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9화 (9/140)

#9화. 대표님은 아직 좀

한보배와 헤어지고 일주일이 지났으나 연락은 아직이었다.

뭐 그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고시원 침대에 풀썩 누워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려댔다.

확인해 보니 허훈이다.

“예. 감독님.”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지만, 근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쉬어 있었다.

“예. 저는 잘 지내죠. 감독님은 막 밤새우고 그러시는 거 아니죠?”

-에이. 당연히... 매일 새고 있죠. 하하!

그럴 줄 알았다.

“건강이 제일 우선입니다. 감독님 쓰러지시면 장편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해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선배님. 후반 일주일 정도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 정말요?”

-예! 하하. 원래는 오늘쯤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교수님께서 중간중간 편집에 관여를 많이 하셔서 늦어졌어요.

“교수님이요?”

-예. 뭐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초반 생각대로 갔습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최근에 한보배 씨 만나서 장편 제안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하신대요?

“꼭 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고요. 감독님은 후반 마무리만 잘해주세요.”

-역시 선배님 덕분에 든든합니다! 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대표님이라고 해야겠네요.

“대표님은 무슨. 그냥 형이라고 하세요.”

아직은 대표님 소리 듣기 싫다.

전생에서 너무 많이 듣기도 했고, 젊음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어떻게 그럽니까! 대표님!

그래. 말 안 들을 줄 알았다.

*

일주일 뒤.

나는 운서대학교로 향했다.

후반작업이 완료됐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와! 점점 더 멋있어지시는데요?”

꾸준한 운동이 빛을 발하나 보다.

“그런가요?”

오늘은 완성된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시사회 같은 자리였기에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한 강의실에 자리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백수가 된 예정우는 요즘 수염을 기르는지 턱 주변이 덥수룩했다.

“너의 추진력에 정말 감탄했다.”

“예?”

“어떻게 제작사 차릴 생각을 했어. 기특하다. 기특해.”

예정우는 껄껄 웃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그래서 그런데. 대표님. 혹시 직원 필요 없어?”

“아! 형님은 제발 대표님 소리 안 하면, 안 돼요?”

“할 건데. 대표님. 대표님. 대표님.”

그래. 역시 그도 말 안 들을 줄 알았다.

“어쨌든 직원 필요하면 내가 1순위다. 알겠지?”

“형님. 요새 영화 들어오는 거 없어요?”

영화 스태프는 프리랜서 개념이라 한 영화가 끝나면 이렇게 오래 쉬기도 한다.

나처럼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

“당연히! 괜찮은 거 고르는 중이지!”

“그럼 얼른 작품 들어가세요. 아라비안필름은 1인 기업입니다.”

단호박 같은 내 반응에 예정우는 조금 삐졌는지 혀를 차곤 몸을 돌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직 수입도 없는데 직원을 어떻게 뽑겠는가.

한보배도 오늘만큼은 아르바이트를 모두 뺐는지 막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에서의 시사회는 겨우 하얀 화면에 빔프로젝터를 쏴서 상영하는 것으로 조촐했으나 마음은 두근거렸다.

강의실 안 모두는 나와 유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참여한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다.

그 맛에 영화 못 그만두는 사람도 여럿이고.

드디어 강의실에 불이 꺼지고, <투명한 사랑>은 시작되었다.

장면 하나하나에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참여한 영화를 보다 보면, 스토리보단 다른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법인데.

오늘은 최대한 이 영화 자체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집중을 해서인지.

영화가 나를 이끌어서인지.

15분은 아주 짧은 시간처럼 흘러갔다.

참여 스태프들의 크레딧까지 모두 올라간 뒤 강의실은 다시 밝아졌다.

“와, 영화 엄청나게 잘 빠졌는데요?”

“그러게. 너무 좋은데?”

스태프들의 평이 나쁘지 않다.

허훈은 옆에 있던 내게 얼른 물었다.

“선배님은 어떠셨어요?”

“좋습니다. 장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의 확신이 들었어요.”

미래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허훈의 영화는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건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연출의 힘이다.

허훈은 그 감각을 애초부터 타고난 천재였다.

“다 선배님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뭐 있습니까. 같이 가는 사이에서. 근데 감독님. 이제 시작입니다.”

그는 꼭 롤러코스터 줄이라도 서 있는 아이 같았다.

“알죠. 너무 기대됩니다.”

허허, 이것 참.

즐기는 천재라니.

세상 혼자 사시겠네.

“아, 그보다 저희 이거 상영회가 9월 초거든요.”

지금은 6월 말이다.

“두 달 남았네요? 상영회 끝나면 영화제 출품하시죠.”

“영화제요?”

“예. 가서 이목 좀 끌어봅시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이제 장편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감독님. 편집 끝난 지 얼마 안 된 건 알지만 슬슬 장편 시나리오도 쓰셔야죠?”

내가 봐도 사악한 말이었으나 어쩌겠나.

제작사 대표는 살살 달래가며 쪼는 것도 적절하게 잘해야 한다.

허훈의 아이 같던 낯빛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렇죠. 대표님은 사람도 잘 다루셔.”

추욱 처진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한보배가 다가왔다.

“저기. 선배님. 감독님.”

“예. 보배 씨. 무슨 할 말이라도?”

그녀는 대뜸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드디어 답을 해주려는 건가.

“아닙니다.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죠.”

허훈은 무슨 말인지 몰라 우리 둘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감사합니다. 저 할게요.”

그제야 허훈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거! 저희 영화 한다는 대답 맞죠?!”

“네. 맞아요. 감독님. 한 번 더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얼마나 좋은지 한보배의 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덩실덩실 뛰었다.

“와!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허훈의 흥을 깨고 싶진 않았으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 그보다 감독님. 저희 해야 할 거 있습니다.”

“예? 뭘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저작권 등록은 필수입니다. 필수.”

*

“주호야. 이번에 허훈 작품 장난 아니라던데. 들었어?”

조용히 학식을 먹던 이주호는 허훈이라는 이름에 눈빛이 달라졌다.

정선태는 눈치 없이 입을 놀리는 친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야, 너 주호 거 안 봤냐? 소재 난리 나잖아. 혜원이 연기는 어떻고. 영화과에서 혜원이 잡는 놈이 이기는 거지.”

이주호는 정선태의 말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냥 작품으로 승부 보는 거지.”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분노에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그래그래. 상영회에서 결판나겠지. 내가 봤을 때 허훈 그놈이 상 받더라도 어차피 작품상은 악의 기적이야. 주호는 빽도 있잖아?”

정선태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랐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꼭 이주호의 실력이 아니라 그의 외삼촌인 박 교수 덕에 수상할 거란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야. 그만 좀 닥치고, 밥 좀 먹자.”

결국 이주호는 참지 못하고, 험한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친구들은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걸 깨닫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허훈의 작품에서 강혜원을 빼 온 것과 시나리오 집필부터 촬영, 심지어는 후반까지 외삼촌의 도움을 받은 것은 누군가에게 라이벌 의식 따위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저 모두를 압도적으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허훈 같은 놈은 애초에 자신과 비교될만한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작품이 완성되자마자 허훈의 작품은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보다 더 많이.

상황이 그 지경이니 외삼촌에게 부탁해 허훈이 제출한 작품을 봤다.

그렇게 본 <투명한 사랑>은 가히 자신이 평가할 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 영화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주호는 알 수 있었다.

분명 이놈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학생이 그런 퀄리티를 뽑아낼 순 없다고.

본래 영화는 감독 혼자만이 만드는 예술이 아니다.

실력 있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그 감독의 역량이었다.

허훈이 교수인 외삼촌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곁에 두었다는 사실은 그를 열받게 하기에 충분한 사실이었다.

“씨발. 진짜 열받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이주호는 밥을 끝까지 먹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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