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6화 (6/140)

#6화. 긁지 않은 복권(4)

졸업작품이라 그런지 현장의 분위기는 상업영화와 사뭇 달랐다.

‘영화’

이 하나만을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남다른 열정이 돋보였다.

‘돈’을 위해 모인 상업영화의 스태프들과는 순수한 목적 자체가 달랐다.

능구렁이 같던 스태프들도 모두 이런 시절이 있었겠지.

그러나 경력은 사람을 찌들게 한다.

나조차도 회귀 전 이런 열정은 잊은 지 오래였다.

“레디! 액션!!”

허훈은 한보배의 연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촬영 내내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거장인 그도 아직은 학생일 뿐.

현장에서 내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은 수도 없이 많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만취한 아저씨가 카메라 코앞에서 알짱거린다든지.

“컷! 아저씨. 저희 영화 촬영 중-.”

“여엉화?! 이 좌식들이! 영화고 나발이고! 길을 막고 뭐 하는거야아!!”

“어어, 그게 아니고······.”

그런데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나 이런 일을 처음 해본 나이 어린 사람에겐.

얼른 뛰어가 허훈을 막아섰다.

“아이구. 아버님. 약주 많이 하셨구나. 집이 어디세요?”

“딸꾹! 네가 우리 집을 알아서 뭐 하게!”

“당연히 아버님 많이 취하신 것 같아서 걱정돼서 그렇죠! 자자. 이거 드시고, 조금 정신 차려 보세요!”

“이게 뭐여. 딸꾹! 숙취해소제에?!”

전생부터 하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서 나이트 촬영 때 숙취해소제 하나씩은 꼭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이렇게 뭐라도 쥐여주면 상황이 조금은 나아진다.

아무튼 이 외에도.

“감독님. 이 부분 포커스 나간 것 같은데요? 다시 따시죠.”

“어! 그렇네요? 어휴, 그냥 넘어갈 뻔했네.”

이렇듯 한 번씩 나간 카메라 포커스를 잡아주거나.

월월!!

“컷! 강아지 어디야?! 찾았어?”

“아니요! 어딨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시녹음에 방해꾼이라도 생기면 쏜살같이 달려가.

“찾았습니다! 소시지로 입막음하고 왔어요!”

문제를 잡아주었다.

또 갑자기 필요한 소품이나 비품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미리 챙겨 놨고.

나경을 도와 가진 예산으로 스태프들에게 최대한의 식단을 제공하였으며.

각종 민원이 커지지 않도록 해결하며 쏘다녔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며 정확히 3회차 촬영이 시작되는 날.

허훈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어요?!”

“선배님! 이 장면에선 어떤 식으로 카메라를 세팅하는 게 좋을까요?”

“선배님! 배우가 이쪽에 서 있는 게 좋겠죠?”

이건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좋은 징조였으므로 약간은 많은 질문의 양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처음엔 내 영향으로 작품의 방향이라도 달라지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는데 알아서 받아들이는 것 같아 별다른 문제는 없을 듯했다.

어쨌든 오늘은 대망의 마지막 날.

무사히만 넘기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문제는 마지막 신에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어느 공원에서의 야외촬영이었고.

촬영을 준비하던 허훈은 무슨 일인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성희(한보배)와 중간중간 등장하던 성희 친구 은옥 역의 배우가 카메라 앞에 자리했다.

음, 허훈의 표정이 왜 저런 건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매번 느꼈지만, 저 은옥의 연기는 조금 아쉬웠다.

항상 연기 천재 한보배와 맞붙는 신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경향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비중이 크지 않아 그러려니 넘어갔는데 오늘은 분량이 은근 많다.

<투명한 사랑>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성희(한보배)가 보는 투명 인간은 거짓이며 성희는 사실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그러다 곧 촬영이 시작될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 은옥까지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투명 인간은 사실 실제였다고 밝히면서 끝이 난다.

이 장면은 나름의 반전 요소였으며 허훈 감독의 원래 스타일과도 결이 비슷했다.

그는 전생에서도 영화 내내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스토리를 좋아하곤 했으니까.

그렇다 보니 이 장면은 당연히 허훈에게 성희(한보배)와 투명 인간의 첫 만남인 골목길 장면과 더불어 중요할 것이다.

보통은 시간 순서대로 찍지 않는 영화 현장에서 이 장면을 제일 마지막에 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은옥이라는 친구가 걱정이다.

“자,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걱정 속에서 촬영은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어쩐지 허훈의 신호마저 힘아리가 없는 기분이었는데.

시작된 은옥의 연기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예상을 더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맨 처음 강의실에서의 한보배 연기는 굉장히 준수한 편이었다.

“컷! 컷!”

허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촬영을 중단시키고, 은옥에게 가까이 가서는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은옥이 계속 아리송한 표정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휴우.”

긴 한숨이 이어졌고, 끝나지 않은 마지막 신은 다시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그렇게 계속된 촬영은 무려 12테이크.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허훈에게 제안했다.

“감독님. 잠깐만 쉬시죠.”

“휴우. 알겠습니다. 선배님.”

주변 스태프들에게 알리고, 아직도 표정이 좋지 않은 허훈에게 말을 걸었다.

“감독님. 마음에 많이 안 드십니까?”

“최상으로 뽑아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합의점을 잘 찾는 것도 감독이 잘해야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현장에서 뭐든 자신 맘에 쏙 들게 찍을 순 없거든요.”

조금은 냉정한 내 말에 허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알죠. 사실은 이 장면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그런가 봅니다.”

“예?”

“원래는 은옥이 등장하지 않고, 둘만의 교감을 표현하면서 투명 인간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자연스럽게 표현할 연출법이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은옥을 등장시킨 건데······.”

이런 사연이 또 있었구만.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전생에서 허훈의 연출법이 어땠더라.

또 전생의 허훈이라면 어떤 전개를 원했을까.

그때.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다.

근데 투명 인간이 꼭 끝날 때까지 투명 인간이어야만 하는 건가?

“저기. 감독님. 혹시 투명 인간의 배경이 뭡니까? 뭐, 초능력자나 약물 투입이라던가 그런 배경이요.”

러닝타임이 짧은 단편영화에선 장편보다 사건들을 더 생략, 압축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 내내 투명 인간이 왜 투명 인간이 되었는지 등의 친절한 설명 따위는 없었고.

나는 허훈이 생각해놓은 배경이 궁금했다.

“저는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사실 그건 관객이 생각하기 나름이죠?”

누가 영화감독 아니랄까 봐.

두루뭉술한 저 대답 좀 봐라.

“그럼 꼭 마지막까지 투명 인간이어야 합니까? 어차피 저희가 CG를 할 수 있는 여력도 안 되고, 그냥 실체를 출연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예?”

당황해하는 그에게 속사포를 날렸다.

“그냥 출연시키자고요. 대신 얼굴 말고, 뒷모습만요. 둘만의 교감을 나타내고 싶다면서요. 그렇게도 사랑하던 투명 인간의 실체를 본 성희의 표정이야말로 그 교감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어, 그거 굉장히!”

허훈의 표정은 순식간에 달라지더니 들고 있던 시나리오에 머릿속 무언가를 막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정도 무아지경의 시간이 지나고.

“나경아! 이거! 이걸로 가자!”

“뭐? 지금 시나리오 바꾼다고? 무슨 쪽 대본이냐!”

“아니야! 무조건! 무조건 이렇게 가야 돼!”

나경은 성질을 굽히지 않으며 그의 손에 있던 시나리오를 뺏어갔다.

“줘봐! 이상하면 절대 안 바꿔!”

그러나 곧 그녀의 불만족스러웠던 얼굴은 수정된 분량을 읽으며 점점 만족으로 바뀌었다.

“하아. 이게 확실히 더 좋긴 한데. 이렇게 가려면 문제가 있잖아.”

허훈이 다급하게 물었다.

“문제? 그게 뭔데?”

“이 모지리가! 준비된 남자 배우가 없잖아!”

천하의 허훈이 모지리 소리를 듣다니.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런데 어째 주변 분위기가 스산하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허훈은 한술 더 떠 내 뒤에 서더니 등판의 사이즈를 재고 있었다.

“선배님. 저는 이런 뒷모습이면 충분합니다.”

내가 하는 거였냐.

그렇게 촬영장은 다시 활기를 띠었고.

바뀐 시나리오에 맞게 카메라와 조명 세팅을 바꾸느라 모두가 분주했다.

혹시 한보배가 불만이라도 토로할까 걱정했는데 그녀는 군말 없이 수정된 부분을 숙지하면서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줬다.

은옥 역의 배우는 울상으로 집에 돌아갔다.

그 배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영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그저 카메라를 등지고, 연기하는 한보배를 직관만 하면 되니 딱히 준비할 건 없었다.

가지고 왔던 의상 중 제일 괜찮은 재킷 하나를 걸쳤을 뿐.

“이야. 우리 바드. 이제 연기까지 진출했네?!”

예정우가 옆에 와선 놀려댔다.

“형이 할래요?”

“아니. 그럼 나는 준비할 게 많아서 이만.”

어느덧 마지막 장면의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나와 한보배는 카메라 앞에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등지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마주 본 한보배는 정말 아름다웠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남들은 아직 모르지만 나에게 그녀는 이미 스타였다.

이것 또한 두 번째 삶의 혜택인가.

앞에 선 그녀가 대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하세요. 혹시 불편하시면 다른 곳 보고 있을까요?”

나름 배려한다고 한 이야긴데 한보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같이 연기해주세요. 저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봐주세요.”

응?

단호한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저 표정을 보니 안 할 수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던 나는 잠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사실 전생에선 일에 치여 결혼도 하지 못했었다.

그 감정을 느껴본 지도 꽤 오래됐는데······.

그렇다고 못 할 이유는 없었다.

한보배의 연기를 최상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자! 레디!”

허훈의 신호에 따라 한보배를 바라봤다.

“액션!!”

그녀는 역시 베테랑이었다.

성희 입장에서 지금은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그 표정은 너무도 애절했다.

나조차도 감화될 정도로.

주체할 수 없어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한보배.

그 순간.

내 손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고 있다면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드는 감정이다.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온 것인데.

사전에 이야기되지 않은 것이라 하고 나서 후회됐다.

그냥 가만히 서 있을걸.

이젠 그녀의 뺨을 닦아주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기도 애매해졌다.

그때.

내 난감함을 눈치챘는지.

파악-!

한보배는 돌발행동을 감행했다.

눈부신 웃음을 지으며 내게 포옥 안겨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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