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0화 (10/140)

#10화. 졸업영화제

허훈의 장편 시나리오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렇다고 그를 닦달하진 않았다.

내가 직접 해보니 절대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2회차 첫 여름의 더위는 서서히 꺾이고 있었다.

상영회를 위해 방문한 운서대에서 만난 그는 예상대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으어. 대표니임······.”

“감독님. 시나리오 천천히 나와도 되니깐 제발 잠은 자면서 하세요. 사람들이 절 욕한다니까요.”

“죄송해요. 그런데 잠이 안 옵니다. 휴우.”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허훈은 고개를 저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은 연락드리고 싶은데 참고 있습니다. 한 번 도움받으면 계속입니다. 안 그래도 도움 많이 주셨는데 장편은 꼭 제힘으로 완성도 높게 뽑고 싶어요.”

의지가 대단하다.

거장 허훈을 내가 위로하고 있으니 괜히 뿌듯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진짜 진짜 안되는 건 연락드릴지도 몰라요······.”

“감독님은 할 수 있어요. 영화가 잘 되든 안 되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편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해골 같던 그 얼굴에서 조금씩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할 수있다아!!”

양팔까지 번쩍 들고 다짐하던 그는 누군가에게 등판을 퍽! 하고 맞았다.

“허훈! 연출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교수님이 찾고 난리 났잖아!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나경은 와중에도 깍듯한 인사를 위해 허리를 꾸벅 접었다.

“아아, 미안. 그럼 대표님. 안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허훈은 나경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멀어졌다.

둘이 들어간 건물은 운서대 영화과 학생들의 졸업작품이 상영되는 곳이었다.

[운서대학교 졸업영화제]

건물에는 그럴듯한 플래카드까지 걸려있었고.

안에는 상영작들의 순서가 적혀 있는 팸플릿도 꽂혀 있었다.

학교 측에서 준비를 꽤 많이 했네.

팸플릿을 확인해 보니 오늘 상영되는 작품은 총 15 작품이었다.

의외로 출품작이 많다.

시상식도 한다는 것 같던데 오늘은 <투명한 사랑>을 대중에게 처음 선보이는 자리다.

이곳에서 얼마나 인정받느냐에 따라 장편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작품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에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 하나는 받겠지 싶어서 꽃다발도 하나 사 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표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보배 씨.”

“잘 지내셨어요?”

그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잘 지냈죠. 보배 씨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좋아졌는데요?”

한보배는 자신의 볼에 손을 얹고는 의아해했다.

“제 얼굴이요? 그냥 연기 연습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알겠다.

그녀가 밝아진 이유.

“보배 씨가 연기를 진짜 좋아하나 보네요. 좋아하는 걸 하면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확실히 크죠.”

“그, 그런가요?”

내 말에 그녀의 볼은 발그스름해지더니 말을 돌렸다.

“근데 대표님 운동하셨어요?”

“티 나요?”

“네! 어깨가 장난 아니에요!”

“하하. 운동 틈틈이 한 보람이 있네요. 그럼 상영시간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들어갈까요?”

“네! 저 너무 기대돼요!”

오늘따라 그녀는 굉장히 말이 많았다.

조잘조잘.

전생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편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인가.

작은 독립영화관 같은 곳에 들어간 우리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영화제는 총 3부로 진행되었고.

1부와 2부에 작품들이 나뉘어 상영된 뒤 3부에서 시상식이 진행되는 순서였다.

<투명한 사랑>은 2부에서도 거의 끝 순서.

곧 어둠이 깔리고, 학생들의 열정이 담긴 작품들의 상영이 시작되었다.

작품들이 하나하나 끝나갈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작품이 나쁘진 않았으나 예상대로 천재를 이길만한 상대는 보이지 않는구나.

그나마 견주어 볼 사람은 이주호 정도?

그럼 뭐 하나.

저놈은 인성이 쓰레기인데.

회귀 전 주연배우 때문에 피를 본 게 엊그제 같다.

이번 생은 절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저놈이랑은 조금이라도 엮이지 말아야지.

옆에 앉은 한보배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이주호의 <악의 기적>을 본 뒤 조심히 물었다.

“이거 꽤 괜찮네요? 저 배우가 원래 투명한 사랑 주연이었죠?”

“예. 저희 거 나가서 이거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내 대답에 그녀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연기와 꼼꼼히 비교해보는 듯했다.

“보배 씨 연기가 훨씬 더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정말요?”

연기는 그렇게도 잘하면서 자기 속마음은 저리도 숨기지 못하는지.

내 칭찬에 어깨가 한껏 올라간 모습이다.

이주호가 우리 작품 앞이었기 때문에, 곧 스크린에는 <투명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확신과 긴장은 별개인지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영화에 집중을 하나도 할 수 없었다.

상영 내내 주변 관객들이 영화의 호흡을 잘 따라오는지 유심히 체크했다.

내부의 불이 켜지고, 크레딧이 올라오자 관내는 영화에 대해 사담을 나누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했다.

귀를 쫑긋 열었다.

“와, 저 배우 뭐야? 신인인 거 같은데.”

“그러게. 연기를 어떻게 저렇게 하지? 나 소름 돋았잖아.”

“애초에 투명 인간과의 사랑이라는 발상도 엄청 신선한데?”

“카메라 워킹도 장난 아니었어.”

“마지막 장면 연출은 또 어떻고.”

“난 남자가 눈물 닦아 줄 때 울컥했잖아.”

역시 호평 일색이다.

영화제야 기다려라!

상영이 모두 끝나자 사회자가 무대로 올라왔다.

학교에서 주는 상은 연기상, 작품상, 기술상, 인기상 이렇게 총 4개.

사회자의 안내로 모든 작품의 연출자는 빠짐없이 무대로 향했다.

그중에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허훈도 있었고.

전생과는 다른 앳된 얼굴의 이주호도 보였다.

그는 긴장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투명한 사랑>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놈아.

착하게 살아라.

그래야 복이 온다.

“자! 드디어 시상 시간입니다. 이번 영화제는 유독 경쟁이 치열하다고 들었는데요. 과연 어느 작품이 상을 받게 될까요!”

사회자의 목소리에 무대 뒤에선 누군가가 나왔다.

“그럼 인기상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시상은 총장님께서 직접 해주시겠습니다.”

켄터키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할아버지 한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선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작품들 하나하나가 좋습니다. 영화과의 장래가 밝아요. 상을 받지 못한 팀도 모두 자랑스럽다는 말을 꼭 하고 싶네요. 그럼 시상하겠습니다. 인기상엔-.”

유일한 코미디 장르가 상을 받았다.

연출자가 해맑은 표정으로 나와 총장에게 상패와 꽃다발을 받고는 들어갔고.

시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다음으로 기술상 발표하겠습니다. 이주호 연출자의 악의 기적입니다.”

작품이 나쁘진 않았으니 뭐.

잘은 모르지만.

아무리 한 작품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학교 측에서 상을 몰아주진 않을 것이다.

이 영화제는 학생들의 축제와도 같을 테니까.

한 작품이 독식하면 다른 팀들의 의지는 얼마나 떨어지겠는가.

인기상이나 기술상보다는 작품상과 연기상 중 하나만 받아도 됐다.

이게 진짜 실속 있는 상이다.

총장은 똥 씹은 표정의 이주호를 뒤로하고, 다음 시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작품에 참여해 준 배우분들을 위한 상입니다.”

옆을 보니 한보배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어지간히 긴장되나 보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연기상. 투명한 사랑의 한보배 님. 축하드립니다.”

그 순간.

옆에서 뭔가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짜 깜짝 놀랐다.

그 청순가련 한보배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관객들은 그녀의 모습에 웃기 시작했다.

켄터키 할아버지도 간신히 웃음을 참고, 그녀에게 말했다.

“누가 봐도 한보배 님이네요. 나오시면 됩니다. 허허.”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곤 무대로 나갔다.

트로피를 손으로 받았는지 발로 받았는지도 모를 만큼 후다닥 받아와선.

“대표님.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엄포를 놓고, 의자와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축하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손에 들린 꽃다발만 조용히 건넸다.

말은 걸지 말라면서 꽃은 또 받는다.

그나저나 연기상이 우리면 작품상은 누구지?

받을 만한 팀이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여기도 비리에 물들고 그런 거 아니지?

그런 거면 참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운서 영화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죠. 작품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손에 들린 작은 봉투에서 꺼낸 종이를 본 총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음, 영화과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네요.”

응? 설마?

“2관왕을 한 <투명한 사랑> 팀. 연출의 허훈 학생 정말 축하합니다.”

입이 떠억 벌어진 허훈은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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