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화 (8/140)

#8화. 아라비안필름

영화 제작사.

일반 사람들은 사업이라고 하면 굉장한 거리감을 느끼는데 사업자는 예상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등록할 수 있다.

사무실이 없어도.

준비된 자금이 없어도.

그래서 이번 생은 제작팀을 10년간 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 과감한 행보로 가보자 결심했다.

풍부한 지식, 경험, 정보가 있는 나에겐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허훈은 뒤풀이에서의 갑작스러운 내 제안을 당황하면서도 이내 받아들였고, 우선은 단편 편집부터 완성하기로 합의했다.

단편이 완성되어야 나도 투자받으러 다니기 수월하다.

<투명한 사랑>의 장편 화는 내 계획의 시작일 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허훈의 희대의 명작 <처절한 인생>을 내 손으로 제작하는 것.

이 장대한 목표를 이루려면 우선 회사부터 차려야지.

다음날 나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전생에선 사업자등록을 집 근처 세무서에서 손쉽게 하면 됐지만.

지금은 15년 전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관광부였던 시절.

영화업 신고서를 작성하려는데 생각해보니 상호를 생각하지 않고 왔다.

전생에선 내 이름을 딴 ‘바드 필름’이란 상호를 사용했으나 이번엔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언제나 놀림당했던 그 말들이 생각났다.

알라딘이랑 친구냐는 둥.

부모님이 이름 짓기 직전에 동화책이라도 읽었냐는 둥.

어린 마음에야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나중에 아라비안나이트, 즉 천일야화가 얼마나 다양한 서사가 있는 명작인지 알고는 내 이름에 자부심까지 생겼다.

그래.

제작사 이름은 그걸로 해야겠다.

신청서 빈칸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아라비안필름]

신청을 마치고, 은행으로 향하며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투명한 사랑>의 단편이 완성되면 본격적인 장편 시나리오 작업이 들어가야 할 거고.

이 작업은 허훈이 아무리 천재라도 시간이 꽤 필요하다.

그럼 중간에 시간이 붕 뜬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곧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까?

제작사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 외에도 돈을 버는 방법이 또 있었다.

자본도 생겼겠다.

이것도 계획에 넣어야겠다.

두근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도착한 은행의 문을 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창구 직원에게 당첨된 복권을 내미니 조금 놀란 눈치다.

“아, 수령 하시는 거죠?”

“예.”

“뒤에 인적 사항을 적어주시겠습니까?”

직원의 말에 복권을 돌려 보니 정말 내가 적어야 하는 칸이 있었다.

후딱 쓰고는 다시 내밀었다.

“1억 원 이하 당첨금은 세금 22% 공제하고 드려요.”

“예. 알겠습니다.”

“수령 방법은 계좌예금과 현금이 있습니다.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계좌예금이요.”

잠시 후 직원이 건네준 통장에는 당첨금 총 2,000만 원에서 500만 원 정도가 빠져나간 돈이 찍혀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했으나 많이도 떼 간다.

그래도 단숨에 목돈이 생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통장에 찍힌 남은 돈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고시원으로 향했다.

고시원 책상에 앉아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을 한번 정리하려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허훈이다.

“여보세요?”

-예! 선배님! 저희 오늘부터 편집 들어갔습니다!

“아, 쉬지도 못하고, 고생 많습니다.”

-고생은요. 요즘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이걸 장편으로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거든요.

“하하, 다행입니다. 혹시 예상 완료 시기는 언제입니까?”

-보통은 한 달에서 길면 두 달까지도 걸립니다.

15분짜리 단편영화라고 해도 꽤 걸리는구나.

허훈은 내 속마음에 답이라도 하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이게 저희가 편집하고 믹싱 맞추는 것도 시간을 잡아먹는데 중간중간 교수님께 제출해야 해서 조금 더 걸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편집 방향에도 관여합니까?”

-뭐, 진짜 이상한 건 말씀해주시죠. 그래도 꼭 고치라는 말은 안 하십니다.

다행이었다.

나는 허훈에게 내 미래를 건 것이다.

그의 교수님이 아닌.

“알겠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가 제작사를 차린 것이 실감 났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단편의 완성품이 나오기 전까지 대표로서 할 일은 없어 꾸준한 운동과 시나리오 작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 하나 더 시작한 것이 있다.

영어 공부.

전생에서도 영어는 곧잘 했으나 언어는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2회차의 치트키를 그대로 써먹으려면 노력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대표로서 한 업무가 있긴 했다.

바로 명함.

아무렴 사무실은 없어도 명함은 있어야지.

또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은 한보배에게 장편 제의 건으로 무던히도 연락했으나 항상 바쁘다는 답변이 전부였다.

일부러 나를 피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어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어?! 안녕하세요.”

아르바이트 중이던 한보배를 찾아간 것이다.

나경에게 물으니 곧잘 대답해 줬다.

학교 근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그녀의 미모가 소문이 나 학생들 사이에서 한차례 화제가 됐다고 한다.

한보배 정도면 소문나고도 남지.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앞치마를 맨 수수한 얼굴의 그녀가 큰소리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바람에 카페 내 이목이 집중됐다.

누가 보면 되게 잡는 선배인 줄 알겠네.

“아, 예. 잘 지내셨어요? 여기서 아르바이트하시나 봐요?”

한보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달 정도 됐어요. 이 근처 사세요?”

“아, 그건 아니고, 운서대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나저나 여기 계신 줄 알았으면 그동안 그렇게 약속 잡을 필요도 없었네요!”

그녀는 멋쩍은 듯 웃더니 내가 주문한 커피를 만들러 갔다.

곧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고, 받으며 말했다.

“꼭 의논할 게 있는데. 언제 끝나요?”

“의논이요?”

“예.”

“3시간 뒤에요. 그런데 제가 1시간 정도밖에 시간이······.”

<투명한 사랑>을 장편으로 만들려면 그녀를 꼭 캐스팅해야 했다.

스타가 되어 빛날 그녀를 내 손으로 정식데뷔 시킬 생각에 내 눈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1시간이면 충분해요. 그럼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3시간 뒤 다시 만난 그녀를 데리고, 근처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파스타 좋아해요?”

“없어서 못-. 아, 아니. 좋아하죠······.”

형편이 진짜 많이 어려운가.

우리는 자리에 앉아 파스타 하나씩을 주문해 호로록 다 먹을 때까지도 시시콜콜한 안부 정도를 물었다.

주연배우 제안을 하더라도 배고픈 사람보단 배부른 사람 쪽에게 제안하는 것이 더 낫다.

그녀가 매몰차게 거절하진 않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깐.

한보배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파스타 그릇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잘 먹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인다.

“그런데 아까 의논하실 게 있다고······.”

배도 부른 것 같으니, 망설임 없이 제안했다.

“예. 투명한 사랑 장편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네?!”

“보배 씨가 그대로 주연으로 출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났음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장편 주연이요?”

“예. 맞습니다.”

믿기지 않는 눈치다.

“물론 선배님께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저 지금까지 필모(필모그래피)가 단편밖에 없어요. 괜찮으시겠어요?”

“언제까지나 단편만 하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직 준비가······.”

“제 생각엔 준비되셨습니다. 단편 찍을 때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장편이라고 다를 것도 없어요.”

한동안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 깊은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기다려줬다.

잠시 후.

“당연히 저는 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머뭇거렸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실은 제가 아르바이트 일정이 좀 빡빡해서요. 장편이라고 하면 촬영이 못해도 2~3개월일 텐데. 그럼 저는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를 모두 그만둬야 해요.”

돌려서 말하긴 했으나 저 말의 속뜻은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는 영화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모두 포기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품에서 그저께 나온 따끈따끈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아라비안필름?”

“예. 대표 신바드입니다. 제가 직접 제작할 겁니다. 단편 후반 완료되면 영화제에도 출품할 거고, 투자도 받아낼 거예요. 투자받아내면 바로 준비 들어갈 거고요.”

한보배가 다시 생각에 빠졌다.

이번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자리가 보배 씨한테 온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이 영화에 확신이 있다는 말이죠. 지금 바로 답을 달라는 건 아닙니다. 신중히 생각한 다음 결정 내리시면 연락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