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부산(1)
“와. 대표님. 진짜 사업 쪽으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신 것 같아요!!”
의상실을 나온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한보배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예? 뭐 가요?”
“어떻게든 협찬받아주시려는 그 의지가 너무 대단해 보였거든요.”
음, 한보배 눈에는 내가 나은 대표에게 한 말이 그저 협찬을 위한 전략 정도로 보였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저는 제 생각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거야 잘 알고 있죠.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진짜 수상까지 할 수 있을까요?”
무한신뢰를 보이던 그녀도 이번에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잖아요? 저 한번 믿고 보배 씨도 우리가 수상한다. 한다. 생각하고 계시면 또 압니까? 진짜로 저희가 할지. 하하.”
“그렇게 되면 정말로 좋겠네요······.”
아련한 눈빛의 한보배와 다른 사람들과도 헤어진 뒤 지하철에 올라탔다.
모두와 헤어지자 온몸에 빵빵하게 들어 있던 긴장이 푸쉬쉬 빠져나갔다.
앞에선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긴장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보배의 드레스 협찬은 나앤케이에서 해주기로 결정됐다.
어차피 수상은 우리라는 내 말에 나은 대표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좋아요. 사실 저희 막둥이가 친구들을 소개해 준 게 처음이라 뭐든 하나 정도는 들어드리려고 했는데, 감이 오네요. 진짜로 저희 드레스가 화제가 될 것 같은 감.
그리고 나은 대표는 한보배 옆에 설 허훈의 의상까지 준비하겠다는 화끈한 확답을 해주었다.
허훈은 멍한 얼굴로 이게 ‘꿈은 아니겠지’라는 말을 우리와 헤어질 때까지도 수십 번 되뇌다가 집으로 향했다.
앞은 잘 보고 가는 건가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아무튼 이로써 영화제 준비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의상은 클리어했고.
어느새 도착한 고시원 책상에 앉아 책장에 꽂혀 있던 <신바드의 모험>을 꺼냈다.
사실 나은 대표에게 했던 말은 그냥 무작정 질렀던 게 아니다.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로 일반적인 영화제에선 상을 받는 팀에게 폐막식 참석을 전달한다.
상도 못 받는데 오라 가라 하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는가.
두 번째로는.
회귀 후 받은 이 시나리오 북.
엊그제 드디어 습관처럼 확인하던 <신바드의 모험>의 백지에서 기다리던 단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시나리오 북을 들어 단어가 나타난 부분으로 조심스럽게 넘겼다.
[하이힐, 수상]
단어들은 아직 장면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앤케이 의상실에 갔던 오늘의 분량보다도 꽤 뒤 장에 있는 걸 보면 이 부분은 분명 영화제에서의 장면이겠지.
그렇다면 당연히 저 ‘수상’이란 단어가 <투명한 사랑>이 상을 탄다는 것 아니겠어?
라고 추측한 것이었다.
허훈과 한보배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게 뻔하니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던 건데.
드레스 협찬이 손에 잡힐 듯한 상황에선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단어는 참 추측하기 힘든 것이 나올 때가 많았다.
수상은 대충 이런 식으로 유추한다고 해도 하이힐은 도대체 무얼 뜻하는 것이며 저것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걸까.
보고 있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 그저 하이힐을 주의 깊게 살피기로 하고, 그대로 <신바드의 모험>을 덮었다.
*
그 뒤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나앤케이 쪽에서 어찌나 열정적으로 의상을 준비해주었는지 피팅은 하루 이틀로 끝날 규모가 아니었다.
또 부산까지 이동할 렌터카며 행사 당일 이용할 해운대의 샵 예약 등 차곡차곡 준비할 것이 꽤 많았다.
그러던 중.
허훈과 한보배의 의상을 결정하기로 한 날 드디어 기사가 터졌다.
『화제의 작품 ‘투명한 사랑’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초청』
『‘투명한 사랑’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
『부산국제영화제가 먼저 알아본 ‘투명한 사랑’ 상영 일정 화제』
『‘투명한 사랑’ 과연 작품성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과 함께 무대인사까지. 곧 베일 벗을 ‘투명한 사랑’』
물론 부산국제영화제 측에서 기사를 내기 전 내겐 미리 언질을 준 상태였다.
“보배 씨. 이거 기사 보셨어요?”
“예? 어떤 기사요?”
내가 핸드폰을 내밀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허억! 기사가 도대체 몇 개나 올라온 거예요?!”
“글쎄요.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좋아할 줄 알았던 한보배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휴우. 저 너무 긴장돼요.”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보배 씨가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하던 대로만.”
“그래도······. 긴장했더니 배가 더 고프네요.”
“아침 안 먹고 왔어요?”
“네에. 피팅 날 밥을 어떻게 먹고 와요. 으앙.”
흐음. 무작정 굶기보다는 규칙적인 식단과 운동으로 관리해야 할 텐데.
그녀도 이제 곧 우리 영화만이 아닌 다른 섭외도 들어올 거고, 그럼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할 거다.
전생에서 엔터 쪽 사람들이야 워낙 많이 마주치니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무래도 괜찮은 소속사를 소개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해보니 또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건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고.
옷을 다 갈아입은 허훈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깔끔한 정장을 입으니 역시 사람이 달라 보인다.
“감독님은 그걸로 하시면 되겠네요.”
한껏 신이 난 허훈의 뒤로 이번엔 한보배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의 무대인사 의상은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올 블랙 세미 정장이었고.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는 매력을 끌어 올려주는 옷이었다.
“조금 어색하긴 한데 어때요?”
“저는 아주 좋습니다.”
이제 한보배의 드레스만 결정되면 준비가 거의 끝나가나 싶었는데.
나은 대표가 많이 상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기. 보배 양 드레스 말이에요.”
“예.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문제라기보다는 제가 욕심이 나서요.”
욕심? 무슨 욕심이 난다는 걸까.
“사실 처음엔 그저 도와준다는 개념으로 완성품 드레스를 대여해드리려고 했거든요. 근데 디자이너란 자고로 좋은 모델을 보면 더 열정이 불타오르는 법이라.”
전생에서도 한보배가 다수 디자이너의 뮤즈이긴 했지.
“이런 모델을 살릴 수 있는 드레스는 현재 의상실에 없어요.”
“그럼 지금 설마 제작하겠다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은 대표는 투지에 불타는 눈으로 말했다.
“예. 지금 오직 보배 양만을 위한 드레스를 디자인 중이에요. 기한은 무조건 맞춥니다. 제 철칙이니까요.”
“해주신다니깐 받겠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나은 대표는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오싹한 대답을 건넸다.
“당연히 무리지만 제겐 선택권이 없어요. 얼굴이며 몸매며 이렇게도 완벽한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에게 한탄이라고 하고 싶다니까요. 너무 했다고.”
“크흠. 뭘 또 그렇게까지.”
전혀 찔려서 한 말은 아니었다.
여하튼 나은 대표는 그 후로 이번 일은 자신에게도 크나큰 도전이라는 말과 함께 밤낮없이 작업하는지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이제 최고의 디자이너인 그녀를 믿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
그렇게 부산으로의 출발은 점점 다가왔고.
모든 준비가 끝난 어느 날.
백팩 안에 필요한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예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예정우는 부산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한 뒤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들을 걸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시킬 건 없고요. 저는 오늘 먼저 부산 내려갑니다. 형님.”
-에엥? 혼자 간다고? 그럼 우리는?!
갑작스러운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대표님 소리가 쏙 들어갔다.
“형님이 짐이랑 다들 챙겨서 오세요. 미리 말한 대로만 움직여주시면 돼요. 저만 그 계획에서 빠지는 겁니다.”
-나 혼자는 좀 걱정되는데!
“나경 씨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형님 혼자 불안해서 부른 겁니다.”
-이 짜식이! 나경이 없어도 잘 할 수 있거든! 근데 무슨 일인데? 설마 아직 끝나지 않은 해수욕장 시즌이라 혼자 물장구라도 치러 가는 건 아니겠지!!
시즌 끝난 지가 언젠데.
이 형님 속은 아직 청춘이어서 그런지 사계절이 여름인가 보다.
“형님 정식 출근시켜 드리려면, 돈 벌어야지 않겠습니까.”
-돈?!
“예. 그럼 저는 먼저 돈 벌러 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