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신바드의 모험
처음엔 이게 진짠가 싶어 예정우의 볼을 내내 늘어뜨리며 파노라마의 촬영 현장을 따라다녔다.
눈을 뜨면 현실로 돌아갈까 싶어 잠도 자봤지만.
일어나서 맞이하는 현실은 여전히 과거였다.
그 짓을 정확히 3일 동안 해본 결과 15년 전으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게 집에도 가지 못하며 막내 생활을 했고.
오늘은 가뭄에 콩 나듯 있던 소중한 휴차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우, 삭신이야.”
이 시절 무모했던 나는 무작정 영화 하나만을 생각하며 서울로 상경해 고시원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이사도 참 많이 다녔기에 당시에 살던 고시원 주소는 당연히 헷갈렸다.
다행히 탑차에 달려 있던 내비게이션의 최근 목적지엔 익숙한 주소가 있었다.
가보니 내가 살던 고시원이 맞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달랑 놓여 있는 그 좁은 곳을 보고 있자니······.
풀썩.
감상에 젖을 시간이고 뭐고 드러누웠다.
몸은 젊어졌다지만.
오랜만에 뛴 현장은 만만치 않았다.
잊고 있었다.
표준근로계약서의 감사함을.
각설하고 곰팡이 핀 천장 벽지를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15년 전으로 돌아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무리 내 인생이 굴곡 많고, 평탄하지 않았다지만.
이 상황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오다니?
누군가에게 말했다가는 미친놈 취급받을 일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내 눈은 반짝였다.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곱씹어보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그 불운을 모조리 피해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피곤한 몸을 힘겹게 일으켰으나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갔다.
책상 밑에 있던 박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곳엔 케케묵은 노트북 하나가 들어 있었다.
건축과 졸업을 포기하고, 영화계로 급격한 진로 전향을 하며 수중에 있던 돈을 끌어모아 간신히 샀던 노트북이다.
노트북을 살 때만 해도 시나리오를 쓰고, 그 시나리오로 연출까지 하는 성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게 재능이 없다는 걸 알게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연출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영화를 하고 싶어 시작한 제작팀은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고, 그렇게 15년을 살아간 것이다.
2번째 인생이라고, 느닷없이 재능이 생기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번엔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 놈아. 이번 생엔 빡세게 굴려주마.
상자 안의 노트북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안엔 노트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
노트북 아래에 처음 보는 책 하나가 놓여 있었다.
들어보니 보라색과 검은색이 섞인 오묘한 색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특이한 표지보다 내 눈을 더 의심케 하는 건 제목.
[신바드의 모험]
신바드는 내 이름이다.
특이한 건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놀림도 많이 받곤 했으니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신박한 놀림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두께와 사이즈가 시나리오 북과 비슷한데.
나 하나를 놀리기 위해 이걸 만들었다고?
아니, 그보다 그 누군가가 고시원까지 들어와 이곳에 놓고 갔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으니 이제 웬만한 일은 그러려니 하려고 했지만.
참으로 적응이 안 된다.
<신바드의 모험>의 첫 장을 펼쳤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1. 지하 주차장(낮-실내)
영화 <어드벤처>의 제작사 대표 신바드(43). 주연배우 서태원의 학폭 논란으로 <어드벤처>의 제작발표회가 당일 취소된다.]
익숙한 내용의 뒤로는 역시나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회귀 전 빙판길에서 넘어졌던 일까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장을 넘기자 이번엔 이런 글이 나왔다.
[4. 파노라마 촬영장(낮-실외)
15년 전 막내 시절로 회귀한 신바드. 갑자기 비가 오는 현장에서 그동안의 경험으로 활약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신바드의 모험>은 요 며칠 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시나리오처럼 엮어 놓은 모양새였다.
잠깐.
그렇다는 건 혹시?
빠르게 몇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곳엔 마치 이 시나리오 북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다면 현재의 내 모습이 스크린에 나오고 있을 법한 신이 있었다.
[6. 고시원(밤-실내)
<신바드의 모험>이라는 이상한 시나리오 북을 찾은 신바드. 그곳엔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들이 정리되어 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잖아.
그럼 미래의 일도 알려주는 건가?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다음 장을 보기 위해 고서를 발굴하는 듯한 느낌으로 서서히 종이를 넘겼다.
그러나.
“응? 이게 뭐야?”
흘러 넘어온 세월이 세월인 만큼 15년 전 자잘한 일들을 모두 기억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신바드의 모험>이 그런 부분들을 콕콕 짚어주나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지문과 대화가 빽빽이 적혀 있던 앞부분과는 확연하게 글자 수부터 달랐다.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살펴봤으나 뜬금없는 단어들이 뜨문뜨문 적혀 있는 몇 장 말고는 아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페이지가 대부분이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단어들을 훑었다.
조사가 아닌 단어 중 눈에 띄는 것은.
[다시마, 달걀]
이 2개 정도.
하지만 앞뒤 맥락을 모르니 뜻하는 의미를 유추하는 게 쉽지 않았다.
혹시 숨겨진 뭔가가 있을지 몰라 실눈으로 보기도 하고, 책을 탈탈 털어보기도 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꼬르륵.
‘달걀’이라는 단어를 계속 보고 있자니 배만 고파왔다.
잠시 시나리오 북을 내려놓고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쯤 넣어놨던 것 같은데······.
‘찾았다!’
서랍에서 꺼내든 건.
오동통한 면발이 일품인 라면 한 봉지.
그 시절 공동주방에 보관했다가 하도 없어지는 통에 실온 보관 음식들은 모두 책상 서랍에 숨겨놨었다.
그대로 봉지라면 하나를 들고, 고시원의 공동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올려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 있는 모든 반찬통, 식품 등엔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신바드]라고 적힌 김치통을 꺼냈다.
다행히 한 끼는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번엔 달걀 보관 구역으로 눈을 돌렸다.
일렬로 쭈욱 나열된 달걀에도 역시.
각기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든 달걀을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내 이름이 적힌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쩝.
2개 넣어 먹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식탁에 김치통을 올려놓고, 냄비를 확인하니 물이 끓는 중이었다.
얼른 봉지라면을 뜯어 수프를 넣고.
다음은 면.
마지막으로 오동통한 라면의 핵심인!
다시마를 넣으려 봉지를 탈탈 터는데.
“어!”
다시마 2개가 뜨거운 물 위로 퐁퐁! 하고 떨어졌다.
오, 운이 좋은데.
다시마가 2개라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번엔 달걀을 들어 냄비 가장자리에 탁탁! 부딪쳐 깨트렸다.
껍질 속에서 숭덩 미끄러진 알맹이는 보글보글 끓는 라면 속으로 쏘옥 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 쌍란?!”
2개를 먹고 싶던 내 염원을 누군가 알고 있던 건지.
영롱한 노른자는 라면 국물 위로 무려 2개나 둥둥 떠 있었다.
전생에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나였다.
다시마 2개와 쌍란의 출연은 마치 넓고 푸른 들판에서 네 잎 클로버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운수 대통이네.
피곤함까지 날아가는 기분으로 완성된 라면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다시마 2개와 쌍란 덕분에 순조로운 한 끼였다.
맛은 말해 뭐해.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설거지까지 야무지게 해놓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신바드의 모험>이라는 시나리오 북을 보니 생각났다.
맞다.
나 저 이상한 놈 보고 있었지.
한껏 게을러진 몸짓으로 침대에 앉아 시나리오 북을 다시 펼쳤다.
그런데.
“응? 글씨가 생겼어?”
내 말처럼 시나리오 북은 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7. 고시원 공동주방(밤-실내)
배가 고파 라면을 끓이던 신바드는 ‘다시마’와 ‘달걀’의 노른자가 2개씩 나오는 뜻밖의 행운을 겪으며 전생과는 다른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단어의 앞뒤로 문맥에 맞게 문장이 생겨난 것이다.
요술 시나리오 북이라도 되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유추해보자면.
이 <신바드의 모험>은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을 시나리오로 옮기고 있었다.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단어들이 내게 힌트라도 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까와 같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장으로 넘겼는데 보이지 않던 단어 2개가 생겨있었다.
[졸업작품, 운서]
이 단어들도 ‘다시마’와 ‘달걀’처럼 나중에 장면으로 변하려나.
어떻게든 둘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보려는데······.
슬슬 눈이 감겨왔다.
아무래도 3일 동안 너무 무리했나 보다.
배도 부르고, 등도 따땃하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풀썩-!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우선 잠이나 자자.
*
경력 있는 신입.
회귀 전에는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린가 싶었는데 제2의 인생에선 내가 듣고 있었다.
“바드야. 너 요즘 왜 그래?”
“예? 뭐 가요?”
우리는 내일 촬영 현장에서 필요한 부식 장을 보고 있었다.
옆에선 물과 음료가 가득 든 무거운 카트를 끌던 예정우가 가자미눈을 하고 흘겨보는 중이었다.
“촬영 때 필요할 만한 비품들은 귀신같이 준비해놓고, 여유가 철철 넘쳐서는 현장에서 뛰어다니지도 않잖아!”
“······.”
음, 노흥기 감독이 녹차를 좋아했던가?
예정우의 말에 대꾸 대신 가격대가 좀 있는 녹차음료를 카트에 담았다.
내가 귓등으로 들었음에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꼭 피디님이 항상 강조하시던 경력 있는 신입처럼 일하고 있잖아! 며칠 전만 해도 안 그랬던 놈이!”
너무 일을 잘해도 이런 소릴 듣다니.
참으로 이상한 논리다.
“그렇게도 원하던 경력 있는 신입이라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어? 뭐, PD님은 그렇겠지만! 내가 어색해서 못 살겠다고오! 제일 이상한 건 담배는 왜 끊냐고! 왜!”
담배는 회귀했을 때부터 입에도 대지 말아야지 생각했고, 실천했을 뿐이다.
“건강 생각해야죠. 그보다 형님. 한시도 쉬지 못한 형님 입도 휴식 시간을 좀 줘야 할 것 같은데 카트 하나만 더 가지고 와주세요.”
저렇게 투덜대도 며칠 전부터 내가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하고 있었다.
“아, 응. 갔다 올게.”
변수가 많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내 말을 잘 들어서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인 거다.
직급으로 따져본다면 내 위였으나 옛날부터 제작팀 내에서 그딴 계급 따윈 필요 없다고 외쳐대던 사람이었다.
그 권위 없는 모습이 좋아 따랐던 형이기도 하고.
쫄래쫄래 카트를 가지러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장보기에 열중했다,
회귀 당시 <파노라마> 촬영은 2주 정도 남았던 상태였다.
바쁘디 바빴던 일정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촬영은 2회차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슬슬 촬영이 끝나면 찬란한 제2의 인생을 위해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미래 정보로 뭐라도 해볼까 했지만.
우선은 가지고 있는 자본이 없다.
자본부터 모아야 한다.
그때, 저 멀리 빈 카트임에도 낑낑대며 끌고 오는 예정우가 보였다.
하필이면 한쪽 바퀴가 이상한 놈을 골랐나 보다.
저렇게까지 허술했던 형이었나.
경험과 그릇이 커지다 보니 세상을 보는 시야 자체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그를 애써 이해하며 기다리는데 근처에서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냅다 귀로 와선 꽂혔다.
“훈아!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맛있는 거 먹어야지! 뭐 먹고 싶은데?”
“아니야. 엄마. 그냥 엄마 얼굴 보러 온 거라니까.”
‘훈? 익숙한 이름인데.’
한 청년이 자신의 어머니와 장을 보러 온 모양인지 카트를 끌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이름 못지않게 어딘가 익숙했다.
“어허! 허훈! 엄마가 직접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니깐!”
모자가 실랑이하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그런데 허훈이라······.
진짜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한 인물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저 사람은?! 허훈 감독?’