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긁지 않은 복권(3)
어제에 이어 오늘도 찾은 운서대학교.
이틀 연속 출퇴근하니 내가 영화과 학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예정우도 어제의 배우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궁금해했으나 내일 필요한 비품들을 챙겨야 해서 오지 못했다.
원래는 나도 같이 가서 도와야 했지만.
허훈이 사건의 주도자인 내가 꼭 와야 한다며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어제와 같은 강의실로 향하니 허훈과 나경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촬영이 내일부터 시작이라 다른 스태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선배님! 오셨어요!”
“예. 잠은 좀 잤어요?”
이 말을 건넨 이유는 허훈의 몰골이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 시놉시스부터 막혀 2시간밖에 못 잔 나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고, 씻지도 못한 듯했다.
“아, 네. 조금 잤죠. 뭐. 하하.”
긁적거리던 허훈 옆에 있던 나경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글쎄요. 선배님. 어제 잠수 탄 혜원이 있죠?”
“예. 그 사람이 왜요?”
“저희랑 경쟁하는 다른 감독한테 간 거 있죠. 그래서 저희한테 말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그랬던 거였어요!”
대학은 작은 사회라 했던가.
벌써 기싸움이 살벌하네.
그렇다고 경쟁작품 주연배우를 말도 없이 빼가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지.
이참에 그 감독 놈 이름이라도 알아놔야겠다.
“아 그래요? 혹시 그 감독 친구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요? 아마 말해도 모르실 텐데.”
“그 친구도 언젠가 이쪽으로 나올 거 아닙니까. 영화판이 진짜 소문으로 움직이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나경은 더욱 흥분했다.
“아!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이주호라는 놈이거든요. 평소에도 얼마나 얄미운지 말도 못 해요!”
이주호?
아는 이름이다.
“선배님! 그 자식! 나중에 마주치더라도 절대 이쁘게 봐주지 마세요! 언젠가 뒤통수칠 놈이라니까요!”
대충 이 말은 현실이 된다.
인성은 재능에 반비례하는 건지.
연출력은 또 어마어마해서 입봉하자마자 상승가도를 달리는 인물이지만.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이용해 풀었던 쓰레기 짓들이 낱낱이 밝혀져 영화계에서 영구 퇴출당한다.
혜원이라는 학생은 운도 없지.
한순간의 선택이 이렇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제2의 인생에서도 정신줄을 놓을 수 없었다.
무수히 놓인 재선택의 갈림길에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바짝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하하, 알겠어요.”
그나저나 내막을 들으니 허훈의 몰골이 저런 꼴인 것도 이해가 간다.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감독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봤을 땐 전화위복입니다. 한보배 씨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할 거예요.”
그는 내 위로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선배님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혼자였다면 아마도-.”
그때.
쾅!
닫혀있던 강의실 문이 벌컥 열렸고.
문 뒤에 있었는지 한보배가 쿠당탕 넘어졌다.
“아야야. 그게······. 엿들으려던 건 진짜 아니에요.”
엉덩이 옆을 문지르며 일어나는 그녀는 아마도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어깨빵이라도 당한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가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상관없었다.
어서 한보배의 부스터 된 연기를 보고 싶었을 뿐.
“일찍 오셨네요?”
“예. 준비할 게 조금-.”
그녀는 내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답하다가 나와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생각났는지 말을 끊고, 허훈을 보며 이었다.
“있어서요.”
그 기류를 파악한 허훈이 재빠르게 답했다.
“예! 보배 씨! 천천히 준비하셔도 됩니다!”
“그럼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렇게 그녀는 후다닥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보배 씨 밤샌 거 같죠?”
“그러네요.”
당연히 어제의 그 모욕적인 말을 듣고, 쿨쿨 잠만 자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녀를 각성시키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다.
나경은 한보배가 안쓰러운지 말을 덧붙였다.
“소문에 아르바이트도 대여섯 개는 한다더라고요.”
“예?”
이런 스토리는 못 들어봤는데.
“각자의 사정이 있겠죠. 뭐.”
흐음. 전생에서야 항상 탑이었던 그녀만 봐와서 몰랐는데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그나저나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네.
한보배를 걱정하는 나경의 얼굴도 피폐했다.
지금 모여있는 우리 꼴을 누군가 본다면 좀비라도 나타난 줄 알 것이다.
역시 영화는 학교도 만만치 않구나.
잠시 후 강의실 문이 열렸다.
그런데 한보배는 어딘가 이상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곤 선글라스와 심지어 마스크까지 끼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아해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강의실 앞으로 걸어왔다.
“시작하겠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시작하겠다는 걸 보니 단단히 이를 갈았나 보다.
어제와 같이 강의실 한구석에 쭈그려 앉은 그녀는 얼굴을 답답하게 가리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벗어냈다.
그런데.
“응? 분장을 했어?”
그녀의 얼굴엔 약간 어설픈 멍들이 군데군데 칠해져 있었다.
극 중 성희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혼자 시퍼런 색조 화장품을 찍어 발랐을 걸 생각하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전생에선 아주 잘 나가던 배우였는데 어지간히 이 역할이 하고 싶었나 보다.
생각도 잠시.
어제와는 사뭇 다른 한보배의 몸짓에 금방 집중할 수 있었다.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이 서서히 들리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오른쪽 뺨을 적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밝았던 강의실은 어느새 가로등 하나 비추는 주택가 골목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서글픈 얼굴로 하늘에 뜬 별이라도 보려는지 고개는 점점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감은 눈 아래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를 느꼈는지 표정이 슬몃 변한다.
세상을 모두 포기한 듯했던 그녀의 얼굴이 잠시 따스해지는 순간이었다.
한보배는 눈을 감은 채로 마치 허공에 자신의 볼을 맡긴 듯 유려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언뜻 보면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투명 인간의 손길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제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확실히 끌어낸 것이다.
사실 어제 한보배의 연기는 나조차도 긴가민가했었다.
하루 만에 이걸 해낸 저 한보배가 대단한 거지.
단언컨대 별일이 없다면 이번 생에서도 한보배는 우리나라 정상으로 오를 것이다.
“이상입니다.”
연기가 끝난 한보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바라봤다.
아니, 나를 콕 집어 노려보고 있었다.
허훈은 감격했는지 그녀의 눈길이 어디로 향하든 말든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와. 보배 씨. 왜 어제는-.”
옆에 있던 나경이 재빠르게 그의 입을 턱 막았다.
분명 왜 이런 연기를 이제 보여주냔 말일 것이다.
잘 막았다.
어제와는 상황이 다르다.
한껏 기운을 올려놓은 그녀인데 굳이 끌어내릴 필요는 없었다.
이제 그녀를 조금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잘 못 생각했나 보네요. 어제 무례했던 건 사과드립니다.”
그녀는 내가 너무 깔끔하게 인정해버리자.
“아, 아니에요.”
오히려 당황하는 눈치였다.
“저도 잘한 거 없는데요. 그리고 하셨던 말이 어느 정도 맞기도 했고요. 저는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지금부터라도 알았으니 서로 윈윈인 거죠. 자, 허 감독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도 여운에 잠겨 있던 허훈은 내 물음에 부랴부랴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아! 그야 당연히!”
그의 눈빛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보배 씨! 내일부터 힘들 거예요. 같이 잘해봅시다!”
방금까지도 긴장이 덕지덕지 붙어 울상이던 한보배도 방긋 웃었다.
“네!”
맞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웃는 게 참 예쁜 배우였다.
*
한보배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예정우에게 비품은 형이 준비했으니 소품은 내가 준비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인터뷰에선 분명 스태프가 사 온 복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 그 스태프 중 한 명이라 조건은 충족될 것이다.
이 점 때문에, 내가 <투명한 사랑>에 참여한 거기도 하고.
고시원으로 가는 길에 1,000원짜리 즉석 복권 하나를 구매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네 장을 더 구매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중 하나는 전생과 같이 당첨되겠지.
몇 가지 더 필요한 소품들을 구매한 뒤 집으로 와선 어제와 마찬가지로 운동을 하고, 개운하게 씻었다.
다음 루틴.
별다른 거 없던 <신바드의 모험>을 확인하고.
어제 다 끝마치지 못한 시나리오 시놉시스를 위해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이미 눈은 반쯤 감기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내일부턴 촬영이니 시간이 없다.
전생에서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건 뼈저리게 느껴왔다.
그 경험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또 조급할 건 없었다.
내가 쭉쭉 올라갈 시간은 충분했으니깐.
지잉-.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내일 콜 타임 16시 30분입니다.]
나이트(밤 촬영)는 오히려 전날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자는 게 낫다.
어중간하게 자면 더 피곤하다.
들어오면서 사 온 커피에 꽂힌 빨대에 입을 대곤 카페인을 쭉쭉 빨아들였다.
3평 남짓한 그 공간은 어느덧 키보드가 타닥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