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2화 (12/140)

#12화. 나앤케이

작품 초청도 대박인데 레드카펫이라니!

당연히 화제가 될 만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세우겠지.

생각하고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최근까지도 인터넷에서 난리였던 한보배 동영상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어쨌든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리는 준비할 게 많았다.

“다들 오셨습니까.”

허훈, 한보배, 나경, 예정우를 부른 곳은 강남의 한 고급 음식점.

겹경사를 맞이했으니 축하할 겸 모인 자리였다.

“전화로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저희가 아무래도 일을 좀 크게 친 것 같습니다.”

룸에서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기다리며 앉아있던 모두는 드디어 내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와이드앵글 부문 초청과 함께 폐막식 레드카펫에 와달랍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소리 지를 것 같던 입을 우물거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와아아!! 대박!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야! 허훈! 대표님이 대표님 소리 싫어하시잖아! 선배님. 고생 너무 많으셨습니다.”

아, 이래서 나경은 나를 끝까지 선배님이라 불렀던 거구나.

“바드. 이 자식 언젠가는 일낼 줄 알았다니깐! 근데?! 나를 이 자리까지 부른 건 드디어 채용의 뜻을 밝히겠다는 건가?!”

뭐, 비스무리하긴 하다.

이렇듯 열광적인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한보배가 앉은 쪽은 생각보다 미지근해서 그녀를 쳐다보던 그때.

훌쩍.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훌쩍임에 모두는 합죽이가 되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한보배는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눈물을 쓱쓱 닦더니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에 그녀의 얼굴은 곧 발개졌다.

“앗! 운 거 아니에요! 너무 기뻐서 코, 콧물이!!”

음, 한보배는 기쁠 때 콧물이 나오는구나.

이미 전생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내게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녀에게 티슈 하나를 건네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다들 기뻐하시니 저도 너무 좋네요. 그럼 식사도 얼추 다 하신 것 같은데 영화제 준비 일정을 좀 공유하려고 합니다.”

무려 레드카펫을 밟는다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갈 순 없었다.

“우선 폐막식 참석이 주이긴 한데 저희 영화 상영 날이 폐막식 이틀 전입니다. 그때 무대인사 시간이 짧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허훈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대인사까지요?!”

“예. 그러니 출발은 상영 전날 하겠습니다.”

“와. 벌써 기대돼요!!”

허훈의 호들갑과 모두의 끄덕임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레드카펫 하면 또 의상을 준비해야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한보배의 눈이 반짝거렸다.

드레스에 욕심나지 않을 배우는 없을 것이다.

“드레스 협찬은 제가 발로 뛰어서라도 받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보통 탑 배우들은 유명브랜드에서 서로 협찬해 주겠다고 난리가 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인터넷상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더라도 허훈과 한보배는 너무 쌩 신인이다.

협찬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실정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네! 저는 대표님 완전 믿어요!”

부담스러움은 뒤로 미뤄두고, 이번엔 나경과 예정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경 씨랑 형님도 같이 가시죠. 저 혼자서 진행하기가 좀 힘들어서요.”

예정우는 ‘역시 채용이구만.’이라는 말을 짧게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경은 흠칫 놀랐다.

“예?! 저까지요?”

“네. 나경 씨 이 영화 PD잖아요?”

“그렇긴 하죠.”

“할 일 많아서 같이 가자고 하는 겁니다. 보배 씨도 저희랑만 있는 것보단 나경 씨 있는 게 더 편할 거고.”

“알겠습니다. 그럼 가는 김에 열심히 돕겠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 허훈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그렇게 되면 회사 측에서 비용이 너무 부담되시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이들은 이제 내 회사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스태프들이다.

경비 지출은 당연히 해줘야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숙박과 교통편은 영화제 측에서 해주기로 했고, 저는 대표로서 여러분께 투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조금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역시 보답할 길은 제가 장편 시나리오를 더 열심히!! 빨리!! 쓰는 길밖에 없겠군요!”

흥분한 그를 진정시켰다.

“감독님. 속도보다 퀄리티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밤은 절대 새우지 마세요. 감독님도 영화의 얼굴입니다.”

허훈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이거 원. 살짝 무섭다.

그때.

나경이 조심히 손을 들었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녀는 왠지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도 할 참인지 짧고 굵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드레스 말이에요.”

“예. 혹시 아는 업체라도 있습니까?”

“저희 언니가 작은 의상실을 하고 있어서요. 협찬 힘드시면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안 그래도 가장 힘든 부분이었는데 술술 풀려간다.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어디서 하십니까?”

“여기서 멀지 않아요.”

으응? 작은 의상실을 강남에서?

“그럼 이왕 이렇게 모인 김에 오늘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지금 괜찮을까요?”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언젠간 알게 될 거 가시죠.”

뭐지? 나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주 수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우리는 잠시 후 강남의 고급스러운 의상실 접객실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허훈.

“이 배신자!”

이에 질세라 나경도 맞받아친다.

“배신자?!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그럼 배신자지! 어떻게 나앤케이 대표 나은 님이랑 자매라는 걸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속이다니? 말을 안 한 것뿐이잖아?”

그녀 말도 틀린 것은 없는지 허훈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렸다.

어휴, 싸우는 게 아주 초등학생급이다.

그나저나 나경의 언니가 나앤케이 대표였다니.

나앤케이는 전생에 패션테러리스트라고 불리던 나도 알고 있는 브랜드였다.

브랜드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였던 나은이 해외에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하더니 회귀 직전에는 명실상부 국내 최고 패션 브랜드가 되었더랬지.

세상 참 좁다.

이렇게도 인연이 이어지는구나.

그때.

접객실로 들어오는 한 여자.

그녀는 대략 30대 중반으로 보였고, 나경과는 닮은 듯 달라 보였다.

나경이 조금 순둥순둥한 인상이라면 여자는 날카롭고, 빡빡해 보이는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아마 언니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쉽사리 자매라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찔한 힐을 신고 걸어오던 여자는 우리 무리 중 왜인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나은입니다. 나경이 친구분들이시라고?”

그러자 나경이 손사래를 하며 끼어들었다.

“아니야! 언니! 지금 악수하신 분은 제작사 대표님이시고, 다 우리 영화 관계자분들이셔. 친구 놈은 여기 이 빨간 뿔테 놈밖에 없어!”

그러자 누가 봐도 자신의 소개가 끝난 허훈이 대뜸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나은 대표님. 저는 <투명한 사랑>의 감독 허훈입니다. 시작은 단편이지만, 곧 장편을 준비하고 있지요. 그나저나 엄청난 미인이십니다. 하하.”

조금은 차가워 보였던 나은도 이런 말은 기분이 좋았는지 해맑게 웃었다.

“어머머! 재밌는 친구들이네! 호호.”

그러더니 허훈은 대뜸 그녀에게 고백했다.

“제가 진짜 팬입니다!”

나와 비슷한 과일 것 같았던 그의 외관과는 다르게 패션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나앤케이가 아직 그렇게까지 유명해졌을 시기는 아닌데.

“제가 나은 대표님이 디자인한 옷들은 매번 찾아서라도 봅니다. 어떻게 그런 디자인과 핏을 구상하시는 겁니까?!”

“호호. 의상이 세상에 나올 때는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구현해내냐가 가장 중요하지요. 그리고-.”

아이고. 누가 보면 팬미팅이라도 온 줄 알겠다.

항상 똑 부러지던 나경은 이런 설명충 언니가 낯설었는지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흘러가고는 있었으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아직도 나은 앞에서 얼쩡거리던 허훈을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이제 내 차례라는 듯이.

“안녕하십니까.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입니다.”

내가 건넨 명함을 받아든 나은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머 이름이랑 제작사 이름이 너무 잘 어울리네요! 그럼 그쪽이 <투명한 사랑> 장편으로 만들겠다고 하신 분이구나?”

나경이 얼추 이야기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 제안하기가 쉽지.

“예. 맞습니다. 바쁘신 분인 거 알고 있어서요. 제안 하나 빠르게 드려도 되겠습니까?”

“흐음. 제안이요?”

나은의 표정은 어딘가 묘했으나 신경도 쓰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배 씨. 잠시 눈과 귀를 좀 막아주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그녀가 두 눈을 꼭 감고, 양손을 귀에다 대자 말을 이었다.

“대표님. 혹시 이 동영상 본 적 있으십니까?”

최대한 소리를 작게 해서는 한보배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푸웁! 저는 처음 보는 동영상이네요. 그런데 어머, 너무 사랑스럽다!”

반응 괜찮고.

아직 눈을 감고 있던 한보배를 가리켰다.

“이 동영상의 주인공이 저기 서 있는 한보배 씨입니다.”

나은은 핸드폰과 그녀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이 되었다.

“어머?! 진짜네요?”

“저희가 이 상 받은 영화로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습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건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한보배 씨가 입을 드레스 협찬 건입니다.”

나은은 거기까지 들었음에도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실 저분의 미모나 태가 상당히 욕심나는 건 사실이지만, 저도 사업을 하는 사람인지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협찬한다면 저희 쪽에서 얻는 이득이 있습니까?”

사업가 기질이 탁월한 사람이다.

“당연히 있지요. 이미 한보배 씨는 이 동영상으로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저희 영화에 대한 관심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고요. 아마도 영화제 측에선 그걸 노리고 저흴 부른 걸 테니 곧 홍보용 기사가 쏟아질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요?”

“대표님은 드레스가 한 번이라도 더 노출되는 쪽이 좋으시겠죠?”

“그거야 당연하죠.”

그쯤 나는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드레스는 걱정 없겠구나.

“한보배 씨가 입은 드레스는 한 번 정도가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겁니다.”

“예? 어떻게 화제가 된다고 확신하시죠?”

원하던 질문을 들었으니 시원하게 질러버렸다.

“어차피 수상은 저희 팀이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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