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3화 (3/140)

#3화. 긁지 않은 복권(1)

전생에서 알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언젠가 과거 사진을 본 적이 있어 확신할 수 있었다.

후덕한 인상. 빨간 뿔테 안경. 특유의 총명한 눈빛까지.

그는 분명 허훈 감독이었다.

허훈은 전생에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처절한 인생>을 연출한 사람으로.

35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입봉했는데, 그 힘들다던 예술과 재미를 동시에 잡아 극찬을 받았었다.

세계 3대 영화제 트로피를 싹쓸이하는 쾌거를 보여줌은 물론이고, 천재의 비애 같은 사연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 사연은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그가 직접 밝혔는데.

<처절한 인생>은 무려 28세.

즉, 세상에 나오기 7년 전 완고를 털었지만, 찾아간 모든 국내 제작사는 자신이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제작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아까운 시나리오를 그리도 오랜 시간 묵혔으니 당시 영화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꽤 컸었다.

아무튼 허훈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에겐 그 인터뷰보단 데뷔 10주년 기념 인터뷰가 더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 중 가장 아쉬웠던 작품이 졸업작품이었다는 말과 그 졸업작품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였다.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자본을 더 빠르게 끌어모을 수도 있겠다.

흐음.

그런데 이 계획을 실행하려면 내가 그 졸업작품에 참여해야 한다.

회귀했을 때 허훈이 40대 초반이었던 걸 감안하면 지금은 20대 중반일 것이다.

얼추 그 시기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잠깐만.

졸업작품?

왜 자꾸 머릿속에 이 단어가 맴돌지?

아.

며칠 전 요상한 시나리오 북에서 봤던 단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 시나리오 북에서 봤던 또 다른 단어도 떠올랐다.

‘운서’

허훈이 졸업한 대학교가 운서대학교다.

하지만 이런 알짜배기 미래 정보를 알고 있더라도 허훈에게 생판 모르는 얼굴을 갑자기 들이밀 순 없었다.

나중에 당신은 거장이 됩니다.

라는 말을 전할 수도 없거니와 그의 졸업작품에 참여하려면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

마트 한복판에서 아는 척하는 것은 너무 뜬금없는 일이다.

오늘은 후퇴하고, 학교로 직접 찾아가야 하나 고민도 해봤으나 이런 우연 같은 만남을 그냥 보내버리기에도 아까운 기회였다.

어떻게 하지.

찰나의 고민을 하던 중.

카트와 씨름을 하던 예정우가 도착했다.

“허억. 허억. 이 형님이 카트 가지고 왔다!”

아이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에게 리액션을 해줬다.

그를 잘 다루는 비법이었다.

“예. 형님. 잘하셨어요.”

예정우는 내 칭찬에 뿌듯했는지 함박웃음을 짓더니 그제야 내가 어딘가를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물었다.

“근데 어디를 그렇게 보냐?”

내 눈길을 따라 허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어! 훈아!”

갑자기 그를 불러댔다.

응? 예정우가 허훈을 알아?

허훈은 자신의 이름이 근처에서 불리자 두리번거리다 예정우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선배! 와! 진짜 오랜만이네요!”

선배라.

그렇다는 건 예정우와 허훈이 같은 학교 선후배라는 뜻.

그런데 예정우가 운서대학교 출신이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래! 인마! 졸업은 했어?!”

“아니요. 졸작 준비 중입니다. 그래서 지금 죽겠어요.”

예정우는 털털하게 웃으며 허훈의 말을 받았다.

“야! 나는 그거 때문에 학교 때려치웠잖아! 하하!”

아, 졸업을 못 한 거구나.

전생에선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자연스럽게 졸업작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도 스무스하게 끼어들어 볼까.

“형님. 학교 후배신가 봐요?”

그제야 예정우는 그들 사이에 있던 나를 허훈에게 소개했다.

“아! 여기는 후배였던 허훈. 운서대 영화과 입학은 했는데 졸업을 못 했거든. 하하. 훈아. 이쪽은 나랑 같이 현장 뛰고 있는 신바드.”

허훈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정우 선배 3년 후배 허훈입니다. 현장에서 뛰신다니! 너무 멋지십니다!”

전생에선 직접 본 적 없어 몰랐는데 엄청 싹싹한 스타일이다.

“예. 안녕하세요. 신바드입니다. 그런데 지금 졸작 준비하시나 봐요?”

내 목적은 오로지 그의 졸작이었다.

허훈은 왠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예. 단편 준비 중인데 무지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가 최대한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러시구나. 손 많이 모자라시겠네요······.”

“뭐, 단편영화 현장이 다 똑같죠.”

뭔가가 다급히 생각났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 형님. 저희 파노라마도 거의 끝난 마당에 시간 맞으면 도와드리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품 싹 다 들고.”

“오, 좋은 생각인데?”

우리 대화에 허훈이 적잖이 놀랐는지 눈을 끔벅거렸다.

“예?! 정말 그래 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히 정해진 예산의 굴레에서 매우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비품 하나라도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면 팔 벌려 환영할 수밖에 없다.

또 현장 경험 있는 우리는 과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일 테고.

“예. 당연하죠. 언제부터 며칠간 찍어요?”

“다음 주부터 3일간이요.”

“어휴! 마침 저희 이번 주까지 촬영이라 시기도 딱 맞네요! 3일 정도면 사무실에서도 별말 없이 비품 빌려주실 거예요.”

허훈이 머뭇거리다 이야기했다.

“근데 저희가 페이를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지금 고작 대학생의 코 묻은 돈이나 벌자고 이 졸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할 필요는 없지.

“어휴. 무슨 돈이에요. 서로 어려운 사정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예정우도 페이라는 말에 불타올랐는지 언성을 높였다.

“그래! 인마! 우리가 무슨 돈 받자고 하냐! 다 도우면서 사는 거지! 너 나중에 잘되면 우리 잊지나 말아라!”

허훈은 돌파구라도 찾은 듯 밝게 웃었다.

“아 선배님도 참! 그거야 당연하죠!!”

*

허훈과는 다음 주 촬영 전 한 번 더 만나기로 약속하곤 헤어졌다.

그가 저 멀리 보이지 않자 나는 예정우에게 물었다.

“형님. 운서대 이야기는 왜 안 하셨어요?”

“당연히! 쪽팔리잖아. 졸업도 못 한 이야길 왜 해.”

고작 쪽팔린다는 이유로 전생에선 내게 이야기를 안 했던 거다.

이 형님도 참.

운서대 이야기를 안 했으니 자연스럽게 허훈이 자신의 후배였다는 말도 할 수 없었겠지.

또 오늘이 없던 전생에선 그 둘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았을 것이다.

멀쩡한 카트는 찾아오지 못하지만, 역시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는 형이었다.

우리는 장을 서둘러 마친 뒤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고.

고시원에 도착하자마자 상자부터 찾았다.

신바드의 모험.

실은 촬영이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 해둔 상태였다.

‘졸업작품’과 ‘운서’의 단어가 있던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역시.”

저번 ‘다시마’와 ‘달걀’ 때와 같이 단어만 있던 페이지는 장면으로 변해 있었다.

[8. 대형 마트(낮-실내)

마트에서 미래의 거장 허훈을 발견한 신바드. 과거 허훈의 ‘졸업작품’과 관련된 인터뷰와 그가 ‘운서’대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또 신바드는 허훈이 예정우의 후배였던 인연으로 그의 졸업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예상대로 이 시나리오 북은 내게 유용한 정보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트 분량을 넘겨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어라? 왜 아무것도 없지?

저번처럼 뜨문뜨문 힌트 비스름한 것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백지였다.

이상한 마음에 몇 장을 더 넘겨보니 그제야 단어 몇 개가 보인다.

아예 아무 힌트도 주지 않는 구간이 있는 건가.

예상대로 돌아가는 게 없네.

그마저도 눈에 띄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당장에 미래가 더 중요하니 뒷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허훈과 같은 거장을 7년이나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 아까웠다.

그러니 우선 그의 졸업작품을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내가 얻을 건 얻어내며 관계를 다져나가는 것부터 해야겠다.

예정우와 허훈의 관계가 전생과 조금 달라진 것처럼 내가 그와 얽힘으로써 어쩌면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다.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했으나 2번째 인생을 부여받았는데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똑같은 인생을 반복하긴 싫었다.

아니,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손에 들린 <신바드의 모험>을 빤히 쳐다봤다.

길라잡이까지 있으니 든든한 건 덤이었다.

*

<파노라마>의 크랭크 업은 눈 깜박할 새 다가왔고, 별 무리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오랜만에 막내 경험으로 현장 감을 익힐 수 있었고, 몇몇 스태프들과는 얼굴을 틀 수 있었다.

언젠간 다 필요할 인맥들이다.

크랭크 업도 했겠다.

이젠 허훈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져야지.

오늘은 그를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그의 영화를 알아야 우리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운서대학교 내에 있던 카페에 도착한 나와 예정우는 카페에서 가장 넓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허훈과 그의 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얘들아! 다들 잘 지냈어?!”

예정우는 개중 아는 얼굴이 있었는지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의 인기척에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응? 그런데 왜 선배님들이지?

허훈이 내 표정을 봤는지 슬쩍 와선 이야기했다.

“영화판에 계시면 다 저희 선배님들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영화계에선 배우, 스태프 등 나눌 것 없이 자신보다 먼저 이쪽 판에 발을 들였으면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래도 그렇지.

좀 낯간지럽긴 하다.

허훈 감독.

사회생활까지 잘했던 거구나.

하긴 그만큼 올라 간 사람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번 생엔 내가 그렇게 올라가 주마.

“하하. 그렇긴 하죠. 뭐.”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인원이었는지 허훈은 소란스러운 10명의 시선을 끌었다.

“자, 이제 회의 시작합시다!”

그는 저번 마트에서 봤을 때보단 자신감이 붙은 느낌이었다.

“우선 촬영은 이틀 뒤부터 3일간 진행됩니다. 제가 편집 점 최대한 잡아놨으니 하루 촬영 시간 비상식적으로 늘어나진 않을 겁니다.”

그의 담담한 발언은 첫 시작부터 상당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졸업작품으로 연출을 처음 맡은 사람의 입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편집 점을 잡아놨다는 뜻은 영화의 완성품을 머릿속에 집어 넣어놨다는 말인데.

이건 베테랑 기성 감독도 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촬영이 늘어지는 대부분에 이유가 감독이 이걸 못해서다.

자기 작품의 확신이 없으니까.

허훈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몰랐다면 그저 이 말이 허세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소는 총 세 군데로 나경이가 섭외해놨는데 오늘 오신 정우 선배랑 바드 선배가 좀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처음이다 보니.”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경이라는 학생은 잽싸게 자신이 정리해둔 장소 리스트를 넘겨줬다.

어지간히 불안했나 보다.

쓱 훑으려는데 허훈이 우리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또 비품은 최소로만 준비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그건 저희한테 맡겨 두시고, 혹시 저희가 준비해야 할 소품 같은 것도 있습니까?”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아마 역할 분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거고.

의상, 분장, 미술, 소품 등은 진행 보는 팀에서 준비할 것이다.

“아, 많죠. 그것까지 봐주시면 너무 죄송한데.”

“그거 도와주려고 온 건데요. 뭐.”

아니. 꼭 내가 준비해야만 했다.

“그럼 도와주신다고 하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경아. 우리 씬리스트랑 예산 짜놓은 것까지 다 보여드리자.”

나경이라는 학생은 또 언제 들고 있었는지 서류들을 우리에게 곧바로 보여줬다.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음, 내 관심은 씬리스트.

각 장면에서 필요한 소품들을 빠르게 훑었다.

곧 눈이 멈췄고,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이거다!’

어느 주택 골목길에서 촬영하는 그 장면의 내용은 이랬다.

[얼굴에 멍이 든 채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있던 성희.

손에 들린 복권 한 장과 동전 하나를 꼭 쥐고, 흐느낀다.

필요 소품 : 즉석 복권, 동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