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7화 (7/140)

#7화. 긁지 않은 복권(5)

“컷! 오케이!”

이게 오케이라고?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은 요소들이 너무 많아 분명 다시 갈 줄 알았는데.

수정 전 12테이크를 갔던 장면은 단 한 번에 오케이가 나고 말았다.

“촬영 종료! 수고하셨습니다!”

한보배는 안겨있던 자세에서 엉거주춤 떨어졌다.

허훈은 조금 어색해진 우리에게 우다다 달려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뱉어냈다.

“와! 두 분 다 너무 좋았습니다! 선배님 눈물 닦아주는 손이랑 보배 씨 안기는 연결이 예술이었어요!!”

한보배는 괜히 수줍어했다.

“상대역을 너무 잘해주셔서요. 저도 모르게 몰입이······.”

“예예. 진짜 잘 나올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기분 좋은 칭찬을 늘어놓던 허훈은 나경과 상의할 것이 생각났는지 곧 멀어졌다.

“3일 동안 엄청나게 뛰어다니시던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보배 씨도 수고했어요.”

할 말은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쭈뼛거리며 앞에서 알짱거렸다.

“무슨 할 말 있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큰 결심을 했는지 눈을 질끈 감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인사를 했다.

“아까는 제멋대로 안겨서 저,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영화로 현장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음, 딱히 한 건 없는데.

그래도 그 한보배에게서 선배님 소리 들으니깐 기분이 좋긴 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을 마친 듯 후련해 보이던 그녀는 계속 소품으로 사용하던 즉석 복권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요!”

오, 드디어!

긁을 시간이다.

기쁘게 받으려는 그 순간.

왜인지 아까는 보이지 않던 그녀의 충혈된 흰자와.

메이크업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짙은 다크서클이 눈에 쏙 들어왔다.

도대체 아르바이트를 얼마나 하면 저런 피곤함에 찌든 얼굴이 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마 그녀가 내민 복권을 받지 못했다.

“보배 씨. 촬영도 무사히 끝났는데 그거 선물입니다. 한번 긁어보세요.”

“네?”

저 복권 외에도 네 장의 복권이 더 있었다.

그중 어느 것이 당첨될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는 해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녀 손에 들린 복권이 진짜 당첨되더라도 내가 얻는 이익은 있었다.

지금 돈이 궁한 그녀에게 500만 원이란 큰돈은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줄 것이고.

내게는 자연스럽게 고마움을 느끼겠지.

미래의 탑 배우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데, 드는 비용으로 500만 원이면 싼 거다.

한보배는 갸우뚱하면서도 내게 물었다.

“혹시 동전 있으세요?”

주머니에 고이 모셔놨던 동전을 내밀었다.

“여기요.”

어느새 주변에는 하나둘 스태프들이 모여들었다.

“오! 그 복권 드디어 긁는 거예요?!”

“당첨되면 오늘 뒤풀이 고기 먹는 겁니꽈!”

“되면 대박! 우리 영화도 대박!!”

어째 다들 기다리고 있던 눈치다.

한보배는 성원에 힘입어 모두의 앞에서 쓱싹쓱싹 복권을 긁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

뭔가를 본 한보배는 뒤로 나자빠졌다.

복권에는 숨어있던 똑같은 그림 두 개가 나란히 나왔고, 그 끝에는 5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복권이 당첨된 것이다.

*

“잘 먹겠습니다!!”

어느 고깃집에 둘러 앉아있던 <투명한 사랑>팀은 감독,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모두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우걱우걱 삼겹살을 먹고 있었다.

역시 돌도 씹어 먹을 나이다.

“근데 선배님. 이거 제가 정말 가져도 될까요?”

한보배는 무척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럼요. 제가 선물로 드린 거잖아요.”

그녀는 추욱 처져서는 눈물이라도 금방 떨어질 것 같았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요즘 좀 힘들었거든요.”

정말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다.

“그래도 오늘 회식은 제가 쏠 테니깐! 많이 드세요! 선배님!”

그때, 한보배의 말을 들었는지 학생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배우님. 그럼 혹시 항정살도······.”

“네네! 시키세요! 다들 맘껏 주문하세요!”

그 학생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이모가 오는 그 시간도 아까웠던지 주방으로 냅다 뛰어갔다.

“이야, 보배 씨! 그러다 하루 만에 당첨금 다 쓰는 거 아니에요?!”

예정우도 질세라 손을 번쩍 들고는 항정살을 주문한 뒤여서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1차만! 쏘는 겁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단호한 말투였다.

예정우는 그 단호함에 헙! 당황하더니 대답도 안 하고, 고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와 그런데 어떻게 소품으로 산 복권이 당첨되냐. 진짜 신기해요!”

말을 마친 나경은 커다란 쌈을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러게요. 정말 신기하긴 해요. 선배님 운이 좋으셨던 거죠······.”

한보배는 아직도 뭔가가 걸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사 온 복권을 자신이 날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형편이 어렵지 않았다면 절대 받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보배 씨한테 선물한 거니깐 운은 보배 씨가 좋은 거죠.”

그녀는 내 말에 고마움이 잔뜩 묻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소주를 혼자 3병째 먹고 있던 허훈은 아주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확실히 선배님 덕을 크게 보긴 했죠. 보배 씨부터 시작해서 선배님 아니었으면 이 영화 힘들었을 겁니다.”

주당이라는 건 전생부터 알고 있었으나 주량이 어지간한 성인 남자를 웃도는 수준이다.

“하하, 그런가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게 뻔해서 대충 넘어가려 했으나 실패했다.

허훈의 목소리는 어느새 진중해져 있었다.

“장난이 아니고 진짜예요. 저는 제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 찍으면서 느꼈습니다. 아직 멀었구나.”

뭘 또 그렇게까지.

허훈은 말을 끊지 않았다.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선배님 도움을 받지 않은 구간이 없네요. 특히나 아까 마지막 아이디어는 진짜 생각도 못 했습니다.”

괜히 나 때문에, 자존감이라도 내려가면 안 되니 그를 다독였다.

“아닙니다. 저 없이도 촬영 무사히 잘 끝났을 거예요.”

그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뭔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던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이라고 해서 현장에 대해 다 아시는 건 아니거든요. 혹시 꾸준히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인연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당연히 땡큐였다.

“그럼요.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하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고깃집 화장실은 외부에 있어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두웠지만, 어느새 여름이 오려는지 공기는 따스했다.

이번 허훈의 졸업작품에 참여하면서 느낀 게 참 많았다.

허훈은 정말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노력했고, 그 결과 우리는 3일간 하루 9시간을 넘기지 않는 무난한 촬영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런 학생들의 열정은 나까지 동화시킴과 동시에 어떠한 강력한 느낌을 들게 했다.

이 영화, 장편으로 만들면 대박 날 것 같다는 느낌.

제작사 대표로 일했던 5년의 촉이 발동한 것이다.

단편을 장편으로 제작하는 사례는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 비상한 감독들은 우선 단편영화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녹여 내, 세상에 보여준 뒤 장편 제작 제의와 투자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 <투명한 사랑>이야말로 그 루트의 적합한 작품이었다.

투명 인간과의 사랑이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허훈의 말 할 것도 없는 연출력, 미래의 몸값이 수십 배는 오르는 한보배까지.

무엇보다 허훈이 전생보다 이른 시기에 성공적으로 입봉하게 된다면 <처절한 인생>의 성공 시기가 앞당겨 짐은 물론이고, 퀄리티는 더욱더 높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할 찰나.

아 맞다!

아직 긁지 않은 복권 네 장이 생각났다.

마침 고깃집 앞에 벤치가 있길래 앉아서 가지고 있던 즉석 복권을 모조리 꺼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동전을 들고선 쓱싹쓱싹 복권을 긁기 시작했다.

첫 번째.

꽝이다.

두 번째.

역시 꽝이다.

세 번째.

꽝······.

역시 될 리가 없나.

그래도 아직 한 장이 남았으니 열심히 긁었다.

그런데······.

발가벗겨진 마지막 즉석 복권을 보고는 한참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박이다!

내 손에 쥐어진 즉석 복권에서 나란히 그려진 똑같은 그림을 또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끝엔 예상치 못한 금액이 적혀 있었는데.

2,000만 원.

뜻밖의 큰 행운이었다.

*

“아니 바드야. 너 무슨 쾌변이라도 하고 온 거야? 갑자기 얼굴 혈색이 도는 것 같아!”

예정우의 놀림 섞인 장난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000만 원이라니!

진짜 당첨이 되다니!!

한보배에게 건넨 복권보다 무려 4배가 뛴 당첨금을 손에 쥐었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한보배는 내 사람으로 만들고, 이익은 이익대로 챙기고.

아마도 지금 거울을 보고 있다면 내 입은 귀에 걸려있을 것이다.

예정우의 시선에선 당연히 가관이겠지.

“어? 그런데 보배 씨는 어디 갔습니까?”

나경이 잽싸게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뒤풀이 1시간밖에 참여 못 한다고 했어요. 돈은 계좌로 쏴주신다고 하고 가셨습니다. 선배님한테 인사 못 하고 가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달래요.”

아무렴 몇억에 당첨된 것도 아닌데 하던 아르바이트를 당장에 그만둘 순 없겠지.

그나저나 아까부터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의 결론이 났다.

한보배가 있는 자리에서 하면 더 좋겠지만.

그녀는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니까.

“저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허훈은 소주를 넘기려다 말고, 내 말을 경청했다.

“제안이요?”

결정한 김에 냅다 질러버려야겠다.

“투명한 사랑. 이대로는 아무래도 아쉬워서요. 장편으로 만듭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