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4화 (4/140)

#4화. 긁지 않은 복권(2)

허훈의 데뷔 10주년 기념 인터뷰.

한 잡지사의 주체로 진행된 그 인터뷰는 정말로 우연히 보게 됐다.

가장 아쉬웠던 작품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졸업작품으로 연출했던 <투명한 사랑>의 주연배우가 촬영 이틀 전 돌연 잠수를 탔고, 부랴부랴 다른 배우를 섭외해 촬영했으나 결과물은 당연히 안 좋았다.

그 자체로도 너무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이로 인해 <처절한 인생>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더 오래 걸린 거라고 아쉬워했다.

물론 자신의 역량 부족에 대한 후회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 불운만 있던 건 아니었다.

설정상 필요했던 소품인 즉석 복권을 스태프가 사 왔는데 촬영 다 끝나고 긁어보니 500만 원에 당첨된 것이다.

덕분에 회식비가 굳었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남긴 게 기억에 남았다.

잠시 빠져 있던 감상에서 나오자 허훈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3일간 구체적인 스케줄부터 말씀드릴게요. 우선 이틀은 나이트(밤 촬영), 하루는 데이(낮 촬영)-.”

그때.

지이잉-. 지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나경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그녀는 잠시 뭔가를 듣더니.

“뭐?! 왜?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목소리 톤이 2옥타브는 올라갔다.

이게 그 사건의 시작인가?

모두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고, 전화를 끊은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혜원이. 연락이 안 된대.”

아마도 잠적했다는 그 배우의 이름이 혜원인 모양인데.

옆에 있던 예정우에게 물었다.

“아는 친구예요?”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그 혜원이가 맞다면, 응. 나 휴학하기 직전에 입학한 친군데. 연기 진짜 잘했어. 얼굴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전생에서 유명했던 배우 중 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예명을 많이 쓰기도 하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허훈은 나경의 말이 믿고 싶지 않은지 그녀에게 계속 되묻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아침부터 연락 안 된다고 했잖아. 혜원이 룸메한테 물어보니깐 어제 기숙사 안 들어갔다고, 가보고 알려준댔는데 옷가지랑 캐리어가 없어졌대.”

“뭐? 혜원이가 왜?”

“그건 나도 모르지! 아 미치겠네. 진짜.”

이미 벌어진 일에 생산성 없는 대화였다.

“혹시 후보 배우는 없습니까?”

허훈은 내 물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저희 영화는 배우 연기력이 관건이라 혜원이 말고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다른 배우들 프로필은요?”

“여기요.”

나경이란 친구 준비성이 완벽하다.

그녀가 내민 프로필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한보배.

그녀는 전생에서 신들린 연기로 유명했던 배우다.

멜로, 액션, 스릴러 등 모든 장르 연기가 가능한 몇 안 되는 배우였고, 심지어는 노래와 춤과 잘 춰서 뮤지컬 분야까지 아울렀다.

“이 친구는 어떻습니까?”

“아, 그 친구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닌데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는 말이 있어서요. 제가 원하는 연기를 끌어내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패스했습니다.”

아닌데.

한보배가 내성적이라는 건 그녀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제작사를 차리기 전 PD를 꽤 오래 해왔다.

딱 한 번 그녀와 같이 작품을 한 적 있었는데 그녀를 다루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원하는 거 있으면 제가 끌어낼 테니깐 우선 이분 미팅부터 하시죠.”

오랜만에 진짜 ‘영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별다른 수가 없는 허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러죠. 나경아. 이분 연락 좀 해봐.”

“알겠어. 어디서 언제 보자고 할까?”

그녀는 허훈에게 물었지만, 답은 내가 했다.

“지금 당장이요. 남는 강의실 있지 않아요?”

예정우는 돌아가는 판이 재밌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롸잇! 나우!”

*

우리는 근처 비어있는 강의실로 향했고, 한보배는 곧 도착했다.

긴 생머리에 수수한 얼굴.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었지만.

적당하게 짙은 쌍꺼풀과 풍성한 속눈썹은 그녀의 눈매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고 있었다.

나이가 깡패라더니 풋풋함과 싱그러움 덕분에 전생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고.

뛰어왔는지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저, 저 왔습니다.”

나경은 숨을 크게 몰아쉬는 그녀를 안으로 불렀다.

“아, 갑자기 불러서 미안합니다. 보배 씨.”

그들의 태도를 보니 한보배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다.

뭐, 졸업작품 배우는 외부에서 데려오기도 하니깐.

그나저나 아무리 한보배가 미래의 탑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우선 허훈의 맘에 들어야 했다.

허훈은 그녀에게 양해의 말을 건넸다.

“보배 씨, 저희 주연배우랑 갑자기 스케줄이 어긋나서 자리가 비었거든요.”

“네.”

“모레부터 3일간 일정은 괜찮습니까?”

“네.”

“급한 상황이긴 한데 간단한 오디션을 보긴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것도 괜찮겠어요?”

“네.”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된 오디션.

근데 잠깐.

이 졸업작품 내용이 뭐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허훈이 한보배에게 설명했다.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자면 투명한 사랑은 투명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투명 인간과의 사랑?

어쩐지, 배우의 연기력을 그렇게도 강조하더라니.

“그중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여긴데. 한번 해보시겠어요?”

허훈은 그녀에게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건넸다.

그 장면이 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앞에서 오가는 시나리오를 힐끔힐끔 보자 옆에 있던 나경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냉큼 손에 쥐여 줬다.

뭐지, 이 탐나는 인재는.

아무튼 허훈이 한보배에게 주문한 장면은 주인공 성희와 투명 인간의 첫 만남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유심히 봤던 골목길 장면이다.

[4. 골목길(밤-실외)

즉석 복권과 동전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골목길 한쪽에 쭈그려 있던 성희는 온 얼굴이 멍투성이다.

자신의 처지에 서러움이 밀려와 작게 흐느꼈으나 골목길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순간 볼에 스치는 차가운 손길을 느낀다. 성희는 그 손길에 놀라기는커녕 얼굴을 맡긴다.]

와, 허훈.

사람 좋게 봤는데 감독으로썬 악독하구만.

날고 기는 웬만한 연기자들도 상대방이 없는 연기는 하기 힘들다.

그런데 투명 인간 손길에 얼굴을 맡기라니.

순간 아직은 연기 경험이 부족한 한보배에겐 진짜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한보배가 아니지.

그녀는 시나리오를 잠시 찬찬히 읽더니.

강의실 한구석으로 가 주저앉고는 무릎을 안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시나리오를 즉석 복권과 동전이라 생각하고 꼭 쥔 채 연기가 시작되었다.

대사 한 줄 없는 그 장면에 한보배는 열과 성을 다해 연기했다.

그러나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고, 몸과 얼굴이 따로 놀아 뚱땅거리는 느낌이었다.

이건 내가 봐도 부족하다.

허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족스럽지 않다는 그 표정.

이대로는 안 되겠다.

목을 살짝 가다듬고, 최대한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만.”

한참 연기 중이던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보배 씨. 저는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 하겠습니다. 배우에게 재능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계시죠?”

한보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고 계시면서 한보배 씨는 왜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고 계신 겁니까?”

“예?!”

내 말을 들은 허훈도, 나경도, 예정우도 모두 같은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는 바람에 강의실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당장 한보배가 박차고 나가더라도 할 말 없는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내게 반박했다.

“제게 재능이 없다는 말입니까?”

“예. 지금 보기엔 그런데요?”

“현직에 계시다고요? 연기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근데 뭘 안다고, 재능을 운운하시는 겁니까?”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자극해야 내 방법이 통한다.

“할 만해서 하는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어이가 없어 보였다.

“하!”

한보배는 자존심이 아주 강했다.

자존심 못지않게 승부욕도 강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허훈이 나섰다.

“아하하,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보배 씨 연기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까 추천도 선배님이 하셔놓고선!”

듣고 있던 한보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그렇긴 한데 실망스럽네요. 기대를 좀 했거든요.”

내 말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녀가 전생에서 한 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순수한 기대를 하면 열정이 생기고.

자신이 잘못해 기대를 저버리면 그 열정이 불타오르는 성격이라고.

한보배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내가 아닌 허훈을 향해 이야기했다.

어쨌거나 기분은 나빴는지 나와는 절대 소통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몸짓이었다.

“감독님. 내일까지 무조건 원하는 연기 만들어 올 테니까 다시 봐주세요. 어차피 지금 저 말고 다른 사람도 없잖아요. 다 알고 왔어요.”

그녀의 말투가 당돌하게 변했다.

내 계획이 먹힌 것이다.

허훈도 예상했던 성향과 전혀 다른지 당황하며 대답했다.

“네? 어, 어 그러죠. 뭐.”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그녀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강의실 문을 부술 듯 쾅 닫고 나가버렸고.

허훈은 내게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배님. 아무래도 이번엔 좀 실수하신 것 같은데요.”

“감독님은 방금 보배 씨 연기가 만족스러웠습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역시 아쉬웠어요.”

“보배 씨 같은 성격은 몰아붙일수록 더 불타오릅니다.”

“예? 보배 씨 성격을 어떻게?”

“대충 행동 보면 알죠. 아까 원하는 거 제가 끌어내 드린다고 했죠?”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분명 보배 씨 내일 딴 사람 돼서 올 겁니다. 나쁜 역은 제가 할 테니까 촬영 준비만 잘하세요. 어중간하게 했다간 나중에 후회합니다.”

*

집으로 돌아와 씻기 전 간단한 맨몸운동을 시작했다.

체력.

딱히 전생에서 아픈 곳이 있던 건 아니지만.

항상 한계에 부딪혀 왔다.

제2의 인생이 주어졌는데 당연히 1순위로 관리하는 게 맞다.

운동을 마치고, 개운하게 씻은 다음엔 <신바드의 모험> 시나리오를 꺼내 확인했다.

오늘 한보배와의 사건이 정리돼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사항이 없다.

며칠 전부터 매일 단어가 생겼는지 확인했더니 어느새 하루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시나리오 북은 한쪽에 두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전생에 하지 못한 또 한 가지.

나만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옮겨보는 것.

아까 내가 한보배에게 했던 말은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전생에서 내가 듣고, 가장 좌절했던 말이었다.

나는 좌절해서 포기했지만.

그녀는 다를 것이다.

악이 받힌 한보배의 연기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다.

그러니 내일이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트북 화면의 흰 바탕엔 검은색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래. 처음이 어렵지.

해보자.

용기를 내서 타자 위에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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