던 한보배는 갑자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우욱! 대표님! 화장실! 화장실 어딨어요!”
“예?! 저기요! 저기!”
내가 급하게 호텔 안쪽을 가리키자 나경의 부축과 함께 둘은 후다닥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다 예정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님. 운전을 얼마나 험하게 하셨길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아! 내가 얼마나 부드럽게 운전하는 사람인데!”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예정우 운전 실력이 아주 험하다는 사실을.
“그나저나 대표님. 어떻게 돈은 많이 버셨어?”
결론만 말하자면 <워싱>은 1,000만 원에 계약서 도장까지 찍고 왔다.
보통 영화를 계약하면 책정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우리나라에 유통했을 때 생기는 극장 수입의 퍼센트를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 영화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극장 수입에 대한 항목은 빼고, 금액을 조금 올리는 조건을 제시했다.
다행히 아예 팔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워싱> 쪽에서도 흔쾌히 조건을 수락했다.
한국에 들여와 개봉하더라도 배급사는 꼭 끼어야 하기에 조금이라도 돈이 분해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얼른 들어가죠.”
“오올! 말 돌리는 거 보니까 많이 벌었나 본데! 그럼 나 채용된 거예요?! 대표님?”
“그건 서울 가서 다시 이야기하시죠.”
“으잉? 진심?”
진짜로 채용 의사를 밝히자 예정우는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는 두고, 차 트렁크 안에 있던 짐을 양손 가득 챙겨 호텔 입구로 향하자 예정우도 급하게 남은 짐을 챙겨서는 따라왔다.
“가, 같이 가!”
허훈까지 셋이서 로비 소파에 쪼르륵 앉아 조금 기다리자 화장실에선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래진 한보배와 그녀를 부축 중인 나경이 나왔다.
“속은 괜찮아요?”
“예에······. 괜찮습니다.”
“다들 얼굴 보고 말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들어도 괜찮겠어요?”
“네네. 비우고 왔더니 한결 좋아졌어요.”
그렇다면 더는 미루기 힘들다.
나도 꽤 입이 근질거렸기에.
“저희 영화 전 좌석 매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